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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웹진

  • ※「공익웹진」은 시민 기록 활성화를 위해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가 발행하는 참여형 아카이브입니다. 경기도 공익활동 현장의 다양한 시선과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콘텐츠의 내용은 경기도민 에디터가 직접 취재·작성한 것으로, 일부 의견은 기관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노조하면 왜 남성 노동자를 떠올렸지?

    인터뷰가 계속될수록 내 안에 올라오는 질문이었다. 80년대 마산수출자유지역 여공으로 일하다 TC전자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노조위원장이 된 사람. 16개월의 옥고를 치른 후, 안산과 서울에서 전국여성노동조합 경기지부장, 서울지부장을 역임한 사람. 고등학교 급식조리원들의 연장근로 수당 2.5배 쟁취하고, 서울 초등돌봄전담사 4시간 시간제 노동자들의 차별 시정 소송을 대법원 승소로 이끈 사람. 김정임 님은 싸우는 만큼 세상이 변한다.”라고 말한다. 그의 이야기는 대한민국 여성 노동운동의 역사였다.

     
     / ⓒ인터뷰이 제공
     

    Q 역대급 폭염에 건강하게 활동하며 일하는 일상이 궁금하다.

    현재 요양보호사로 주 5일 일하고 있다. 요즘 퇴근길에 더워서 서점에 들른다. 책 보며 마음을 식히다가 선선할 때 집에 와서 저녁 먹고, 공원 산책하며 운동한다. 한 달에 한 번 수지 에니어그램 강사 모임에 참여하고, 줌(Zoom)을 통해 화상으로 스님과 책을 읽는다. 인사동에서 써클댄스도 추고 친구와 만나 노래방에서 목청껏 노래도 부른다. 8월에는 딸과 사위들 생일에 부모님 제사까지 집안 행사로 바쁘지만 아주 즐겁게 보내고 있다.

     

    Q 요양보호사로 좀 멀리 출퇴근한다고 들었다.

    영등포에서 마곡으로 출근한다. 돌보는 어르신은 69세 파킨슨병으로 요양 등급 2급이다. 출근하면 제일 먼저 식탁과 의자를 깨끗이 닦는다. 파킨슨병 환자는 거동이 불편해 음식을 자꾸 흘리기 때문이다. 나는 식사 수발하고, 목욕시키고, 빨래 청소 음식 조리까지 한다. 가끔 휠체어로 공원산책도 하고 같이 장도 보고, 수명산 도서관에서 큰 글자 유아용 책을 빌려와 읽어드리거나 색칠 공부, 누워서 하는 요가 동작도 함께 한다.

    왕복 출퇴근 시간만 2시간 넘지만, 서로가 잘 맞아 정성으로 마주하고 있다. 예전에 안산에서 서울로 경기도 전역으로 하루 4시간 출퇴근하며 활동하던 경험이 쌓여서 힘든 줄 모르고 한다. 한 달에 120~150만원 4대 보험 빼면 빠듯한데, 큰 빚 없이 자립해서 감사하다.

     

    Q 강사로 활동한다는 수지에니어그램이 어떤 프로그램인지 소개한다면?

    '수지에니어그램'180장의 카드를 가슴과 양팔에 붙였다가 떼어가며 내가 누구인지, 나답게 사는 게 뭔지 참 나를 찾는프로그램이다. 수산나(수지) 선생님이 대안학교 청소녀들을 자존감을 키우기 위해 시작했는데 전국에 10개 센터와 해외에 2개센터를 두고 있다. 나는 9번 유형인데, 생명을 살리고 사람을 넉넉하게 품어주는 넓은 품과 조용한 힘이 있는 유형이다. 나를 제대로 알면 나다운 삶을 살게 된다. 2018년부터 지인들에게 성당, 학교, 상담실과 집에서 다양한 사람들에게 나눔을 하였고 일하는여성아카데미 교육위원으로 강의해 왔다.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과 부담 없이 수지에니어그램을 하는 게 꿈이다.

     
     / ⓒ일하는여성 아카데미
     

    Q 청년 시절 마산수출자유지역 노동자로 들어갔고, 그 지역에서 노동 운동한 걸로 안다.

    나는 거제도 출신이고 15녀 중 셋째 딸이다. 인문계 고등학교에 다니며 당연히 대학에 갈 줄 알고 모범생으로 공부했는데, 어머니가 강하게 반대했다. 남동생을 대학 보내야 한다는 이유였다. 울며 싸우다 결국 대학을 포기했다. 인문계 졸업하고 대학 안 가면 시골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동네 친구를 따라 공장에 취업하러 마산으로 갔다.

    고등학교까지 시켜놨더니 왜 공장에 가냐.”

    내가 공장 간다니까 어머니는 울고불고 말리다가 쌀 한 되박을 싸서 보내주셨다. 마산 수출자유지역에 있는 일본계 전자 회사에 들어가 도장 날인 작업을 했다. 나중에는 임금과 환경이 훨씬 좋은 미국계 다국적 기업 ‘TC 전자로 이직해 본격적인 공장 노동자로 일했다.

     

    Q 공장 생활 중 삶의 커다란 전환점을 맞았다고 했다. ‘아욱실리움 기숙사가톨릭여성회관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가톨릭고등학교에 다닌 인연으로 살레시오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아욱실리움 기숙사에 들어가 공장에 다녔다. 거긴 수녀님들과 함께 매일 새벽미사를 하였고, 1980년 광주 항쟁 비디오도 거기서 처음 볼 수 있었다. 가톨릭 여성회관에서 이경숙 선생님이 진행하는 여성교실강좌를 들었는데, 내 눈이 번쩍 뜨이는 이야기였다. 그동안 부모님으로부터 받아온 성차별, 공장에서 여성 노동자로서 '공순이'라 불리며 받아온 차별이 사회 구조적 문제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노동조합이 무엇인지 알게 된 계기였다.

     

    Q 그러다 노동운동에 투신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무엇이었나?

    1987년 노동자 대투쟁(7~9월 전국적으로 분출한 노동자들의 노동쟁의와 민주화운동) 당시 하루가 다르게 옆 공장들은 노조를 만드는데 우리 회사만 노조가 없었다. 어느 날 과장이 나를 불렀고, 현장분위기가 시끌시끌하고 일이 제대로 되지 않자 조회대 앞에 모아 놓고, 조용히 시키라며 나한테 마이크를 주었다. 내가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여러분 어떻게 할까요? 일할까요? 나갈까요?” 뜻밖에도 모두 나가자!”“나가자!”소리쳤다. 순식간에 1,500명이 넘는 여공들이 밖으로 쏟아져 나와 임금 인상하라!” “인간답게 살고 싶다!” 구호를 외치며 집회를 열었다.

    회사는 목요일부터 4일간 휴업을 선포했고 우리들은 분임장 60명이 모여 아욱실리움 기숙사에 모여 밤새워 노조를 결성하였다, 월요일 노조 결성보고를 홍보하러 갔다가 회사 간부들에게 잡혀가 빨갱이라는 욕을 먹고 노조 간부였던 친구 2명과 함께 대구새마을연수 보내졌다. 2주후 회사로 복귀하니 60여명을 모아 놓고 노조강제 해산을 하게 했다. 그리고 기술과와 설비과로 부서이동을 당하였다. 온갖 탄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19885월 비밀리에 여성 동지들과 노조를 재창립했다.

     
      / ⓒ인터뷰이 제공
     

    Q 노조를 와해하려는 구사대의 폭력이 대단했을 텐데 어떻게 계속 싸울 수 있었나.

    노조를 재창립하자 회사는 남자 구사대(救社隊, 노동운동 파괴를 목적으로 회사측이 만든 노동자 조직) 300명을 동원해 무자비한 폭행을 저질렀다. 온몸이 멍들고 집단 구타를 당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이 소식이 창원 지역 남성 노동자들에게 전해지면서 지역 전체의 투쟁으로 번졌고, 결국 회사로부터 노조 인정을 받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회사는 위장 폐업을 시도했고, 우리는 기계 출고를 막으며 1년 가까이 공장 점거 투쟁을 해야 했다. 198912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공권력이 투입되어 전원 연행되었고, 나는 업무방해 및 폭력행위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1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마산교도소와 원주교도소 독방에서 꼬박 실형을 살고 19915월에 출소했다.

     

    Q 감옥 생활은 어땠나? 감옥에 가기 전과 후를 비교해 달라.

    내가 감옥에 가기 전 농성장에서 동지들과 농성장 사수팀과 재정팀으로 다양한 재정사업을 했다. 볼펜 판매 양말 판매 대학축제 때 김치전 판매도 하고, 서울 본사 대사관 부산 영사관등을 다녔다. 교도소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독서와 편지쓰기였다. 원주교도소 독방에 홀로 수감되어 너무 외롭고 힘들 때 그에게서 편지가 왔다. 답장으로 마음을 나누었고, 출소하는 날 원주교도소 정문으로 그와 TC동지들이 대형 버스로 꽃다발과 두부를 들고 찾아왔다. 그도 나처럼 구속된 경험이 있어 노동자의 삶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했던 것 같다. 그 후 1992년에 우리는 결혼했고 두 딸을 낳았다.

     

    Q 경남의 여성 노동 활동가가 어떻게 안산시민이 되었나?

    2003년 남편이 서울에서 일하게 되면서 나를 올라오라 했다. 나는 마산창원 여성노동자회에서 일하며 지역 활동을 하고 있었다. 안산여노 회장과 남편이 먼저 만나 아파트 전세를 얻으니 나도 아이들과 함께 이사와서 다음 날부터 안산여성노동자회로 출근했다. 여성 노동자복지센터와 고용평등상담실을 맡았다. 한부모자녀들과 체험학습 등, 실업계고등학교 노동법·최저임금 내 권리찾기 등 강의활동과 직장 내 성희롱예방교육 강사 활동을 하였다.

    특히 직장 내 갑질과 최저임금 위반으로 힘들어하던 청소 노동자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최저임금 위반 사업주를 노동부 진정으로 처벌받게 하고, 출산·육아휴직 상담, 홈플러스 매대 노동자 상담으로 수많은 여성 노동자를 노조 조합원으로 연결했다. 한양대 안산캠퍼스 청소미화원 조합원들과는 풍물과 민요를 함께 배우고 공연을 올리기도 했다.

     
      / ⓒ인터뷰이 제공
     

    Q 그러다 안산을 넘어 전국여성노동조합 경기지부장과 서울지부장이 된 건가.

    안산시흥지부, 부천지부. 영양사지회. 사서지회가 주춧돌이 되어 전국여성노동조합 경기지부를 창립하였고 나는 안산여노 고용평등상담실 일과 안산시흥지부장를 겸하다 경기지부 조직국장이 되었다. 이후 경기지부장이 되었다. 안산 한양대 청소미화원 조직과 안산 지역 고등학교 급식조리원들의 처우개선 투쟁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중식·석식으로 하루 4시간 넘게 연장근로를 하는데 학교는 2시간만 연장근로 수당을 지급하겠다고 하였다. ‘연장근로근로기준법이 바뀌는 시점이었다. 조리원들은 억울해하며 어떻게 하면 일한 만큼 댓가를 받을 수 있는지 상담해 왔다. 공동교섭을 요구했으나 경기도 교육청은 사업주가 아니라며 교섭에 임할 수 없다고 했다.

    1년 가까이 고등학교를 돌며 교섭을 벌인 결과 연장근로 수당을 1.5배가 아닌 2.5배로 받는 단체협약을 타결해 냈다. 또한 서울지부장 시절에는 시간제 돌봄전담사들을 조직하여 4시간 시간제 초등돌봄전담사들의 차별 시정 투쟁을 시작하여 지노위 중노위 지법 고법 대법원까지 가서 차별 시정 판정을 받았고 그동안 차별 받았던 것을 보상받았다. 노동조합을 하면서 억울하면 싸우는 만큼 세상이 변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급식 조리원들도 초등돌봄전담사들도 똘똘 뭉쳐 싸운 결과다. 유능한 김재진 노무사님과 공감 변호사님들, 그리고 많은 분들이 연대해 준 덕분이다.

     
     / ⓒ인터뷰이 제공
     

    Q 안산여성노동자회에서의 활동과 연은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가?

    안산여노에서 근무할 때 고용평등상담실 상담이 주 업무였다. 직장 내에서 여성노동자가 받는 성차별과 불합리한 차별에 대한 상담전화를 받고 무료 변호사를 선임하여 행위자인 상사가 처벌받고 억울한 노동자가 제 자리로 돌아갈 때 행복했다. 고용평등상담실 예산이 삭감되니 퇴사했다. 그래도 한 달 한 번 뚜뚜(뚜벅뚜벅 걷기)’ 소모임 회원들과 함께 걷고 여행한다. 늘 일에 쫓기고 바빴지만, 페미니즘 토론토임 이프에도 꾸준히 참여하고 있다. 줌이라 퇴근 후 할 수 있어 좋다. 무디어지기 쉬운 여성 노동과 성평등 이슈를 다양한 연령의 남녀가 함께 책과 영화로 토론한다.

     
     / ⓒ인터뷰이 제공
     

    Q 평생 여성 노동운동을 해왔고 비정규직 차별 철폐를 위해 싸워왔는데, 중년에 가장 저임금 돌봄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이런 여성의 노동 현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20대 때는 공장에서 산업역군이라며 착취당하고, 30~40대에는 IMF를 거치며 비정규직으로 내몰렸는데, 60이 된 지금도 최저임금 수준의 돌봄 노동자다. 그동안 대학원도 나오고 사회복지사, 평생교육사 등 자격증을 땄지만 중년 여성노동은 여전히 단시간·저임금 비정규직이다. 급식, 청소, 돌봄은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필수 노동임에도 적정임금도 정당한 대우도 거리가 멀다.

    비정규직 없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며 그렇게 싸웠는데 딸 세대마저 2년 계약직을 전전하는 걸 볼 땐 마음이 아팠다. 싸우는 만큼 세상이 변하는 걸 경험했는데, 세상은 여전히 쉽게 바뀌지 않는구나 한숨이 나오기도 한다. 요즘은 내 마음을 들여다보며 평정심을 찾으려 한다.

     

    Q 현재 삶에 어려움, 또는 앞으로 꼭 이루고 싶은 계획이 있다면 말해 달라.

    남편과의 관계가 숙제로 남아 있다. 동지적으로 잘 살 줄 알았는데 그는 지금 나 말고 다른 곳이 좋다고 멀리 떠나 산다. 내가 오래 가슴에 품어온 버킷리스트인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10월에 1617일로 친구들과 함께 다녀오게 됐다. 그리고 곧 태어날 첫 손주 만날 날을 설레며 기다리고 있다. 노동조합 활동할 때 가장 당당하고 에너지 넘쳤던 것처럼, ‘수지 에니어그램이라는 좋은 도구를 통해 많은 사람들과 따뜻한 활동을 마음껏 펼치며 살아가고 싶다.

     / ⓒ인터뷰이 제공

     

     

    여공에서 전국여성노동조합 서울지부장까지
    꿀벌

    조회수 113

    2026-08-13
  • ※「공익웹진」은 시민 기록 활성화를 위해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가 발행하는 참여형 아카이브입니다. 경기도 공익활동 현장의 다양한 시선과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콘텐츠의 내용은 경기도민 에디터가 직접 취재·작성한 것으로, 일부 의견은 기관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1990년대 중반까지 잘 나가던 은행원이 현모양처꿈을 안고 결혼했다. 남편의 잇따른 사업 실패와 채무, 도박으로 결혼생활은 18년 만에 마침표를 찍어야 했다. 생계형 한부모 여성노동자는 닥치는대로 일했다. 식당 아줌마, 공장 노동자, 국민건강보험 전화상담사를 거쳐 지금도 비정규직 일자리로 먹고산다. “이혼 10년을 살아내니 내 삶에 눈이 뜨였다라 고백하는 이문옥 님을 소개한다.

    여성에게 일과 가정이란 무엇인지,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로 산다는 것에 대해 들어보자.

     

    Q 현재 행정복지센터 비정규직 직원이다. 맡은 일이 무엇인가?

    안산시의 7개월짜리 계약직 디딤돌일자리로 행정복지센터에서 일상생활 매니저로 일하고 있다. 독거 어르신들을 방문해 안부와 일상의 문제들을 돕고, 사무실에선 행정 보조도 한다. 3월부터 시작했으니 어느새 6개월째다. 안산에서 두 딸을 키우며 쉬지 않고 일해온 30년 차 일하는 엄마. 최근 몇 년은 계약직으로 일하고, 끝나면 또 뭘 해야 하나 고민하며 일을 찾아서 일한다. 며칠 전 국세청 홈택스에 들어갔다가 체납관리단 모집 공고를 보고 바로 지원해 뒀다. 10월부터 12월까지 3개월 일자리라 내 조건에 맞더라.

     
      / ⓒ인터뷰이 제공
     

    Q 1996년까진 일 잘하는 여성 은행원이었다. 좋은 보수의 일자리를 버리고 서울에서 안산으로 오게 된 계기는 결혼이었나?

    결혼을 앞두고 은행에서 퇴사해야 했다. 당시 내 월급이 200만 원이 넘었다. 여상 졸업하고 입사해서 2년 만에 주임 달고, 3년 만에 계장 달 만큼 진급도 빨랐다. 하지만 은행 일이라는 게 현금을 직접 다루고, 매일 마감 시간에 맞춰 정산하니까 항상 팽팽한 긴장 속에 살았다. ‘절대 실수하면 안 된다라는 중압감에 시달리다 보니 시도 때도 없이 위장병으로 병원 가기 일쑤였다.

    <고용보험법>도 없던 시절이라 여성은 결혼하면 퇴사하는 게 규정이었다. 언니들 중엔 비밀리에 결혼하고 쉬쉬하며 다니는 경우도 있었다. 8년 경력자로 과장 시험을 앞두고 결혼 날짜가 잡혔다. 그때는 현모양처가 되는 게 여자의 행복인 줄 알았다. 모아놓은 돈으로 신랑을 도왔다.

     
      / ⓒ인터뷰이 제공
     

    Q 낯선 안산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는데, 현모양처 할만하던가?

    주산 부기 타자 학원 선생 소개로 그의 동생을 만났다. 선생을 믿고 만났는데, 막상 보니 결혼 준비에 대책이 없더라. 5남매의 막내지만 집에서 도움이 없었다. 첫 단추부터 싸했지만 내가 참고 노력하면 되겠지!’ 하고 내 돈을 꿔주며 결혼했다. 안산에서 남편이 빵 배달 대리점을 시작했다. 100% 현금거래라 저녁마다 현금을 셀 땐 금방 돈을 벌 것처럼 보였다.

    총판으로 사업을 넓히면서 문제가 꼬이기 시작했다. 사업 자금이 부족하니까 내 돈 천만 원에, 8년 부은 국민연금 환급금까지 다 깨서 대줘야 했다. 하지만 그는 밤마다 도박과 게임에 빠져들더라. 현금이 줄고, 거래처 미수금이 쌓이는데, 확인해 보면 이미 돈을 당겨쓰고 날려버린 상태더라. 내 명의로 은행 대출, 보험약관 대출, 사채와 카드까지 메꾸다가 결국 마지막 벼랑에 몰리더라.

     

    Q 그렇게 열심히 일했는데 빚더미에 이혼이라니, 쉬운 결정 아니었을 거 같다.

    2012년부터 내가 이혼을 요구했지만 2014년에야 끝났다. 결정적인 계기는 우리 큰애였다. 고등학교에 진학했는데, 담임 선생님이 한부모 가정이며 저소득층 자녀장학금과 급식비 지원 안내문을 보냈다. 내가 딱 깨달았다. ‘, 내가 남편 울타리를 못 버리면 빚에 쫓기다가 아이들의 미래까지 망치겠구나.’ 서류상으로라도 깨끗하게 정리해야 애들 공부를 시키겠더라.

    남편은 서류 정리를 안 해주려 버텼다. 내가 법원에 가서 서류 사인만 해주면 우리 생활엔 아무 변화 없게 해주겠다”, 설득했다. 법원 상담관한테 이렇게 어려운 상황인데 처리해 주는 게 맞다라는 말을 듣고서야 서명하더라. 4주간의 숙려기간 후 서류가 정리되던 날, 서운함이나 슬픔은 1%도 없었다. ‘, 이제 드디어 이 지옥 같은 늪에서 벗어났구나!’ 엄청난 해방감만 느꼈다.

     
      / ⓒ인터뷰이 제공
     

    Q 애 둘 딸린 이혼녀로서 새출발할 때, 마음이 여유가 없었을 거 같다.

    애 둘 데리고 나와서 바로 동사무소에 찾아갔다. “내가 애 둘이랑 살길이 뭐냐?” 물었더니 LH 임대주택을 가르쳐 주더라. 바로 신청했는데 떨어졌다. 다른 조건은 다 똑같은데 청약저축이 없어서 가점을 못 받았다더라. 기가 막히고 서러워서 직원한테 그랬다. “청약저축에 넣을 돈 있었으면 애들 생활비에 다 보탰지, 이런 게 있는 줄 알고도 안 넣었겠냐.”

    그길로 은행으로 달려가 청약저축 제일 적게 넣는 금액이 얼마냐?” 물었다. 매달 2만 원씩 차곡차곡 부었다. 1년 남짓 지나 다시 LH 공고가 떴다. 아이 둘 손잡고 임대주택 후보지를 직접 둘러본 후, 교통과 편의시설이 좋은 중앙동으로 정했다. 마침내 당첨 통보를 받고 집 문을 열었을 때, 온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한부모로 기초생활수급 주거 급여 대상이 되었다.

     

    Q 한부모 여성 가장으로서 생계를 홀로 책임지며 걸어온 길에 박수를 보낸다. 노동자로서 해온 일이 수없이 많을 것이다. 노동의 역사를 약술해 보자.

    홀로서기 본격 시작은 식당 아줌마였다. 아는 동생이 쌈밥집을 열며 도와달라 했다. 남들은 10분 만에 하는 쪽파 한 단을 나는 눈물 흘리며 2시간 다듬었다. 하루 12시간 노동하고 한달 150만 원, 눈물이 나더라. 1년 하니 온몸이 만신창이로 골병이 들었다.

    핸드폰 부품 공장에서 3년 가까이 일했다. 시급 4,860원을 받으며 주야간 잔업에 주말 특근까지, 어떨 땐 24시간 근무로 뼈가 부서져라 일했다. 일이 끊기면 용역 과장한테 주말 알바를 받아내고, 큰애까지 알바를 시켰다. 요양보호사 교육원을 거쳐 국민건강보험 고객센터 상담원을 하다, 비정규직 병원동행 매니저, 일상생활 매니저까지 이어 왔다.

     / ⓒ인터뷰이 제공
     

    Q 국민건강보험 상담 일은 어떻게 하게 됐나? 일하던 중, 100일 만에 1,000명의 조합원을 모아 노동조합을 세우고 역사를 쓴 비밀이 뭐였나?

    국민건강보험 상담원으로 들어가니, 간접고용 용역업체 구조가 참 야속했다. 1년마다 용역이 바뀌면 퇴직금을 정산해 버려서 경력이 다 끊기고, 화장실 갈 시간조차 제대로 없는 열악한 조건이었다. “용역업체 중간 착취 말고 공단에서 직접 고용해라. 우리도 인간답게 일하고 싶다는 열망이 가슴속에서 끓어올랐다.

    2019년에 뜻있는 동료들과 결의하고, 100일 동안 비밀 작전으로 조합원을 모았다. 10주 만에 1,000명의 조합원을 조직해 창립총회를 열었다. 대의원 선거로 내가 부위원장이 되었다. 노동조합이 결성되었지만 사측과의 충돌은 심했다. 조합원들의 단결과 투쟁으로 휴가와 생리휴가를 자유롭게 쓰고, 눈치 안 보고 화장실 갈 수 있는 기본권리를 쟁취해 냈다. 동료들이 나를 두고 건강보험 고객센터 노조의 역사적 인물이라 불러줄 때, 보람을 느꼈다.

     

    Q 노조활동을 통해 안산여성노동자회로 연결된 건가? 여성 노동을 바라보는 시선과 삶의 태도에 변화가 있었을 거 같다.

    처음엔 노동조합자도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요양보호사 교육원에서 일할 때 팩스로 직장 내 성희롱 예방 교육안내문이 들어왔길래, 강의 들으러 간 게 안산여성노동자회와의 첫 인연이었다. 교육 후 수강생들과 후속 모임으로 책 모임을 만들고, <82년생 김지영>을 읽으며 토론한 게, 지금 10년 차 페미니즘 토론모임 이프의 시작이었다.

    여성노동자회 활동을 통해 세상과 노동을 보는 눈이 180도 달라졌다. “내가 겪는 부조리와 차별이 내 개인 탓이 아니라, 사회 구조적인 문제라는 걸 깨달았다. 2023년부터 안산여성노동자회 이사로 참여하고 있다. 여성들이 존엄하고 평등하게 일하는 세상을 위해 작은 힘을 보탠다.

    특히 안산여성노동자회 회원 소모임 '뚜뚜(뚜벅뚜벅 걷기)'의 모임지기로서 한달에 한번 회원들과 함께 뚜벅뚜벅 걷고 여행하는 것이 가장 즐겁다.

     / ⓒ인터뷰이 제공

     

    Q 한부모 여성 노동자로 살아오면서 특별히 기억나는 일이 있다면 이야기해 달라.

    전남편과의 관계는 깨끗이 정리됐다. 그러나 이혼 후 홀로서기로 힘들 때 일로 연결되어 오랫동안 마음 쓰던 인연이 있었다. 나는 그의 일을 봐주고 그는 경제적으로 나를 좀 도와주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가 자기 맘대로 전화해서 내게 요구하고 자기 말만 하는 등 이기적인 태도를 보였다. 예전의 나라면 속 끓이며 끌려다녔을 텐데, 아주 단호하게 선을 긋고 관계를 정리했다.

    남의 기분이나 사정에 휘둘리지 않고 내 삶의 주도권을 딱 쥐고 나니, 가슴이 사이다를 마신 것처럼 시원하더라. 타인이나 부모, 자식이나 남편에게 의지하려 했던 마음을 완전히 털어내고, 내 힘으로 바로 서는 것이 진짜 해방이고 자립이라는 것을 배웠다.

     

    Q 박봉의 일용직·계약직 노동을 전전하면서도 마침내 여성노동운동에 헌신하기까지, 살아온 과정에 큰 박수를 보낸다. 문옥 님만의 노동과 삶의 철학이 있다면?

    비록 내가 매달 큰돈을 버는 건 아니지만, 사글세 걱정하며 사는 것도 아니다. 은행원 시절부터 몸에 밴 절제된 생활 습관이 있어서 헛돈을 쓰지 않으니까, 적은 수입으로도 여기까지 왔다. 그러나 가끔 생각한다. 은행 입사 동기 남자들은 퇴직하기까지 은행원인데 여직원은 왜 퇴사하게 했을까? 나는 왜 지금까지 계약직을 전전할까? 이게 바로 사회 구조적인 불평등이더라.

    그럼에도 내 손으로 정직하게 땀 흘려 일해서 두 딸을 키워낸 건 내 자부심이다. 얼마 전 알고 지내던 70대 언니가 사기를 당해 힘들게 지낸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 형편도 박봉이지만 푹푹 찌는 더운 날 시원한 음식이라도 한 그릇 사드시라고 10만 원을 송금했다. 내 가슴이 시키는 대로, 적지만 힘든 이웃에게 베풀 수 있게 마음이 넉넉해진 게 감사하고 뿌듯했다.

     

    Q 엄마로서, 딸들과의 관계도 궁금하다. 험난했던 노동과 삶을 곁에서 지켜보며 자란 두 딸에게 지금 전하고 싶은 마음은 무엇인가?

    두 딸은 내 인생의 가장 찬란한 보석이자 버팀목이다. 빚더미 속에서 이혼하고, 식당에서 공장에서 고생하는 걸 본 아이들이라선지 참 바르게 자라주었다. 한때 둘째 아이와 오해가 생기기도 했지만, 고등학교 졸업 무렵 둘이 떠난 대부도 여행을 잊을 수 없다. “엄마가 먹고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버텨온 시간을 전했을 때 아이가 엄마 고생 많이 했구나 몰랐어라며 이해해 주었다.

    아이들에겐 늘 미안함과 고마움이 교차하지만, 당당하게 일하고 불의에 맞서 노조로 싸운 엄마를 본 게 아이들에게 어떤 역경이 와도 스스로 일어서는 힘이 되리라 믿는다.

     

    Q “이혼 후 10년을 거치고서야 비로소 내 삶에 눈이 열렸다라고 했다. 여성의 삶에서 참 의미있는 말이다. 앞으로 꿈꾸는 삶과도 연결된 말로 들린다.

    결혼생활 후반 10년간 결혼의 문제를 처절히 인식했다. 이혼 후 홀로서기 10년을 버텨내며, 나를 객관적으로 보는 눈이 열렸다. 전에는 부모나 남편을 의지했고 아이들을 중심으로 살았다. ‘현모양처말고, ‘이문옥자체가 삶의 주인이 되었다. 그 누구를 의지하거나 매이지 않게 되었다. 나 자신을 더 사랑하게 되고, 세상을 보는 눈이 점점 너그러워지고 연대하게 됐다.

    큰 욕심은 없다. 적십자 봉사회(고잔1 봉사회), 안산-유기농먹거리와 건강개선지원사업 반찬도시락 참여, 노란리본 희곡산책 낭독극에 참여하며, 프롭테라피와 줌바 댄스도 한다. 몸과 마음의 건강을 챙기며 봉사하고 연대하며 살고 싶다. 내 힘으로 일해 내 삶을 책임지며, 이웃에게 손을 내밀 줄 아는 사람. 당당하고 주체적인 여성 노동자 이문옥으로 하루하루 살아갈 것이다.

     

     

    현모양처는 잊어라, 내 이름은 한부모 여성노동자
    꿀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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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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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통스런 역사, 그러나 기억해야 할 역사

    -14차 세계 일본군위안부기림일을 맞이하며-


    출처: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
     
    잊어서는 안 될 그 역사- 일본군위안부역사

    일본은 중일전쟁을 시작하던 1930년대 초부터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던 1945815일까지 식민지였던 조선과 대만, 점령지였던 중 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미얀마, 동티모르 등 여성들을 전쟁터로 끌고 가 일본 군인들의 성노예로 삼았다. 그러나 그 당시 일본군 문서에는 그 여성들을 위안부라고 표시했다. 피해여성의 수는 20여만 명을 비롯해 여러 추정치가 있으나 관련 자료가 전면 공개되지 않아 정확한 수치를 알기 어렵다. 한국인 생존 여성들의 경우 동원 당시 나이가 11세의 어린 나이에서 27세까지로 보고되어 있으며, 14~19세 때 동원된 경우가 가장 많았다. ‘위안부여성은 일본 육군성의 직접적인 지시와 정부 기관, 조선총독부, 대만총독부 등이 협력을 통해 강제 동원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UN 특별보고관은 이 문제를 명확하게 전시 중 군대 성노예제(Military sexual slavery in wartime)로 규정하였다

     

    위안부여성들은 엄격한 감시와 통제 아래 하루에 많게는 몇십 명에 이르는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고, 병사들로부터 폭력, 고문, 자살 강요 등의 학대를 받았다. 성병이나 임신, 질병 등이 확인되면 강제적인 시술이나 낙태를 받아야 했고 군인들을 통해 마약을 주사 받거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마약에 의존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출처: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
     

    위안소에 있던 여성들은 종전이 되자 자살을 강요당하거나 집단 죽임을 당하였고, 머나먼 타지에서 고국으로 생환하기 위해 갖은 어려움을 겪거나 귀환을 포기하기도 했다. 고국으로 돌아온 위안부피해 여성들은

    위안소에서 얻은 후유증으로 고통을 겪어야 했다. 대다수가 성병, 자궁 이상, 불임, 가혹행위로 인한 외상 등이 확인됐고, 대인공포증, 불안, 수치심, 자기 비하 등의 심리적 후유증도 심각했다. 한국 사회의 가부장적인 분위기 속에서 스스로 죄인으로 여기며 숨죽여 살아야 했고 그리하여 대부분 빈곤과 궁핍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출처: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
     

    이러한 일본군위안부피해 역사는 해방 후 알려지지 않았다. 1980년대에 이르러 윤정옥 이화여자대학교 교수(한국정신대대책협의회 초대 공동대표 1925 ~ )가 해방 후 돌아오지 않는 여성들에 대한 의문과 책임감으로 집념 어린 조사를 시작했고. 한국교회여성연합회와 한국여성운동 단체들이 힘을 모아 1988년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문제를 세상에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그러나 아직 세상으로 드러난 피해자가 없던 당시, 1991814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임을 최초로 공개 증언한 김학순(1924~1997)의 기자회견은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이를 계기로 개설된 정신대 신고 전화를 통해 피해 사실을 접수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위안부피해자인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 증언과 피해자 접수가 시작되었지만, 일본은 정부의 관여를 계속 부인했고, 이에 정대협과 여성계는 199218, 일본 대사관 앞에서 일곱 가지 요구사항- 전쟁범죄 인정, 진상규명, 공식사죄, 법적배상, 전범자 처벌, 역사교과서 수록 추모비와 사료관 건립을 촉구하며 첫 번째 수요시위를 시작했다. 이후 수요시위는 매주 수요일 정대협 주최로 이어져 20111214일에 1000회를 맞이하여 평화의 소녀상을 건립했고, 일본 대사관 앞에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출처: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
     

    일본군위안부역사에 대한 일본과 세계인의 반응

    이러한 일본군위안부역사는 세계인의 각성을 불러일으켰다. 전쟁 범죄에 대한 일본 정부의 태도를 규탄하고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 물꼬를 튼 것이 미국 연방의회 일본군 위안부 사죄(HR121) 결의안이다. 2007730,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일본계 미국인인 마이클 혼다(Michael Honda)의원이 제기한 일본군위안부 관련 결의안이 미 하원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그 결의안은 일본군위안부역사를 명백하게 인정하고 사죄할 것과 끔찍한 범죄 행위에 대하여 현재와 미래 세대들에게 교육해야 한다는 내용 등이 담겼다.

    이를 계기로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새로운 국면를 맞이했다. 20081030, 유엔인권이사회(UNHRC)와 유럽의회 등 각국의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이러한 성과는 피해 여성들의 적극적인 증언과 국내외 일본군 위안부 관련 단체의 헌신적인 활동, 재미 한인 사회의 노력이 함께 이룬 결과였다.

    2014UN 인권위원회의 최종 권고문은 이러한 세계의 목소리를 집약하고 있다. 이 권고문은 일본의 제6차 국가보고서를 심의한 뒤 채택한 최종 견해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에 권고한 최종 내용이기도 하다.

    일본 정부는 다음과 같은 내용에 대하여 즉각적이고 효과적인 입법 및 행정 조치를 취해야 한다.

    1. 전시 중에 일본군이위안부에 대해 저지른 모든 성노예 또는 기타 인권 침해 혐의가 효과적이고

        독립적이며 공정하게 조사되고 가해자는 기소되고 유죄 판결 시 처벌을 받도록 한다.

    2. 피해자와 그 가족에 대한 정의로운 접근과 완전한 배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3. 가능한 모든 증거들을 공개해야 한다.

    4. 적절한 참고 자료를 포함시킨 교과서로 성노예제 문제에 대하여 학생과 일반 대중의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

    5. 당사국의 책임에 대하여 공식 인정하고 공개 사과가 이뤄져야 한다.

    6. 위안부 역사를 부정하거나 피해자의 명예를 훼손하는 행위는 비난받아야 한다.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반응

    유엔과 양심적인 세계인의 반응과 달리 일본 정부가 내민 것은 1965년에 체결된 -일 청구권 협정이었다. 일본은 이 협정을 근거로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법적인 배상 문제는 이미 종결된 사안이라며 '도의적인 수준의 책임'으로 대응해왔다. 일본의 최고 재판소는 1990년대 제기된 위안부 피해자, 징용자 소송에서 "한국이 식민지 조선을 대표하여 최종적으로 청구권을 소멸시켰으므로 더 이상 청구권은 없다"며 패소 결정을 내렸다.

    이후 한국과 세계의 여론에 밀려 1992,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의 과오 인정과 사과 발언이 있었고, 이어 1993년에는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 담화와 1995, 무라야마 총리 담화를 통해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하는 공식 발언이 나왔다.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에 관해서 옛 일본군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관여했다'고 밝혀 위안부 문제의 책임이 군에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19957, 무라야마 도미이치 내각은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국민기금(아시아여성기금)'을 설립했다. 기금은 한국 피해자에게 '쓰고 나이킨(償い金, 속죄금, 당시 언론은 위로금으로 해석)' 명목으로 지원했고, 국민 모금 방식으로 기금을 조성함으로 피해 여성들이 요구했던 정부의 사죄와 법적 배상 책임을 회피하려는 꼼수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한 태도가 고스란히 드러난 게 바로 2015 한일 위안부 협상’(이하 2015 한일 합의)이다. 박근혜 정부와 아베 신조 일본 정부가 20151228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의 해결 방안에 합의하고 '최종적·불가역적 해결'을 선언했으나, '굴욕 협상'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2017년 문재인 정부의 일본군 위안부 TF’의 보고서는 이 합의의 문제점을 공식 확인했다. 국가 간 협약이기에 파기는 못하지만, 문제가 많은 굴욕적인 외교 협상이었다는 게 중론이었다. ..일 간의 안보 협력 강화를 위해 한일 간의 걸림돌이 되었던 일본군위안부문제를 졸속으로 처리한 외교 참사였다는 것이다. UN 인권위원회의 지적대로 무엇보다 협상 당사자인 위안부 피해자들의 의견이 배제된 채 이뤄졌다는 점, 그리고 평화의 소녀상 처리에 대한 이면합의가 존재한다는 점은 인권문제를 다루는 기본자세가 결여된 외교참사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했다.

     

    이처럼 일본 정부는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하여 사실상 진정성 있는 사죄나 배상을 한 적이 없다. 겉으로는 외교적인 수사로 일관하며 뒤로는 평화의 소녀상이 건립되는 것을 방해하고, 학생들에게는 위안부 역사에 대해서는 전혀 가르치지 않고 있으며 국내외 극우 세력을 통해 역사를 왜곡하고, 피해자를 능욕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국회에서는 2026212, ‘일본군위안부피해자 보호법개정안을 통과시킴으로서 위안부 피해 여성을 모욕하는 경우 처벌할 근거를 마련하였다.

     

    계속해서 기억하고 언급해야 할 이 역사

    명백한 증인과 증언, 증거가 존재하는 일본군위안부역사를 대하는 일본 정부와 대비되는 국가가 있다. 바로 일본과 같은 2차세계대전 전범국인 독일이다.

     

    2차세계대전 당시 유럽 전역에서 행해진 유대인 학살은 인류의 근현대사 가운데 가장 비극적인 역사 중 하나다. 그 비극적인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모아 그 유대인 학살이 집중적으로 이뤄진 폴란드 바르샤바에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재단(Auschwitz-Birkenau Foundation)2009년에 설립하였다. 이 재단은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강제수용소 유적의 보존과 관리 기금 조성을 맡고 있으며 수많은 유물·문서의 보존, 복원, 목록화하여, 고통스러운 기억을 미래 세대에 전하는 그것을 핵심 사명으로 삼고 있다. 2019126, 재단 설립 10주년을 맞이하는 자리에서 안젤라 메르켈 총리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이 역사는 (계속)언급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현재와 미래에 모든 개인의 존엄을 지켜낼 수 있으며, 그것이 그 희생자들에 대한 기억을 명예롭게 하는 것입니다.”

     

    독일의 총리는 아우슈비츠를 방문할 때마다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또한 독일의 수도 베를린 한복판(브란덴부르크 문 남쪽)에 크기가 다른 2,711개의 격자형 콘크리트를 세운 유대인 학살 추모 공원이 약 19,073(5,750)의 광대한 면적에 조성되어, 전 세계인들이 방문하는 추모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나치 정권의 전쟁과 유대인학살에 대한 역사교육은 독일에서 의무화되어 있다. 다시는 그런 역사가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는 의지를 전 세계인에게 밝힌 셈이다.


    베를린 브란텐부르크 근처에 조성된 유대인 학살 추모공원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일 년 내내 전 세계에서 몰려든 추모객들로 붐비는 곳이다. 그곳에는 수용되었던 이들의 신발과 가방, 그리고 머리카락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어 당시의 참상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반지하실로 조성된 가스실과 화장장 화로를 보고 있으면 모두가 숙연해진다. 전쟁이 인간의 양심과 지성을 어디까지 파괴하는지 똑똑히 보여주는 역사적인 현장이다.

    그 수용소 현장 벽면에 걸려있던 스페인 태생 미국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George Santayana, 1863~1952)의 글귀가 많은 방문객의 시선을 머물게 한다.


    출처: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
     

    역사를 기억하지 않는 자들은 그것을 다시 겪게 될 것이다.”

    일본군위안부역사가 고통스러운 역사지만 잊지 말고 계속해서 말하고 기억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그 기억의 시도는 1991814일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 이후 일본대사관 앞 정기 수요집회로 시작되었다. 수요집회 1000번째 맞이하는 시점인 20111214, 일본대사관 앞에 위안부 여성을 상징하는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졌다. 조형물의 제작과 건립의 모든 과정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뤄졌다. 이후 평화의 소녀상(평화비)는 다양한 형태와 이름으로 국내외에 확산되어, 20267월 현재, 국내 155, 일본과 미국, 중국, 호주, 독일 등 10개국 35곳에 세워져 있다. 이제 평화의 소녀상은 전쟁 중에 당한 성노예제 피해 여성들의 고통을 기억하고 정의로운 해결과 전쟁 없는 세상을 염원하는 평화의 상징이 된 것이다.

     

    기억 문화는 기록문화와 함께 인류의 양심을 일깨우고 보편적인 가치와 원리를 추구함으로 인간 내면에 자리한 야만성을 극복하는 데 기여하는 인류 문화의 두 축이다. 기억은 과거의 경험을 저장하고 되살리는 행위다. 현재의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문화적 맥락에 의해서 과거는 기억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재해석됨으로 역사의 진보를 이루는데 기여한다. 기억 문화로서 평화의 소녀상은 과거 고통스러운 역사를 기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전쟁 없는 평화 세상을 염원하는 인류의 소망을 담아내면서 세계적인 평화의 아이콘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14차 세계 일본군위안부기림일

    매년 814일은 세계 일본군 위안부기림일로 지킨다. 이날은 1991814, 고 김학순 할머니가 일본군 성노예 피해 사실을 처음 공개 증언한 날을 기려 정해졌다. 이후 2012년 타이완에서 열린 제11차 일본군 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에서 매년 814일을 세계 기림일로 정했고, 한국에서는 2017년 법 개정을 거쳐 2018년부터 국가기념일로 정해졌다.

     

    이날은 단순한 추모일이 아니다. 피해자의 용기와 증언을 기억하고 일본군 성노예제의 진실 규명, 사죄, 배상, 역사 교육을 촉구하는 날이다. 전시 성폭력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사회가 책임 있게 배우고 행동하자는 의미에서 우리가 기억하고 지켜야 할 기념일이다.

     

    14차 세계 일본군위안부기림일 총주제는 그들의 굳센 바람, 우리의 힘찬 바람이 만나로 정해졌다. 기억은 말에서 멈추지 않아야 한다. 기억은 책임으로 이어져야 하고, 책임은 교육과 연대로 이어져야 한다.

    피해자들의 명예와 존엄이 온전히 회복되지 않은 현실에서, 기림의 날은 아직 끝나지 않은 역사 앞에 서서 정의와 화해의 길을 묻는 날이 되어야 한다. 특히 다음 세대에게 이 역사를 정확히 전하는 일은, 과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시민의 책무이기도 하다.


    2026년 제14차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 홍보 웹자보 (출처: 수원평화나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8.14)
    수원평화나비 상임대표 이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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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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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에너지의 날, 불을 끄는 행위를 넘어 삶의 양식을 묻다

     

    매년 822일은 에너지의 날입니다. 9시가 되면 전국 곳곳의 공공기관과 아파트 단지, 상가 건물에서 10분간 불을 끄는 일괄 소등 행사가 진행되고, 시민들의 자발적인 절전 캠페인이 다채롭게 펼쳐집니다. 어둠 속에서 잠시 꺼진 전등을 바라보며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전기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곤 합니다.

     

    하지만 이제 에너지의 날은 단순한 절전 캠페인을 넘어서야 합니다.

    예측 범주를 완전히 벗어난 빈번한 이상기후는 이미 우리 삶의 안전과 생존 기반을 흔들고 있습니다. 기존의 에너지 시스템은 어디서, 누구에 의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가. 그리고 다음 세대를 위해 우리는 과연 어떤 에너지 시스템과 지역사회의 미래를 선택할 것인가. 이 엄중한 질문들 앞에 시민과 지역사회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깊이 성찰하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탄소 중립 실천과 재생에너지로의 과감한 전환은 지금 당장 해결해야만 하는 최우선 과제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사회는 에너지 전환을 이라는 국가적·문명사적 과제에 대해 지극히 단편적인 기술이나 산업 발전의 문제로만 바라보는 시각에 갇혀 있습니다. 저는 경기 북부의 중심도시 의정부에서 주민들의 뜻을 모아 재생에너지 협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우리 사회를 향해 다른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과연 에너지 전환이라는 거대한 사회적 변화가, 정교한 기술과 막대한 자본만으로 완성될 수 있을까요?”

    저는 지역사회 현장에서 이웃들과 눈을 맞추는 과정에서 한 가지 단단한 확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에너지 전환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지역, 그리고 사람과 자원 사이의 관계의 변화라는 사실입니다. 누가 에너지를 생산하는 주체인가, 중요한 의사결정 구조에 시민이 직접 참여하고 있는가, 에너지를 통해 창출되는 경제적·사회적 이익을 누구와 어떻게 나누는가, 그리고 그 추진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지역 내 갈등을 우리는 어떤 민주적 방식으로 풀어나갈 것인가. 이 근본적인 질문들에 대해 우리 사회가 어떤 답을 하는가에 따라 참된 의미의 에너지 전환이 성공할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토건 사업의 변종으로 전락할 것인가를 결정짓는 핵심 열쇠입니다.


    도시발전개념도 (출처: 과학기술정보통신부 2018)

     

    2. 수동적 소비자에서 주도적으로 생산과 소비를 책임지는 '에너지 시민'으로

     

    우리가 경험해 온 기존의 에너지 시스템은 대단히 중앙집중적이고 일방적이었습니다. 거대한 석탄화력발전소나 원자력발전소가 바닷가나 외곽 지역에 들어서고, 거기서 만들어진 전기는 거대한 송전탑을 거쳐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대도시로 전달되었습니다. 도시의 시민들은 그저 전력 공기업이 정해놓은 요금을 다달이 내며 전기를 관성적으로 소비하는 소비자의 위치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지만 재생에너지는 기존 중앙집중형 에너지 시스템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뒤흔듭니다. 햇빛과 바람, 지열은 특정 대기업이나 전력 독점 기업만의 소유물이 아닌 인류 공통의 자산(Commons)’입니다. 이제 발전소는 바닷가의 거대한 부지에만 들어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날마다 걸어 다니는 동네의 지역 구석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수많은 유휴공간이 깨끗하고 안전한 친환경 발전소로 재탄생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지역으로 권한과 역할이 분산되는 분산형 에너지 시스템속에서, 주민은 더 전기를 사서 쓰기만 하는 수동적인 소비자에 머물지 않습니다.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출자금을 모아 협동조합의 주주로 참여합니다. 발전소 용지를 함께 발굴하고, 조합원 총회를 통해 민주적으로 운영 방침을 결정하며, 생산된 전력에서 발생하는 사회적·경제적 가치를 지역사회 및 이웃과 정당하게 나누는 에너지 시민으로 당당히 거듭나게 됩니다.

     

    제가 있는 의정부 자연에너지협동조합 역시 이러한 시민주도형 에너지 민주주의 철학에서 출발했습니다. ‘시민 햇빛발전소는 단순히 전기를 만들어 팔아 수익을 올리는 상업 시설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민들이 스스로 자기 지역의 에너지 생산 주체가 되고, 공공의 의사결정과 정책 수립에 주체적으로 참여하며, 우리가 살아가는 지역의 미래 모습을 스스로 결정해 나가는 생활 속 풀뿌리 민주주의의 현장이자 기후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적극적인 실천공간입니다.

    협동조합의 가장 소중하고 커다란 자산은 설비의 발전용량(kW)’이나 계좌의 잔액이 아니라 바로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조합원 한 사람 한 사람이 기후위기 앞에서 능동적으로 문제 해결에 나서는 시민으로 성장해 나가는 그 모든 과정이야말로, 우리가 지역에서 이뤄낸 가장 값진 에너지 전환의 결실입니다.

     

    3. 갈등은 사업의 실패가 아니라 민주주의가 숙성되는 과정이다

     

    지역에서 재생에너지 사업이나 태양광 발전소 이야기를 꺼내면, 많은 사람이 가장 먼저 주민 갈등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곤 합니다. 일부 언론이나 개발업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보며 주민들의 이기주의나 재생에너지 자체의 한계 때문이라고 쉽게 치부합니다. 하지만 주민들이 반대하는 것은 재생에너지나 친환경 발전소 그 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반대하는 것은 자신들이 철저히 '배제되고 소외된다는 사실입니다.

     

    사업 계획은 이미 외지 개발업자와 자본에 의해 비밀리에 수립되고, 법적 요건을 채우기 위해 개최되는 주민설명회는 형식적인 통과의례에 불과하며, 막상 발전소가 들어서서 발생하는 경제적 수익은 모조리 외부 자본가들이 독식하고 지역에는 어떠한 혜택도 돌아오지 않는 구조라면, 그 어떤 지역의 주민이라도 분노하고 저항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재생에너지의 문제가 아니라, 사업 추진 방식이 가진 불통과 독점의 문제입니다.

     

    반대로 사업의 첫 기획 단계부터 지역 주민들이 직접 참여하고, 투명한 정보가 공유되며, 생산된 전력 수익이 지역의 사회복지 기금이나 마을 공동체 발전 기금으로 환원되는 구조를 만든다면 현장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물론 주민이 주도하는 협동조합 방식은 수월하지 않습니다. 조합원 모임과 주민 간담회를 수없이 개최해야 하고,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다양한 의견을 조정하기 위해 밤늦도록 토론을 벌여야 합니다. 효율성을 따지면 느리고 답답한 과정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오랜 대화와 진통, 타협을 거쳐 도출된 사회적 합의는 그 어떠한 오해나 외풍에도 흔들리지 않는 튼튼한 뿌리를 갖게 됩니다. 협동조합은 바로 이러한 선한 비효율성의 가치를 존중하며, 속도보다 민주적 절차를 최우선으로 삼는 조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에너지 전환은 기후위기 극복을 넘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수준을 한 단계 더 끌어올리는 귀중한 공동체 학습의 과정입니다.

     

    4. 경기 북부에서 협동조합과 공익활동이 지니는 특별한 역사적 의미

     

    경기 북부 지역은 오랫동안 수도권이라는 틀 안에 묶여 있으면서도 정작 수도권이 누리는 개발과 성장의 혜택에서는 소외됐습니다. 각종 중첩 규제는 산업 기반을 약화하고 지역경제의 오랜 정체로 이어졌습니다. 국가 안보를 위해 경기 북부 주민들이 오랜 세월 희생을 감내해 온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경기 북부의 구조적 조건과 한계가, 기후위기 시대에는 오히려 가장 혁신적인 전환의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재생에너지 전환은 개발이 제한된 경기 북부의 자연환경과 공공 유휴부지들을 가치 있는 공공 자산으로 재평가할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경기에너지협동조합을 포함한 각 시군의 에너지협동조합에서는 관 내외의 공공시설 옥상, 공공기관 주차장과 지붕, 도로변 유휴부지 등을 발굴하여 시민 햇빛발전소를 지속해서 건립해 왔으며 새로운 햇빛 부지를 발굴하기 위한 다각도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경기 북부에서의 에너지 전환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기준은 바로 발전 시설의 소유권과 이익이 어디로 흘러가는가입니다. 지역 주민과 시민들이 협동조합을 통해 직접 출자하고 함께 소유하며, 발전소 운영을 통해 발생하는 수익이 다시 지역사회 내부로 흘러 들어가는 지역순환경제(Local Circular Economy) 모델을 구축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제가 몸담은 의정부 자연에너지협동조합도 시민 햇빛발전소를 통해 얻은 이익의 일정 부분을 지역의 에너지 취약계층을 위한 에너지 복지 사업에 먼저 재투입하고 있으며 찾아가는 환경 교육과 탄소 중립 생활 실천 캠페인을 벌이고 있습니다.

     

    5. 에너지가 사람을 잇고, 사람이 마침내 공동체를 회복하다.

     

    전기는 오직 기술적인 발전기에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따뜻한 공익적 연대 속에서 비로소 지속할 수 있는 생명의 에너지로 완성됩니다. 협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저에게 가장 깊은 감동을 주었던 순간은, ‘이웃들과 조합원들의 삶이 눈에 띄게 변화하는 모습을 목격할 때였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우리 집 전기요금을 조금이나마 절감해 볼까?" 하는 지극히 소박한 관심이나, 이웃의 권유로 소액 출자금만 내고 이름을 올렸던 평범한 조합원이었습니다. 그러나 기후위기 교육을 듣고, 햇빛발전소 현장 탐방에 참여하면서 이분들의 삶에 놀라운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여러 체험과 활동을 통해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깨달은 조합원이 공부를 거쳐 직접 단상에 서는 기후위기 전문 시민 강사로 변신하고 열정적인 지역 공익활동가로 성장하는 모습을 수없이 보았습니다.

     

    지역의 햇빛과 바람으로 지역에서 깨끗한 전기를 직접 만들고, 그 전기를 지역의 가정과 기업이 소비하며, 거기서 발생하는 수익이 다시 우리 동네 이웃들의 복지와 아이들의 교육 환경 개선으로 환원되는 선순환 구조. 이러한 선순환은 단순한 경제적 이득을 넘어, 이웃 간의 무관심을 깨뜨리고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를 회복시켜 줍니다. 에너지 자립은 결국 우리 지역의 자립이자, 스스로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시민 자립의 완성입니다.

     

    7월 9일 조합원 만남의 날(출처: 의정부자연에너지 협동조합)

     

    6. 기술보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사람이며, 관계가 미래를 만든다.

     

    지금 전 세계는 기후위기 극복과 탄소 중립이라는 명제 아래 그 어느 때보다 가파른 속도로 에너지 전환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계 각국에서 성공적인 전환을 이루어 낸 지역들을 살펴보면 한 가지 공통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곳에는 첨단 기술이나 설비보다 먼저 주민이 존재했고, 거대한 발전소나 인프라보다 먼저 사람 간의 신뢰가 쌓여 있었으며, 차가운 자본보다 먼저 이웃을 살피는 따뜻한 공동체가 굳건히 자리 잡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 정말로 필요한 것은 태양광 패널의 숫자를 몇 개 더 늘리는 것만이 아닙니다. 기후위기 문제를 나와 내 아이들의 절박한 삶의 문제로 깊이 인지하는 더 많은 에너지 시민,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함께 이루어 내는 더 깊은 협동의 경험, 그리고 내가 사는 지역을 스스로 바꾸어 나가는 주체적인 공익적 활동입니다.

     

    에너지 전환은 생존을 위한 전략이자, 우리 지역사회의 민주주의를 풀뿌리에서부터 확장하고 숙성시켜 나가는 거대한 과정입니다. 협동조합은 그 민주주의와 공익적 가치를 우리의 삶터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상적으로 실천할 수 있도록 돕는 가장 따뜻하고 단단한 그릇입니다. 한 사람의 시민이 협동조합의 조합원으로 동참하고, 한 장의 태양광 모듈이 지역의 소중한 공공 자산이 되며, 그 작은 협동의 경험들이 촘촘히 모일 때 기후위기를 극복하는 당당한 거대한 동력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에너지 전환의 진정한 출발점은 차가운 기술이 아닌 따뜻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을 성숙하게 이어주는 관계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고 우리의 아이들이 살아갈 지역의 미래는 조금씩, 그러나 분명하고 단단하게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해 갈 것입니다.

    에너지 전환은 기술이 아니라 관계의 변화다
    의정부 자연에너지협동조합 이사장 최 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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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8-05
  • ※「공익웹진」은 시민 기록 활성화를 위해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가 발행하는 참여형 아카이브입니다. 경기도 공익활동 현장의 다양한 시선과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콘텐츠의 내용은 경기도민 에디터가 직접 취재·작성한 것으로, 일부 의견은 기관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부천청소년인권공동체 세움 활동가 이계은 님을 만났다.

    이계은 활동가는 대학생 시절 학보사에서 글을 썼다. 어느 날, 시민단체인 부천연대 활동가가 찾아왔다. 청소년 언론학교를 준비하는데 이 활동가가 대학 신문기자로서 자원봉사자로 참여해주길 요청했다. 비청소년인 이계은 활동가 삶에서 청소년을 만날 첫 계기였다. 이계은 활동가는 ‘포로리’라는 별명으로 청소년을 만났다. 포로리는 청소년을 만나며 자신의 꿀꿀했던 청소년 시절을 회고하기 시작했다.

     
      / 2017년 세움 창립 기념식 ⓒ에디터 연두

     

    포로리는 ‘부천청소년IT기자단 놀토’에서 활동을 시작하여, 청소년들과 함께 ‘부천시청소년인권공동체 세움’을 창립했다.

    포로리는 청소년 시절, 삶은 불안정했고 그 불안을 해석할 자기 언어가 없었다. 학교 교사나, 부모, 사회가 규정하는 청소년의 모습만 둥둥 떠다녔다. 그건 지금 청소년들도 비슷하다. 그래서 부천시청소년인권공동체 세움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자기 언어를 갖는 것’이다. 이를 위해 비청소년이 먼저 청소년 이야기를 듣는다. “원래 그래”, “그럴 때야, 괜찮아”라며 이야기를 허투루 넘기지 않고 귀하게 듣는다. 청소년은 말하고 또 말하면서 자기 삶을 자기 언어로 해석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자기 언어를 가진 세움 청소년들과 비청소년들은 작년에 영화 상영회를 열었다. 11월 3일 학생의날을 기념하며 부천노동영화제에서 한 꼭지로 ‘3학년 2학기’를 상영했다. 상영 후에는 세움 청소년들이 자기 삶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토크 행사를 진행했다. 포로리는 “청소년은 주인공이 되기 위해 거쳐 가는 시기로 여겨지지만, 토크 행사에서는 그들이 주인공이었고 그들의 삶을 그들의 언어로 타인에게 들려주는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 2025년 노동영화제 주관 ⓒ에디터 연두

     

    행사를 진행하기 위해선 여러 사람의 노력이 들어간다. 행사를 알리고 장소를 섭외하고 음향과 각종 기기를 만진다. 그런 노력은 보통 유명하거나 지위가 있는 사람에게 쏠리기 마련이다. 이 행사는 달랐다. 유명하지 않은, 입시를 준비하거나 저마다의 방식으로 삶을 준비해 가는 청소년들이 무대 주인공이 되어 발언권과 관객의 집중을 독점했다. 그것은 관객으로 온 청소년과 비청소년, 그리고 무대에 서 있는 청소년에게 색다른 경험이었다. 기존 사회가 청소년에게 부여하는 위치성에 어긋나는 것이었고, 변화의 씨앗이었다.

    세움에 회원이 늘 북적북적했던 것만은 아니다. 7년 전에는 입시제도의 변화, 코로나19 등으로 인해 점점 모이지 않게 되었다. 입시제도의 변화 측면에서는 학교 밖에서 하는 활동(자원봉사 등)이 입시에 쓸모없는 방향으로 바뀌면서 청소년들은 세움을 찾아오지 않았고 양육자 또한 내 자녀가 입시에 도움이 안 되는 세움에 가지 않기를 바라게 되었다. 새로운 회원들이 등장하지 않았고, 기존 회원들이 학교를 졸업하면서 분위기는 어두워졌다. 포로리는 청소년이 다양한 경험을 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입시제도에서 그런 다양성이 보장될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했다.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가 해제된 후, 세움은 밥 모임을 시작했다. 청소년과 만나는 공간을 마련하는 게 우선이었다. 밥을 짓고 먹으면서 포로리는 생각했다. 청소년이 자기 힘을 가지려면 사회와 어른으로부터 어떤 정성과 힘을 받아야 하는데, 밥을 주는 것도, 그런 에너지를 주는 방법이다. 그래서 포로리는 더 열심히 밥을 차려 함께 먹었다. 지금은 밥을 같이 차려 먹지 않는다고 한다. 다른 공동체 활동하느라 시간이 없어서, 밥은 주문해서 먹는다. 지금 세움은 카메라로 소통하는 사진 모임을 하고 있고, 글로 소통하는 언론학교를 시작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포로리와 함께 걸어온 ‘부천청소년인권공동체 세움’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세움을 지켜온 포로리는 이계은이라는 사람의 일부일 뿐이다. 활동가라는 타이틀 하나로 다 정의할 수 없을 만큼, 이계은 님은 삶의 여러 자리에서 자신만의 언어를 깊이 있게 쌓아왔다.

    이계은 님은 본인을 ‘책을 출간했으며 육아를 전담하는 불안정 노동자이자 활자 중독자’로 소개한다. 두 아이를 키우고, 노동인권 강사이며, 자기 언어로 난임 경험을 써 내려간 사람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이계은 님은 노동인권을 청소년에게 가르친다. 청소년이 듣고 싶은 수업을 하기 위해 청소년의 언어를 공부하고, 청소년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을 고민한다. 청소년 대상으로 강의한다는 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자신이 잘 소통하고 싶은 청소년과 교육 현장에서도 계속 만날 수 있기에 덕업일치인 셈이다.

     
      / 노동인권 교육 현장 ⓒ에디터 연두

     

    또한, 난임을 당사자의 언어이자 페미니즘 시각으로 바라보는 에세이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를 출간했다. 이계은 님에게 난임은 삶에서 몸도 마음도 고된 시간이었다. 임신 성공 수기 말고는 난임 당사자의 서러움이나 고통에 관해 참고할 텍스트는 너무 적어서 더 외로웠다. 그 어려움을 풀기 위해 익명성을 두고 블로그에 글을 적기 시작했다. 아이를 출산했지만, 난임 시기에 본인 스스로에게 물었던 질문들과 대답, 이런저런 고민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공적인 목소리로 표현하고 싶었다. 난임 시절에 외로웠던 나를 생각하며, 다른 사람에게 위로가 되고 싶었다.

    활동가이자 양육자이고, 작가이자 강사라는 여러 역할을 소화하는 건 쉽지만은 않다. 그러나 도움이 될 때도 있다. 이계은 님은 그것을 ‘숨구멍이자 변명거리’라고 표현했다. 양육자로서 자기 욕구와 아이들의 필요가 갈등하고 협상하며 큰 중압감을 느낄 때, 작가 이계은으로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숨구멍을 가진다. 활동가로서 자기 자신에게 기대하는 성취나 성과를 이룰 수 없을 거라는 꿀꿀한 기분이 들 때면 두 아이의 양육자 이계은이 변명거리가 되어준다.

     
      / 2024년 출간기념북토크, 첫째 아이가 이계은 작가에게 꽃다발을 전달하는 모습 ⓒ에디터 연두

     

    이계은 님은 여러 역할로 벅찰 때 ‘내가 활동가이자 양육자로서 살아가지 않는다면, 과연 내가 쓸 자기 언어가 있었을까?’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서로 시간을 내어달라며 역할끼리 충돌하지만, 그 역할들이 서로 보완과 성장의 기제로 작동한다. 더 나아가 작가 혹은 읽는 사람으로서 부족한 시간임에도 이렇게 치열하게 살고 있으니까 더 읽고 싶고 더 쓰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고 말했다.

    그는 다층적인 정체성을 가지고서 자기 삶을 글로 표현하는 사람들의 글을 더 찾아서 읽고 싶다고도 덧붙였다. 직장인이면서 작가였던 조지 오웰, 아이 다섯을 키우면서 글을 쓴 박완서의 글처럼 말이다. 이계은 님 또한, 활동가로서 여러 모습의 맥락을 가지고 조율하면서 협상하면서 자신을 완성하고 있는 과정일 것이다.

    이계은 님에게 앞으로의 꿈에 대해 질문했다. ‘저와 같은 고민을 하는 동지를 만나고 싶다. 좋은 관계를 만난다면 뭐든 활동할 수 있을 것 같다’라는 활동가로서 대답이 먼저 나왔다. 그리고 곧, 지금 하는 것들을 잘 해내고 싶다는 말이 뒤따랐다. 갈등하면서도, 숨구멍이 되고, 성장을 촉구하는 역할들, 그 자체가 이계은 님의 자기 언어였다.

    이계은 님은 여러 정체성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협상하며 자신만의 언어를 쌓아가고 있었다. 단 하나의 직함이나 역할로 정의되지 않는 삶, 그 어지럽고도 치열한 과정 자체가 자기 언어를 만드는 여정임을 깨닫는다.

     

    삶의 수많은 역할 속에서 오늘도 스스로의 언어를 찾기 위해 애쓰는 모든 이들에게,
    이계은 님의 이야기가 작은 숨구멍이자 따뜻한 응원이 되길 바란다.

     

    밥을 짓고 글을 쓰며 자기 언어를 엮어가는 청소년 인권 활동가를 만나다
    연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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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7-30
  • ※「공익웹진」은 시민 기록 활성화를 위해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가 발행하는 참여형 아카이브입니다. 경기도 공익활동 현장의 다양한 시선과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콘텐츠의 내용은 경기도민 에디터가 직접 취재·작성한 것으로, 일부 의견은 기관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네트워크로 그리는 환경교육, 시흥YMCA에게 길을 묻다

     / ⓒ에디터 해지

     

    기후위기라는 말이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시대다.

    뉴스에서도, 학교에서도, 동네 게시판에서도 흔하게 마주친다. 그러나 위기를 이야기만 하는 것과, 그 위기에 대응할 교육 체계를 갖추는 것은 전혀 다른 층위의 문제다. 한 사람의 목소리로는 만들 수 없고, 결국은 여러 단체가 손을 맞잡아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경기도 안에서 이 물음에 가장 구체적으로 답하고 있는 지역 중 하나가 시흥시다. 시흥시는 환경부 지정 환경교육도시이며, 관내 여러 환경단체와 중간지원조직들이 힘을 모아 시흥 환경교육플랫폼이라는 협력체계를 함께 꾸려가고 있다.

    시흥시는 2023년 환경부로부터 법정 환경교육도시로 지정된 지방자치단체 가운데 하나다. 환경교육도시는 환경교육 추진 기반과 성과, 앞으로의 계획이 우수한 지자체를 환경부가 선정해 지원하는 제도로, 지정 이후 시흥시는 환경교육 전담 조직을 꾸리고 지역 환경교육 종합계획을 세우는 등 기반을 차근차근 다져왔다. 시흥환경교육플랫폼 역시 이런 흐름 속에서 태어난 결과물 중 하나다.

     / ⓒ에디터 해지

     
    그 협력의 한 축에는 30년 가까이 지역 청소년활동을 이어오다, 환경과 인권, 공익활동 지원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온 시흥YMCA가 있다. 취재를 위해 시흥YMCA 사무국을 찾았다. 오래된 단체 특유의 차분한 공기가 흐르는 사무실에서, 서종호 사무총장을 만나 환경교육플랫폼이 만들어진 과정과 그 안에서 시흥YMCA가 서 있는 자리에 대해 들어보았다. 인터뷰는 예상보다 솔직했다. 성과를 앞세우기보다, 지금 이 네트워크가 가진 한계와 고민까지도 가감 없이 꺼내놓는 자리였다. 미리 준비된 답변보다는, 질문을 받고 그 자리에서 곱씹어 나온 말들이 더 많았다. 그렇기에 지금 진행형인 이야기들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담아보려 했다.
     / ⓒ에디터 해지

     

     

    1. 시작 : 사라진 네트워크의 빈자리에서 시작된 논의

    시흥시에는 원래도 환경교육과 관련한 네트워크가 존재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시점엔가 그 네트워크는 활동을 멈추었고, 시흥의 환경교육은 한동안 구심점 없이 각 단체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흩어져 이어가는 모양새였다. 상황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건 시흥시가 환경부 지정 환경교육도시로 선정되면서부터다. 관내에 있는 여러 환경단체와 중간조직들 사이에서 "이제는 통일된 환경교육을 함께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오가기 시작했고, 그 논의는 지난해 실제 발족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물이 지금의 환경교육플랫폼이다.

     / ⓒ에디터 해지

     

    2. 다시 나아가기 위해 연대하다.

    환경교육은 흔히 한 기관, 한 프로그램의 몫으로 여겨지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는 지역 안의 여러 주체가 자원과 정보를 나누지 않으면 오래 지속되기 어려운 영역이기도 하다. 한 단체가 아무리 열심히 프로그램을 만들어도, 그 단체가 힘이 빠지는 순간 지역의 환경교육 전체가 함께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시흥이 겪었던 '네트워크의 공백'은 바로 이런 취약함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했다.

    "단체가 필요했다. 공동으로 대처할 곳이 필요했다." 서종호 사무총장이 이 지점을 짚으며 꺼낸 말이다. 개별 단체가 각자의 자리에서 환경교육을 이어가는 것과, 여러 단체가 하나의 창구를 통해 목소리를 모으는 것은 확연히 다른 무게를 가진다. 흩어져 있던 목소리들이 하나의 이름 아래 모이면, 행정을 상대할 때도, 사업을 기획할 때도 훨씬 단단한 근거를 갖게 된다. 사무총장 말에 따르면 경기도 안에서도 이런 형태의 환경 교육 협력체는 흔치 않다고 한다. 그만큼 시흥의 시도는 의미 있는 실험이기도 하다.

     / ⓒ에디터 해지
     
     

    3. 시흥YMCA의 동행

    여기서 한 가지,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지점이 있다. 환경교육플랫폼은 시흥YMCA가 만든 사업이 아니라는 점이다. 플랫폼의 중심에는 시흥에코센터가 있고, 시흥환경교육네트워크가 간사단체로서 실무를 지원하는 구조다. 시흥YMCA는 이 컨소시엄에 참여하는 여러 단체 가운데 하나이며, 주도적인 위치에 있지는 않다.

     / ⓒ에디터 해지
     

    사무총장은 인터뷰 내내 이 부분을 몇 번이고 다시 짚었다. "우리가 만든 게 아니라서, 이건 꼭 참고해달라"는 당부가 유독 또렷하게 남았다. 여러 단체의 몫으로 돌려놓으려는 태도였다. 환경교육 플랫폼이라는 하나의 이름 아래, 여러 단체가 각자의 역할을 나누어 맡으며 함께 걸어가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시흥YMCA는 그 여정에서 성실한 동행자의 자리를 택하고 있었다.

     / ⓒ에디터 해지

     

    4. 거버넌스 구축: 협력 구조로 단단해지는 환경교육

     네트워크에 참여하는 단체는 생각보다 많다. 규모가 크지 않은 단체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활동하다 보니, 서로의 활동을 확인하고 공유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과제였다. 최근에는 시흥시 차원의 기후 관련 행사를 여러 단체가 함께 시도했고, 올해부터는 이를 공동으로 진행하고 있다. 환경기금의 지원을 받아 홍보를 진행한 환경교육주간에는, 6월 초를 기점으로 열 개 단체가 각자의 장소에서 체험 활동을 열었다. 한 곳에 모여 큰 규모의 통합 행사를 만드는 단계라기보다, 각 단체가 자기 자리에서 준비한 활동을 열고 서로의 소식을 공유하는 정도라고 사무총장은 담담히 말했다.

     / ⓒ에디터 해지
     

    의미 있는 지점은 또 있다.

    시흥에코센터는 수도권에서 유일하게 환경교육사 2급 양성기관으로 지정된 곳이다. 이 인터뷰가 이뤄질 당시만 해도 전국에서 이런 인증을 받은 곳은 천안과 시흥, 단 두 곳뿐이었다. 이후 2026년부터는 경남환경재단이 새롭게 지정되며 세 곳으로 늘었지만, 수도권 안에서는 여전히 시흥이 유일하다. 시흥에코센터를 중심으로 이 네트워크가 발족한 배경에는 이런 전문성의 축적도 자리하고 있다. 단순히 여러 단체가 모였다는 것을 넘어, 실제로 환경교육 인력을 길러내는 인증 체계까지 지역 안에 갖추고 있다는 뜻이다. 그동안 각 단체가 개별적으로 따내던 공모사업들도, 이제는 네트워크 차원에서 모아 지원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사업 하나하나를 개별 단체가 따로 준비하고 보고하던 방식에서, 네트워크가 창구가 되어 자원을 나누는 방식으로 옮겨가는 것은 단순한 행정 절차의 변화가 아니다. 단체 간의 신뢰가 쌓여야 가능한 일이고, 동시에 그 신뢰를 다시 단단하게 만드는 과정이기도 하다. 올해부터는 현장에서 거버넌스 형태를 갖추기 위한 준비를 여러 단체가 함께 진행하고 있는 중이다. 방향이 뚜렷하게 그려져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 ⓒ에디터 해지
     

    5. 동마다 마을학교가 있는 도시

    네트워크 활동이 실제 시민의 삶에는 어떤 변화를 만들고 있을까. 사무총장은 조심스럽게 답했다. "단체 규모가 크면 눈에 띄는 성과가 나오겠지만" 하고 운을 뗀 뒤, 시흥의 사례로 와글학교와 댓골마을학교를 꺼냈다. 댓골마을학교에서는 우유팩이나 폐건전지를 모아오면 화장지나 식용유로 바꿔주는 활동이 활발하게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거창한 캠페인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실천으로 이어지는 방식이라는 점이 눈에 띄었다.

    시흥시에는 특징이 하나 더 있다. 동마다 마을학교가 다 있다는 점이다. 다른 지역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촘촘한 구조다. 다만 모든 마을학교가 환경 관련 활동을 하는 것은 아니고, 그중에서도 시흥시 차원에서 환경 관련 활동을 이어가는 마을학교들이 있는 것이다. 시가 직접 관여하는 사업이기에 가능한 특이점이라고 사무총장은 짚었다. 동 단위까지 촘촘하게 퍼져 있는 마을학교의 존재는, 환경교육이 생활권 안으로 스며들 수 있는 잠재적인 통로이기도 하다. 동네 마을학교에서 반복되는 작은 실천들이 결국 더 오래 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인터뷰 내내 떠나지 않았다. 댓골마을학교의 사례는, 아직 시흥 전역으로 넓게 퍼지지는 못했지만 앞으로 다른 동의 마을학교들이 참고할 수 있는 하나의 모델이 될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6. 민(民)과 관(官) 사이, 예산이라는 현실

    네트워크가 궁극적으로 바라보는 방향은 무엇일까. 사무총장의 답은 환경 정책이라는 것이 민간이나 행정 어느 한쪽만의 힘으로 주도될 수 없다는 인식에서 출발했다. 함께 참여하겠다는 의제가 있어야 하는데, 여기에는 예산이라는 현실적인 문제가 늘 따라붙는다. 좋은 취지만으로는 지속되기 어렵고, 결국 누가 어떤 자원을 대고 어떻게 나눌 것인가 하는 질문 앞에 서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시흥에는 이미 몇십 년째 활동을 이어온 환경교육 연합이 있다. 그 안에서도 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단체, 캠페인을 전문으로 하는 단체 등 성격이 저마다 다른 여러 단체가 얽혀 있다. 성격이 다른 단체들이 하나의 네트워크로 모이다 보니, 지향점을 맞추는 과정 자체가 쉽지 않다. 여러 단체가 모여 만든 네트워크이다 보니 한계도 뚜렷하다는 것이 솔직한 진단이다. 예산이 없다 보니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쉽게 나서기 어렵고, 상급 기관과의 협의도 피할 수 없는 과정이다.

     / ⓒ에디터 해지
     

    특히 눈에 띄는 지점은, 환경교육네트워크가 아직 고유번호증을 발급받지 못한 상태라는 것이다. 정식 등록 이전 단계에 머물러 있다 보니 직접적인 지원을 받지 못하고, 그래서 지금은 시흥YMCA라는 단체명을 빌려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환경교육주간 행사 역시 시흥YMCA가 사업을 수주하고 공모를 통해 각 단체에 나누어주는 형태로 진행됐다. 이름을 갖추지 못한 네트워크가 이름을 가진 단체의 어깨를 빌려 걸음을 떼고 있는 셈이다. 겉으로 드러난 활동의 화려함 뒤에는, 이렇듯 아직 제도의 틀 안에 자리 잡지 못한 현실이 함께 있었다. 여러 단체가 뜻을 모아 만든 협의체라 하더라도, 법인격이나 고유번호증 같은 최소한의 행정적 장치가 없으면 지원 사업 하나에 지원서를 내는 것조차 쉽지 않다. 결국 그 빈틈을 메우는 몫은 시흥YMCA처럼 이미 법인격을 갖춘 단체의 몫으로 돌아가고, 그 단체 역시 넉넉한 여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지역을 위해 기꺼이 짐을 나누어 지고 있는 셈이었다.

     


     

    "지역의 색을 담은 교육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환경교육을 하는 이유는 결국 하나로 모인다. 교육이 실제 환경 보호라는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 이 지점에서 사무총장은 개인적인 생각이라는 전제를 달고 앞으로의 과제를 짚었다. 표준화된 교보재를 만드는 것도 방법이지만, 지역마다 처한 환경 의제가 다른 만큼 지역의 특색을 반영한 교육 프로그램과 교보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느 지역은 갯벌이 의제이고, 어느 지역은 대기질이 의제일 수 있다. 하나의 틀로 모든 지역을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각 단체가 필요에 따라 이를 각색해서 쓸 수 있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만약 이런 작업을 해낸다면, 개별 단체 차원이 아니라 네트워크 차원에서 함께 추진하는 것이 맞는 방향이라고 사무총장은 덧붙였다. 아직 실현되지 않은 구상이지만, 네트워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늠하게 하는 대목이었다. 언젠가 여러 단체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지역 맞춤형 콘텐츠를 만드는 날이 온다면, 그 출발점은 오늘의 이 인터뷰에서 나온 소박한 바람일지도 모른다.

     


     

    시흥 YMCA의 뿌리

    시흥의 환경 활동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단체가 하나 더 있다. 시흥에서 가장 오래 활동해온 시흥 환경운동연합이다. 전국 단위의 플로깅 활동은 물론, 철새를 비롯한 생태 모니터링까지 폭넓게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오랜 시간 축적된 이런 활동들이, 지금의 환경교육 플랫폼이 설 수 있는 토양이 되어주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곁에는 시흥YMCA가 있다. 시흥YMCA가 가장 공을 들여온 활동은 생태환경 보전이다. 터널 건설을 반대하며 생태 보존을 지켜낸 운동은 지금까지도 시흥YMCA를 대표하는 활동으로 꼽히며,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30년 가까이 청소년활동을 중심에 두었던 단체가, 어느새 생태를 지키는 일에도 오랜 시간 발을 담가온 것이다. 처음부터 환경단체로 출발한 곳이 아니기에, 시흥YMCA가 걸어온 궤적은 조금 다르게 읽힌다. 청소년의 삶을 고민하던 자리에서 출발해, 그 삶을 둘러싼 자연과 지역 사회, 그리고 인권의 문제로 자연스럽게 시선이 넓어져 온 셈이다. 청소년활동과 환경활동, 인권활동이 서로 멀지 않다는 것을 시흥YMCA의 걸음이 보여주고 있다. 이번 환경교육플랫폼 참여 역시, 그런 오랜 확장의 연장선 위에 놓여 있는 결정이었을 것이다. 이 밖의 활동 연혁은 시흥YMCA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함께 걷는다는 것

    환경교육플랫폼이라는 이름 아래 모인 시흥의 단체들은 저마다 다른 역사와 방식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는 몇십 년째 생태를 지켜왔고, 누군가는 마을 단위에서 우유팩과 폐건전지를 모으며, 누군가는 아직 정식 등록조차 마치지 못한 채로 활동을 이어간다. 그 사이에서 시흥YMCA는 동행자의 자리를 지키며, 네트워크의 한 축을 묵묵히 받치고 있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사무국을 나서며 든 생각은 하나였다. 완성된 체계를 자랑하는 것보다, 지금 가진 한계를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어쩌면 더 단단한 시작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한 네트워크가 다른 단체의 이름을 빌려 사업을 이어가고, 큰 통합 행사 대신 몇 단체가 각자의 자리에서 작은 체험을 여는 지금의 모습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분명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걸음이다. 예산도, 제도적 근거도 충분치 않은 상태에서 여러 단체가 서로의 부족함을 메워가며 걷고 있다는 것. 그것이 지금 시흥의 환경교육이 서 있는 정직한 자리다. 그리고 그 걸음의 한편에는, 30년 가까이 지역과 함께 걸어온 시흥YMCA가 여전히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시흥YMCA에게 환경교육네트워크를 묻다
    해지

    조회수 140

    2026-07-29
  • ※「공익웹진」은 시민 기록 활성화를 위해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가 발행하는 참여형 아카이브입니다. 경기도 공익활동 현장의 다양한 시선과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콘텐츠의 내용은 경기도민 에디터가 직접 취재·작성한 것으로, 일부 의견은 기관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태풍이 지나간 저녁, 수원에 모인 사람들

     / ⓒ경기시민연구소 울림

     

    2026년 7월 14일, 경기도 수원시 팔달문화센터 예당마루에서 "시대와 세대를 잇다 — 리영희가 던진 질문을 오늘에 다시 새기다"를 주제로 제11차 경기사회포럼이 열렸다. 궂은 날씨 속에서도 시민과 활동가들이 참여한 이번 포럼은 언론인이자 사상가 리영희(1929~2010)를 청년 세대와 함께 조명하고 그의 질문을 오늘날에 재해석하고자 마련됐다.

    경기사회포럼은 2025년 하반기 경기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경기시민연구소 울림, 경기평화교육센터가 출범시킨 경기 지역의 격월제 시민 담론 플랫폼이다. 이날 행사는 개회 인사와 영상 상영에 이어 김효순 리영희재단 이사장의 기조 발제, 김학민 경기사회포럼 자문위원, 모정하 전교조 경기지부 부지부장, 정용준 청년 활동가의 좌담으로 진행됐다.

    진행자는 리영희가 평생 던진 질문들이 과거에 머물지 않고 오늘날 민주주의와 시민사회에도 유효하다고 밝히며, 시대를 넘어 그의 질문으로 현재의 현실을 돌아보는 것이 이번 포럼의 취지라고 강조했다.

     

    리영희는 누구인가 ㅡ 국경을 넘나든 생애

     / ⓒ에디터 엄프로

     

    리영희는 1929년 평안북도 운산에서 태어나 국립해양대학을 졸업했다. 한국전쟁 당시 통역장교로 복무한 뒤 1957년 예편했고, 합동통신과 조선일보 외신부장을 거치며 외신 전문 기자로 활동했다. 1960년에는 미국 노스웨스턴대학교 신문대학원에서 연수했다.

    기자로서 그는 두 가지 보도로 큰 이정표를 남겼다. 1964년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검토 안건을 보도해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고, 1960년대 후반 베트남전쟁 취재를 통해 미국의 개입 성격을 비판 시각으로 전하다 1969년 해직되었다.

    1972년 한양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부임한 그는 학계에서 저술 활동을 본격화했다. 1974년 첫 평론집 『전환시대의 논리』를 펴내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1977년 『8억인과의 대화』와 『우상과 이성』을 잇달아 출간했다. 이 세 권은 1980년대 당국이 집계한 '불온서적' 목록 상위권을 차지할 정도로 당대 젊은 지식인들의 의식 형성을 이끌었다.

    이에 따라 권력의 탄압이 이어졌다. 1976년 한양대에서 해직되었고, 1977년 『우상과 이성』 출간 직후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1980년까지 옥고를 치렀다. 1980년 복직 후에도 시국선언 참여로 재해직되었다가 1984년에야 복직했다.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에 참여해 논설고문을 맡았으나, 이듬해 방북 취재 기획 혐의로 다섯 번째 구속을 겪었다. 평생 9차례 연행, 5차례 구속, 4차례 해직을 당하며 총 1,012일 동안 옥살이를 했다.

    1995년 정년퇴임 후에도 냉전 해체와 한반도 정세 등 첨예한 의제를 지속 연구했고, 1998년 햇볕정책 시기 고향을 방문해 친지와 상봉했다. 2005년 대담집 『대화』를 펴낸 뒤 2010년 12월 5일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왜 '사상의 은사'였는가 — 저작이 가진 무게

     / ⓒ에디터 엄프로
     

    리영희를 다루는 연구와 평문들은 그를 '사상의 은사' 혹은 '의식화의 원흉'이라는 상반된 별칭으로 부른다. 이 극단적인 평가 자체가 그가 한국 사회에 남긴 충격의 크기를 보여준다.

    그의 문제의식 핵심은 '사실'과 '진실'을 향한 집요한 추구였다. 냉전 반공주의가 지배하던 시절, 베트남전쟁, 중국 혁명, 북한, 주한미군 등의 주제는 정해진 답 외의 사고가 허락되지 않았다. 리영희는 이 영역에 정면으로 뛰어들어 베트남 개입의 정당화 과정, 주한미군 기지의 함의, 중국 사회주의 혁명의 실상을 실증적 자료로 파헤쳤다. 『전환시대의 논리』 서문에서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일화를 인용하며, 자신의 글이 경직된 한국 사회에 조심스러운 '가설'이 되기를 바란다는 뜻을 내비쳤다.

    1994년 펴낸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의 제목은 그의 문제의식을 압축한 표현으로, 한국 정치 담론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경구가 되었다. 그는 광복 후 한국 사회가 "오른쪽은 신성하고 왼쪽은 악하다는 착각" 속에 살아왔다고 지적하며, 새가 양날개의 균형으로 날듯 사회의 건강한 사고도 한쪽 극단만으로는 지탱될 수 없음을 강조했다. 이 표현은 냉전 반공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쓰였으나, 훗날 보수 진영에서 양측의 '균형'을 강조하는 수사로 인용되며 원래 맥락과 다르게 소비되기도 했다. 이는 리영희라는 텍스트가 시대에 따라 어떻게 다르게 전유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감옥 속의 인연들 — 김학민이 전한 뒷이야기

     / ⓒ에디터 엄프로
     

    이날 좌담에서 청중의 몰입을 끌어낸 대목은 리영희와 사적 인연을 맺어온 김학민 자문위원의 회고였다. 연세대 졸업 후 한길사 편집장, 학민사 대표를 지낸 그는 1970년대 학생운동 시절 감옥에서 리영희라는 이름을 처음 접했다고 전했다. 당시엔 동명이인의 다른 언론인과 혼동할 정도로 정보가 단절된 시절이었으나, 감옥 안에서 『전환시대의 논리』 출간 소식을 들은 뒤 출소 후 그의 책을 직접 편집·출간하는 인연으로 이어졌다고 회고했다.

    김학민은 리영희가 감옥 안에서도 결코 수동적이지 않았던 일화를 전했다. 1977년 광주교도소 복역 당시 재판 대응을 위해 밖에서 통계 자료 등을 몰래 들여보내 주었는데, 이를 도운 인물 중에는 말단 교도관 전병용이 있었다. 그는 해직과 구속 위험을 무릅쓰고 양심수들을 도왔으며, 훗날 교정 당국이 그를 표창하는 아이러니도 있었다. 재판 과정에서는 송건호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등이 증인으로 나서 유리한 증언을 하기도 했다.

    또한 1977년 나온 『우상과 이성』 초판은 압수되어 남아 있지 않은 반면, 1980년 판본은 도서관에서 확인되는 뒷이야기도 소개됐다. 계엄령 하 서울시청 지하 검열실에서 방대한 분량을 읽어야 했던 검열관들의 고충과 이전 판본과 동일함을 내세워 통과를 받아낸 과정이 전해져 웃음을 자아냈다. 이러한 에피소드들은 표현의 자유가 봉쇄된 시절 지식인의 글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수많은 이의 위험한 조력이 필요했음을 보여준다.

     

    청년 패널들이 처음 만난 리영희

     / ⓒ에디터 엄프로

     

    이번 포럼에서 가장 인상적인 지점은 리영희를 만나본 적 없는 청년 세대 패널들이 그의 방대한 저작을 읽고 소회를 전한 데 있었다.

    경기평화교육센터 청년 활동가 패널은 정치외교학 전공자임에도 리영희라는 이름을 처음 접했다고 솔직히 밝혔다. 대학 도서관에서 『우상과 이성』이 최근 10년간 단 두 차례 대출되었고 그중 하나가 자신이라는 사례를 통해 오늘날 청년 세대와 리영희 간의 단절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는 대담집 『대화』를 읽으며 청년 세대가 잃어가는 것은 인물 자체가 아닌 '질문하는 태도'라고 진단했다. 정답 맞히기엔 익숙하지만 질문엔 주저하는 오늘날, 리영희의 시대가 '국가와 이념'의 우상에 맞섰다면 지금은 '나의 확신'을 성찰할 때라는 견해를 제시했다.

    또 다른 청년 패널은 『대화』 속 "사상의 자폐증은 자살이다"라는 문장이 깊이 남았다고 전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무비판적으로 정보를 수용하며 사고를 멈춘 삶을 되돌아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700쪽이 넘는 『대화』를 하루 만에 완독했다는 그는 역사를 교과서 속 서술이 아닌 개개인의 고통스러운 삶으로 바라보게 되었다며, 역사 앞에 겸손해야 한다는 소회를 전했다.

    전교조 경기지부 패널은 2020년 군포 산본으로 이사하며 지역사회를 통해 리영희를 접한 사연을 전했다.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 당시 아버지가 구독하던 지면에서 처음 이름을 접했던 기억과 함께, 리영희기념사업회의 '발자취 기행'을 통해 윤영자 여사가 지키는 산본 자택 서재를 방문한 경험을 나눴다. 앉은뱅이책상 위 읽다 만 책과 책장 사이 감춰진 술병 등은 '전설적 지식인'이 아닌 인간적인 리영희를 느끼게 했다.

      

    오늘날 왜 다시 리영희인가

    이날 포럼에서 반복적으로 제기된 질문은 '왜 지금, 다시 리영희인가'였다. 패널들은 오늘날 정보 환경의 근본적인 변화를 공통적으로 지적했다. 과거 권위주의 체제에서는 정보가 일방적으로 하달되어 부족했던 반면, 오늘날은 정보가 넘쳐나 선호하는 정보만 선택적으로 접하면서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는 새로운 사회적 균열이 발생하고 있다는 진단이었다. AI 기술의 확산으로 스스로 사고하는 훈련의 기회가 줄어든다는 우려도 함께 제기됐다.

    리영희가 평생 강조했던 것은 특정한 이념적 결론이 아니라, 권위나 통념에 안주하지 않고 사실에 근거해 스스로 사고하는 태도, 그리고 그 결과를 감수할 용기였다. 교육 현장의 패널은 이러한 '질문하는 자세'와 '사고하는 힘'이야말로 오늘날 교육이 다시 화두로 삼아야 할 가치라고 강조했다. 리영희가 다룬 개별 사건들은 시대와 함께 지나갔지만, 사건을 대하던 그의 지적 태도와 진실을 향한 집요함은 세대를 넘어 여전히 유효한 질문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 포럼의 잠정적 결론이었다.

     

    맺으며

    한 시간 반 남짓 진행된 이날 포럼은 화려한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패널들은 리영희의 방대한 사상 세계를 다 이해하지 못했음을 솔직하게 인정하며, 앞으로 더 깊이 읽고 배우겠다는 다짐으로 발언을 마무리했다. 완결된 정답이 아닌 계속되는 질문으로 자리를 마쳤다는 사실 자체가 어쩌면 리영희가 평생 지향했던 지적 태도와 가장 닮아 있는 결말이었다.

    경기사회포럼 측은 이날 행사가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음을 밝히며 지속가능한 활동을 위한 후원을 당부하고 마무리했다. 리영희가 감옥과 해직을 오가며 지켜내고자 했던 것이 한 사회가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자유였다면, 그 자유를 다음 세대에게 어떻게 이어줄 것인가라는 질문은 이 조촐한 지역 포럼의 자리에서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남아 있었다.

     

    리영희가 던진 '질문'을 오늘에 다시 새기다
    엄프로

    조회수 223

    2026-07-27
  • ※「공익웹진」은 시민 기록 활성화를 위해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가 발행하는 참여형 아카이브입니다. 경기도 공익활동 현장의 다양한 시선과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콘텐츠의 내용은 경기도민 에디터가 직접 취재·작성한 것으로, 일부 의견은 기관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소수의 활동가가 255개 위원회를 감시하다

    비영리 시민단체에서 일한다는 것은 늘 자원의 부족을 안고 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력은 적고, 예산은 빠듯하며, 분석해야 할 행정 정보는 방대하다. 지방자치단체 하나만 해도 수십에서 수백 개의 위원회가 운영되고, 수조 원 단위의 예산이 집행되며, 수천 건의 행정 결정이 이루어진다. 이 모든 것을 소수의 활동가들이 수작업으로 추적하고 분석해 시민에게 알리는 것은 구조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다.

     / ⓒ대전참여자치시민연대

     

    대전참여자치시민연대(이하 대전참여연대)는 2026년 5월, 대전시 행정의 불투명성과 선거 공약의 편향성을 고발하는 두 건의 전수 분석 보고서를 발표했다.

    첫째, 대전시 255개 위원회의 운영 실태 분석 결과, 17.3%(44곳)는 최근 4년간 회의를 단 한 번도 열지 않았고, 41.2%(105개)는 연평균 1회 미만에 그쳤다. 특히 개최된 회의(2,489회) 중 63.8%의 결과가 비공개 처리됐으며, 도시계획위원회(87회)와 주택건설사업통합심의위원회(43회) 등 주요 위원회는 위원 구성 및 회의 결과를 단 한 건도 공개하지 않았다.

    둘째, 지역 시민단체들과 합동으로 6·3 지방선거 후보자들의 선거공보물 공약 2,920건을 분석했다. 그 결과 89%가 개발·시설 중심 공약에 편중된 반면, 기후정의·성평등·시민참여·평화 공약은 5%에 불과했다.

    이 사례들은 소수 활동가들이 어떻게 이처럼 방대한 공익 데이터를 분석해냈는지, 그리고 향후 효과적인 데이터 감시 활동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라는 과제를 남긴다.

     

    공공데이터 감시란 무엇인가 ㅡ 민주주의의 기반으로서의 정보

    대전참여연대의 활동을 이해하려면 '공공데이터 감시'라는 개념부터 살펴야 한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시민이 정부의 행위를 알 수 있어야 한다. 어떤 결정이, 누구에 의해, 어떤 과정을 거쳐 내려졌는지가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으면 시민은 판단할 수도, 개입할 수도 없다. 이 원칙이 제도적으로 표현된 것이 정보공개 제도이고, 시민단체들이 이 제도를 적극 활용해 행정의 투명성을 추적하는 것이 공공데이터 감시 활동이다.

     
      / ⓒ정보공개포털

     

    지방자치단체의 행정정보는 지자체 홈페이지와 정보공개포털(open.go.kr)을 통해 일정 수준 공개된다. 하지만 공개된 정보를 체계적으로 수집·분석해 의미 있는 결론을 도출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예컨대 255개 위원회의 운영 현황을 일일이 방문해 엑셀로 정리하고 통계를 내는 작업은 수십 시간이 소요되는 단순 반복 업무다. 이는 인적 실수의 위험이 크고 정기적인 재분석도 현실적으로 어렵다.

    이때 기술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웹 크롤링, 데이터 정리 자동화, 시각화 도구는 이러한 작업을 자동화하고 정확성을 높일 수 있으며, 생성형 AI의 등장은 그 가능성을 한층 더 확장시키고 있다.

     

    공공데이터로 행정을 비추다 ㅡ 대전참여연대 활동의 의의

    대전참여연대의 255개 위원회 전수 분석과 공약 분석 발표는 다층적인 의미를 지닌다.

    첫째, 2021년 이후 5년 만에 수행된 추적 조사다. 위원회 수가 219개에서 255개로 16.4% 늘었음에도 투명성 지표는 개선되지 않거나 후퇴했음을 비교를 통해 입증했다.

    둘째, 구체적인 수치로 반박 불가능한 근거를 제시했다. "2,489회 회의 중 63.8% 비공개"라는 명확한 데이터는 당국의 반론을 막고 여론 형성과 정책 변화를 이끄는 핵심 동력이 됐다.

    셋째, 회의 개최율, 정보 공개율과 함께 성별 균형까지 아우른 다층적 분석이었다. 여성 참여율 법정 기준(40%) 미달 위원회가 61.1%, 여성 위원이 한 명도 없는 곳이 23개에 달함을 파악해냈다.

    공약 2,920건 분석 역시 수십 명의 자원봉사자가 참여해 후보들의 공약을 가치 기준으로 분류·재평가한 작업으로, 유권자에게 객관적인 가치 판단의 근거를 제공했다.

     

    자동화가 가져올 변화 ㅡ 산업공학적 시각으로 보는 시민단체

     / ⓒstibee

     

    산업공학(IE)의 핵심인 '프로세스 최적화'를 시민단체의 데이터 감시 활동에 적용하면 작업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다.

    대전참여연대의 전수 조사 과정을 분해해 각 단계별로 자동화를 도입하면 구체적인 변화가 나타난다. 데이터 수집·정리 단계에서는 255개 페이지를 직접 방문하는 수작업 대신 파이썬 크롤러를 활용해 수집 시간을 수십 분의 일로 단축할 수 있다. 분석 단계에서는 공약 2,920건 분류와 같은 텍스트 범주화를 생성형 AI가 초안 작성하고 사람이 검수하는 방식을 통해 속도를 높인다. 시각화 단계에서는 파이썬 라이브러리나 태블로를 활용해 작성 시간을 줄이고 실시간 대시보드로 주기적 모니터링이 가능해진다.

    이러한 자동화는 단순한 시간 절약을 넘어선다. 산업공학의 '린(Lean) 방식'처럼 단순 반복이라는 낭비 공정을 줄임으로써, 활동가가 정책 제언이나 시민 소통 같은 고부가가치 업무에 집중하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소수 인력으로도 더 넓은 영역을 더 자주, 빠르게 감시하는 임팩트를 창출할 수 있다.

     

    시빅테크의 등장 ㅡ 기술이 시민사회의 손에 들어올 때

     / AI 생성 이미지

     

    '시빅테크(Civic Technology)'는 디지털 기술로 시민 참여를 강화하고 공공 문제를 해결하는 활동과 생태계다. 정부가 아닌 시민이 기술을 주도한다는 점에서 전자정부 서비스와 구별된다.

    한국에서 시빅테크의 잠재력이 드러난 대표적 사건은 2020년 코로나19 공적 마스크 앱 개발이다. 정부가 마스크 재고 데이터를 API로 공개하자 이틀 만에 200여 명의 시빅해커가 앱을 개발했고, 이 경험을 계기로 '코드포코리아(Code for Korea)'가 결성됐다.

    코드포코리아는 2020년 2월 빠띠 활동가들이 행정안전부에 제출한 공공데이터 공개 요청 제안서에서 출발했다. 요청 데이터가 공공 API로 제공되며 정부의 재난 시 공공데이터 개방 기조 수립과 14만 건 이상 데이터 공개 방침에 영향을 주었으며, 이후 데이터 품질 평가와 크롤링 활동 등을 이어오고 있다.

    사회적협동조합 빠띠는 데이터 액티비즘의 철학적 기반을 제공한다. 공공 데이터 공유로 정부 투명성을 높이려는 이 운동에 대해 빠띠는 '인공지능 시대, 데이터 액티비즘과 거버넌스'를 연구하며 시민의 데이터 역량이 민주주의의 기반임을 강조한다. 정부가 놓친 문제를 해결하는 협력적 접근이 이들의 핵심 철학이다.

    주목할 점은 기술 전문가만이 주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엔지니어 외에 기획자, 디자이너, 변호사, 시민운동가 등 다양한 인원이 참여하는 만큼, 대전참여연대 같은 시민단체가 데이터 활동을 펼칠 때 시빅테크 생태계와의 연결이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시빅테크와 시민단체의 협력 ㅡ 남은 과제

     / ⓒpython

     

    기술의 잠재력이 크다고 해서 모든 시민단체가 당장 파이썬 코드를 짜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현실적인 장벽이 있다.

    우선 기술 역량의 문제다. 대부분의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프로그래밍 전문가가 아니다. 파이썬 크롤러를 구축하고 유지하는 데는 최소한의 기술 지식이 필요하고, 이를 내부에서 습득하거나 외부에서 조달해야 한다. 코드포코리아 같은 시빅테크 커뮤니티와의 협력이 이 문제의 현실적인 해법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데이터 접근성의 문제도 있다. 한국의 공공데이터 개방 수준은 많이 향상됐지만, 여전히 상당수의 행정 정보는 기계가 읽기 어려운 PDF 형태나 비정형 구조로 제공된다. 크롤링이 기술적으로 가능해도, 실제 데이터가 정형화되어 있지 않으면 후처리 작업이 상당히 필요하다. 공공데이터 개방의 질을 높이는 것은 시민단체뿐 아니라 정부와의 협력이 필요한 과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향은 분명하다. 대전참여연대가 수작업으로 해낸 일을 기술의 도움으로 더 빠르고 정확하고 자주 반복하는 것이 가능해진다면, 행정의 투명성을 감시하는 시민사회의 역량은 비교할 수 없이 강화된다. 결국 공익활동의 자동화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와 협력의 문제다.

     

    경기도 공익활동 생태계에 주는 시사점

     
      / ⓒmagnific

     

    대전참여연대의 사례와 한국 시빅테크의 경험에서 경기도 공익활동 생태계가 참고할 수 있는 점은 세 가지다.

    첫째, 소규모 단체도 데이터 기반 감시를 수행할 수 있다. 대전참여연대는 거대 조직이 아님에도 255개 위원회 전수 조사와 2,920건의 공약 분류를 해냈다. 이미 공개된 공공데이터와 지자체 정보를 체계적으로 수집·분석하는 역량을 키우는 것이 출발점이다.

    둘째, 시빅테크 커뮤니티와의 연결이 역량을 증폭시킨다. 코드포코리아처럼 기술을 나누려는 커뮤니티와 경기도 공익단체가 협력하면 공공데이터 분석과 시각화를 통해 공익 임팩트를 높일 수 있다.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가 이 연결을 촉진하는 역할을 맡을 수 있다.

    셋째, 기록이 장기적 변화의 힘이다. 대전참여연대가 2021년과 2026년 분석을 비교할 수 있었던 것은 이전 기록이 축적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공익활동 결과를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공개하는 아카이브 작업은 단기 보고서를 넘어 장기적 추적과 비교 분석을 가능하게 하는 기반이 된다.

     

    마무리 ㅡ 투명한 행정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 ⓒ광장21

     

    대전시의 255개 위원회 중 절반에 가까운 위원회가 사실상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대전참여연대가 그것을 찾아내 발표했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는 데이터는 있었지만, 분석된 적이 없었다. 정보는 존재했지만, 아무도 연결하지 않았다.

    민주주의는 투명한 행정 위에서만 작동한다. 그리고 투명한 행정은 누군가 끊임없이 들여다보고 물어보고 기록해야 가능해진다. 대전참여연대가 해온 일이 그것이다. 앞으로 데이터 기술이 그 손을 강화해준다면, 더 적은 힘으로 더 넓은 행정을 감시하고, 더 많은 시민에게 더 빠르게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기술은 목적이 아니라 도구다. 그리고 그 도구를 시민의 손에 쥐어주는 것, 그것이 시빅테크가 공익활동 생태계에 기여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이다.

     

    데이터가 시민의 무기가 될 때 : 대전참여자치시민연대의 공공데이터 감시 활동과 한국 시빅테크의 가능성
    엄프로

    조회수 113

    2026-07-27
  • ※「공익웹진」은 시민 기록 활성화를 위해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가 발행하는 참여형 아카이브입니다. 경기도 공익활동 현장의 다양한 시선과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콘텐츠의 내용은 경기도민 에디터가 직접 취재·작성한 것으로, 일부 의견은 기관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학교와 마을을 잇다”…경기마을교육공동체, 31개 시군 연대로 새로운 출발

     
      /경기도 31개 시군 연대 경기마을교육공동체가 7월 11일 공식 출범했다 ⓒ에디터 다참

     

    저출생, 학교 통폐합, 지역 소멸, AI시대…. 급변하는 교육 환경 속에서 학교 교육만으로는 아이를 키울 수 없다는 문제의식이 다시 경기도 곳곳의 마을을 연결했다.

    코로나19 이후 사실상 멈췄던 경기도 마을교육 네트워크가 31개 시군을 아우르는 ‘경기마을교육공동체’로 다시 출범했다. 학교와 마을, 행정과 시민이 함께 교육을 책임지는 새로운 교육자치 플랫폼을 만들겠다는 선언이다.

    7월 11일 화성시 근로자종합복지관에서 열린 경기마을교육공동체 출범식에는 교육활동가와 교사, 학생, 학부모, 정치권, 교육청 관계자들이 참석해 교육자치 플랫폼의 새로운 출발을 함께했다.

     /31개 시군 지부는 각자의 마을교육 영역에서 홍보 피케팅을 준비해 와 알리고 있다. ⓒ에디터 다참

     


     

    멈췄던 연대, 다시 하나로…경기도 31개 시군 광역교육네트워크 출범

     

    이번 출범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결과가 아니었다.

    이는 구명옥 추진위원장이 소개한 경기마을교육공동체가 출범하기까지의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2016년부터 2021년까지 경기마을교육공동체협의회가 활동했지만, 이후 중단됐다”라며, “그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활동가들이 다시 힘을 모아 광역 네트워크를 준비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2026년 3월 경기마을교육공동체가 공식 출범한 이후 14개 분과를 중심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경기도 31개 시군으로 조직을 확대했다”라며, “오늘 창립총회는 그동안 준비해 온 결실”이라고 설명했다.

    경기마을교육공동체는 그동안 정책 협약과 교육정책 제안, 회원 조직 정비, 네트워크대회 개최 등을 추진하며 광역 조직의 기반을 다져왔다.

     
      /이영식 경기마을교육공동체 초대 이사장이 출범 선언문을 낭독하고 있다. ⓒ에디터 다참

     

    “더 큰 조직보다 더 단단한 교육공동체를 만들겠습니다”

    출범식 직전 대의원총회에서 선출된 이영식 초대 이사장은 “31개 시군이 함께하는 광역 네트워크가 가능하겠느냐는 질문을 수없이 들었고, 누군가는 제 생각을 망상이라고도 했지만, 오늘 이 자리는 기적처럼 만들어졌다”라고 회상했다.

    이어 “풀뿌리 교육운동을 넘어 교육자치 플랫폼으로 사람을 잇고, 마을을 잇고, 미래를 잇는 새로운 역사를 31개 시군이 함께 만들어 가겠다”라고 선언했다.

    경기도 31개 시군 전체를 하나의 학습공동체로 연결해 아이부터 어르신까지 모두가 교육의 주체가 되는 공동체를 만들어 가겠다는 것이다.

    이영식 이사장은 “지역을 돌며 가장 많이 들은 말은 ‘함께할 사람이 줄어 들었다’, ‘모일 공간이 없다’, ‘혼자 버텨 왔다’라는 이야기였다”라며, “마을교육 활동가들이 원하는 것은 거창한 사업이 아니라 언제든 다시 찾아갈 수 있는 공동체와 함께 기댈 수 있는 동료”라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 필요한 것은 보여주기식 조직이 아니라 가치의 연결”이라며, “학교와 마을, 교육청과 지방정부, 대학과 기업, 주민과 시민이 함께하는 교육자치 플랫폼으로 성장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이는 더 큰 조직이 아닌 서로 기대고 도와 줄 수 있는 더 단단한 공동체를 지향하겠다는 의미이며, 교육이 지역을 살리고 지역이 다시 교육을 살리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겠다는 다짐이었다.

     

    “학교와 마을의 벽을 허물겠습니다”

    교육청의 역할도 분명했다. 마을교육 활동가들이 지역에서 교육을 실천할 수 있도록 행정의 문턱을 낮추고, 학교와 지방정부를 연결하는 지원 체계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안민석 경기도교육감은 마을교육공동체를 ‘벽 깨기 교육’의 연장선으로 소개했다.

    안 교육감은 “학교와 지역, 교육청과 시청의 벽을 허무는 것이 우리 교육을 살리는 방법이라고 20년 넘게 이야기해 왔다”라며 “마을교육공동체 시즌2는 이전과는 다른 모습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시즌2의 핵심 과제로 ▲31개 시군 전체가 참여하는 조직 ▲읽기(R)·문화예술(A)·스포츠(S)를 중심으로 한 ‘RAS 교육’ ▲교육청과 지방정부가 함께하는 협력체계를 제시했다.

    이어 “학교의 힘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라며, “시설이 필요하면 시설을 지원하고, 예산이 필요하면 예산을 지원해 마을교육공동체가 날개를 달 수 있도록 돕겠다”라고 밝혔다.

     
      /안민석 경기도교육감이 마을교육공동체 시즌2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에디터 다참

     

    “마을이 우리들의 교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날 무대의 주인공은 마을교육 활동가들만이 아니었다. 학생과 학부모의 목소리는 마을교육이 정책을 넘어 일상 속 교육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안성 공도초등학교 4학년 박지후 학생은 “예전에는 학교 안에서만 배우는 것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마을 곳곳이 교실이 된다고 하니 기대가 된다”라며, “어린이들의 꿈이 마을 안에서 더 크게 자랄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달라”고 제안했다.

     /김아리 학생과 이슬기 학부모가 마을교육의 필요성을 제안하고 있다. ⓒ에디터 다참

     

    김포 양곡고등학교 2학년 김아리 학생도 “학교와 학원만 오가던 마을이 이제는 배움과 놀이의 공간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설렜다”라며 “마을 어른들과 함께 새로운 시도를 해 보고 싶다”라고 말했다.

    학부모 이슬기 씨는 “학부모는 단순한 교육의 소비자가 아니라 마을의 자원이 아이들에게 잘 연결되도록 돕는 조력자가 되고 싶다”라며 “학교 담장을 넘어 교육의 동반자로 함께 하겠다”라고 다짐했다.

     

    “학교도 문을 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현장에서 마을학교를 운영해 온 김봉수 남창초등학교 교장은 학교와 마을의 협력이 가져온 변화를 소개했다.

    그는 “마을은 열심히 노력했지만 학교가 함께하지 못해 허공의 메아리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지만, 학교장과 마을학교장을 함께 맡으면서 모든 것이 자연스러워졌다”라며, “학교도 문을 열 준비가 되어 있다. 앞으로 시즌2에서는 더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구명옥 추진위원장이 경기마을교육공동체가 추진해야 할 6대 과제를 발표하고 있다. ⓒ에디터 다참

     


     

    지속가능한 교육생태계 구축을 위한 6대 과제

    이날 출범식에서는 경기마을교육공동체가 앞으로 풀어가야 할 과제도 발표됐다.

    구명옥 추진위원장은 ▲마을교육공동체 활성화 지원 조례 제정 추진 ▲마을교육공동체 기본법 제정 추진 ▲경기도 31개 시군 거점 마을학교 운영 ▲마을교육공동체지원센터와 마을교육대학 설립 추진 및 마을교육사 양성 ▲주민 참여형 교육자치 실현 ▲돌봄과 배움이 연결되는 지역 교육공동체 구축 등 여섯 가지 과제를 제시했다.

    그는 “현장의 실천에 머무르지 않고 정책과 제도를 함께 만들겠다”라며, “혼자서는 만들 수 없는 변화도 함께라면 가능하다”라고 강조했다.

    이날 출범식은 단순히 새로운 단체의 시작을 알리는 자리가 아니었다. 학교와 마을이 따로 존재하던 교육에서 벗어나 지역 전체가 아이들의 배움을 책임지는 새로운 교육자치 모델을 함께 선언한 자리였다.

    그리고 이날 제시한 경기마을교육공동체가 풀어가야 할 숙제는 결코 녹록지 않아 보인다. 구명옥 추진위원장의 말처럼 현장의 실천을 반드시 법적·제도적으로 연결해야 가능할 것이다.

    앞으로 경기마을교육공동체가 31개 시군을 연결하는 광역 네트워크를 넘어 교육정책을 제안하고 현장을 잇는 플랫폼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진다.

     

    학교와 마을을 잇다 : 경기마을교육공동체, 31개 시군 연대로 새로운 출발
    다참

    조회수 142

    2026-07-23
  • ※「공익웹진」은 시민 기록 활성화를 위해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가 발행하는 참여형 아카이브입니다. 경기도 공익활동 현장의 다양한 시선과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콘텐츠의 내용은 경기도민 에디터가 직접 취재·작성한 것으로, 일부 의견은 기관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AN전도시에 SAN' 시민추진위원회 전체회의 안내 포스터. ⓒ4.16안산시민연대

     

    2026713일 월요일 오후, 안산시민햇빛발전협동조합 교육장에는 시민추진위원회 위원들이 모여 앉았다. 'AN전도시에 SAN' 시민추진위원회 전체회의였다. 이날 가장 많은 이들의 관심을 모은 순서는 특별강연이었다. 강연 제목은 '생명안전기본법 제정 이후,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강사로는 국회생명안전포럼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용혜인 국회의원이 나섰다.

    올해 57, 생명안전기본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세월호 참사가 있었던 2014년으로부터 꼭 12년이 흐른 시점이었다. 이 글은 그날 강연에서 짚어준 법의 핵심 내용을 바탕으로, 에디터가 현장에서 느낀 것들을 함께 담아 정리한 기록이다.

    솔직히 말하면, 강연을 들으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안도감보다는 무게감이었다. 법이 만들어졌다는 소식은 반가웠지만, "이제 다 됐다"는 홀가분함은 어디에도 없었다. 오히려 앞으로 채워야 할 것들이 더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재난안전기본법에는 '피해자'가 없었다

     

    생명안전기본법이 만들어지기 전, 우리나라에서 대형 참사가 발생할 때 가장 먼저 작동하던 법은 재난안전기본법이었다. 그런데 이 법에는 애초에 '피해자'라는 규정 자체가 없었다고 한다. 국가가 재난을 어떻게 대응하고 관리할 것인가를 중심으로 짜인 법이다 보니, 국가와 각 부처가 무슨 역할을 해야 하는지만 규정하고 있을 뿐 피해자의 관점은 반영돼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 결과 국가는 자체적인 조사와 수습만 진행했을 뿐, 피해자들이 신뢰할 수 있는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조사는 이뤄지지 못했다. 대형 참사의 피해자들은 회복과 치유의 과정을 거치기는커녕 삭발을 하고 단식을 하고 거리에서 한겨울 혹한에 잠을 자야 했다. 심지어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피해자들이 '반정부 세력'으로 매도되는 일까지 있었다.

    이 대목에서 에디터로서 여러 장면이 떠올랐다. 뉴스로 스치듯 봤던 유가족들의 모습, 삭발식, 단식 농성. 그때는 그저 안타까운 뉴스 한 줄이었는데, 그것이 '법에 피해자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구조적인 이유에서 비롯됐다는 걸 이번 강연을 통해 처음으로 또렷하게 이해하게 됐다. 개인의 슬픔이 아니라 제도의 공백이었다는 사실이 새삼 무겁게 다가왔다.

     


     

    생명안전기본법이 갖는 네 가지 의미

     /'생명안전기본법, 네 가지 의미' 슬라이드를 배경으로 강연이 진행되는 모습. 에디터 안산사라

     

    이날 강연에서는 생명안전기본법이 갖는 의미를 크게 네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국민의 안전권을 법률로 명시함으로써 헌법적 기본권을 확장했다는 점.

    둘째, 그동안 흩어져 있던 재난안전 관련 법체계의 상위에 서는 기본법이 만들어졌다는 점.

    셋째, 참사 때마다 반복해서 제기됐던 예방 미흡·부실 조사·피해자 방치라는 문제를 해소할 근거를 마련했다는 점.

    넷째, 진상규명을 위한 독립조사를 실질화하고 상설화했다는 점. 강연에서는 이 네 번째 대목을 "법의 심장 같은 부분"이라고 표현했다.

    네 가지를 순서대로 듣다 보니, 결국 이 법의 뼈대는 '권리''체계''반복 방지''독립성', 이 네 단어로 요약되는 것 같았다. 법 조문을 하나씩 따라가다 보면 자칫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는데, 이 네 가지로 정리해 들으니 왜 이 법이 필요했는지가 한결 선명해졌다.

     

    1. 헌법적 기본법의 확장 - 안전을 '권리'

    생명안전기본법 4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모든 국민은 성별, 종교, 인종, 세대, 지역, 사회적 신분, 경제적 지위 등에 관계없이, 일상생활과 노동현장 등에서 안전사고의 위험으로부터 생명·신체 및 재산을 보호받고 안전하게 살 권리를 가진다." 안전이 권리로써 명문화된 것이다.

    법안 심사 과정에서는 이 조항의 주어를 두고 논쟁도 있었다고 한다. '국민'이 아니라 '사람'으로 규정해야 실질적이라는 반대 의견이 있었고, 결국 이번 법에서는 '국민'으로 정리됐다. 대신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을 합리적 이유 없이 차별하지 않도록 하는 조항이 별도로 담겼다.

    이 부분을 들으며 에디터로서는 아쉬움이 남았다. 이태원 참사와 화성 아리셀 참사에서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이 겪었던 차별적 대응을 이미 우리는 목격한 바 있다. '모든 국민'에서 '모든 사람'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지 못한 것은, 이 법이 아직 완성형이 아니라 계속 자라야 할 법이라는 걸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이 권리는 피해자에게는 더욱 구체적으로 확장된다. 신속하게 구조받을 권리, 예방부터 복구까지 전 과정에 참여하고 정보를 제공받을 권리, 차별받지 않고 2차 피해로부터 보호받을 권리, 시신을 인도적으로 인계받을 권리, 생활·의료·심리 지원을 받을 권리, 조사에 참여할 권리, 그리고 기억하고 추모할 권리. 그동안 피해자들이 스스로 짊어져야 했던 부담감을 이제는 국가가 보장해야 할 권리로 바꿔놓은 것이다.

     

    2. 상위 기본법 제정 - 흩어진 법체계의 뼈대를 세우다

    두 번째 의미인 '법체계의 상위 기본법', 그동안 재난안전 관련 법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지만 이를 하나로 꿸 설계도가 없었다는 문제의식에서 나왔다. 생명안전기본법은 바로 그 설계도 역할을 하는 가장 기본적인 법이다.

    이 뼈대를 실제로 움직이는 장치로는 대통령 소속의 국민생명안전위원회, 그리고 5년마다 국가가 수립해야 하는 생명안전종합계획이 소개됐다. 안전 정책 전체를 총괄하는 컨트롤타워를 두는 동시에, 흩어져 있던 정책과 예산, 교육을 하나로 모아 관리하겠다는 취지다.

       

    3. 반복된 문제를 풀 근거 안전영향평가와 알 권리

     
      /강연을 경청하는 시민추진위원회 위원들의 모습. 두 대의 스크린에 각각 강연 슬라이드가 띄워져 있다. 에디터 안산사라

     

    세 번째 의미인 '반복되는 문제 해소'는 크게 두 가지 제도로 구체화된다.

    하나는 안전영향평가다. 정부와 지자체가 새로운 법령이나 정책·사업을 추진할 때, 그것이 안전에 미치는 영향을 사전에 분석·평가하도록 하는 제도다. 새로운 규제를 풀거나 사업을 벌일 때 안전이 뒷전으로 밀리지 않도록 하는 예방장치가 될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하나는 피해자의 알 권리 보장이다. 앞으로 피해자들은 조사 결과와 판결문, 사고 원인과 재발 방지 대책, 유해 물질 정보까지 요청할 수 있고, 요청받은 국가나 기업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반드시 응해야 한다. 가습기살균제 참사의 성분 정보가 '영업비밀'이라는 이유로 감춰졌던 일, 세월호 참사 당일 대통령의 7시간 행적을 둘러싼 문서 목록 하나 공개되기까지 12년이 걸렸던 일이 그 배경으로 언급됐다.

    이 대목을 들으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정보를 '요청해서 받아내는 것''당연히 받는 것' 사이에는 결과만 놓고 보면 큰 차이가 없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사이에는 피해자가 감당해야 했던 시간과 싸움의 무게가 있다. 이 법이 그 무게를 조금이나마 국가 쪽으로 옮겨놓았다는 점에서, 작아 보이지만 결코 작지 않은 변화라고 느꼈다.

     

    4. 독립조사기구, 법의 '심장'

    네 번째 의미인 독립조사의 실질화·상설화는 국무총리 산하 국가안전사고조사위원회 설치로 구체화됐다. 사고 조사, 정책 개선 권고, 그리고 권고 이행 여부 점검까지 이 위원회가 맡는다.

    조사기구를 상설화하고 민간 출신 상임위원을 확보하는 것이 정부와의 협의 과정에서 가장 첨예했던 쟁점이었다고 한다. 참사가 발생할 때마다 그때그때 조사위원회를 새로 꾸리면, 매번 처음부터 사람을 모으고 자료를 다시 모으느라 조사가 지연되고, 결국 조사위원의 전문성과 연속성이 이어지지 않아 '셀프 조사' 비판이 반복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그동안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사참위)가 겪었던 한계였다.

    여기에 더해 조사가 끝난 뒤 권고사항이 실제로 이행되고 있는지 점검하는 조항도 새로 담겼다. 어렵게 조사하고 권고안을 만들어도 이행 여부를 아무도 확인하지 않으면 그 노력과 시간이 무의미해진다는 문제의식에서다.

    또 하나 눈에 띈 조항은 지역과 추모, 공동체 회복에 관한 내용이다. 추모시설 조성이나 기록 사업 등을 국가가 책임지고 지원하도록 명시한 것인데, 그동안 정부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회복'이라는 영역이 국가의 의무로 들어왔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느꼈다.

     


     

    12, 발의와 폐기를 거듭한 시간

     

    법이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이야기도 이어졌다. 21대 국회에서 발의된 법안들은 소관 상임위원회에서 심사조차 받아보지 못하고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22대 국회에서 다시 공동발의로 힘을 모았지만, 이번에도 국회 안에서 순탄하게 논의가 진전되지는 못했다고 한다.

    결국 국회 안에서 스스로 길을 연 것이 아니라, 세월호 참사 12주기를 앞두고 유가족과 시민들이 다시 목소리를 낸 것이 계기가 되어 429일 법안소위를 통과하고 57일 본회의에서 최종 가결됐다.

    12년이라는 시간은 강연에서 "한 아이가 태어나 초등학교 5, 6학년이 될 만큼의 시간"이라고 표현됐다. 이 표현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법 하나가 만들어지는 데 아이가 그만큼 자랄 시간이 걸렸다는 것, 그리고 그 긴 시간 동안 포기하지 않고 버텨온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 이번 법 통과로 유가족분들이 조금은 위안을 받으셨을 거라 생각하지만, 동시에 그 위안이 12년의 기다림에 비하면 너무 늦게 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법 통과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시행령을 채우고, 법을 키워가는 일슬라이드. 시행령 제정, 안전약자 확대, 통합 컨트롤타워라는 세 가지 남은 과제가 정리되어 있다. 에디터 안산사라

     

    법이 통과된 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말이 강연 내내 반복됐다. 실제로 남은 과제는 적지 않다.

    첫째는 시행령 제정이다. 피해자의 범위, 조사위원회 구성, 안전사고의 정의처럼 법의 실제 알맹이를 결정할 핵심 내용들이 대통령령에 위임돼 있다. 방향에 대한 의견은 주고받았지만, 실제 시행령이 어떻게 나올지는 앞으로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다.

    둘째는 안전약자의 범위 확대다. 청소년이나 미등록 외국인처럼 더 취약한 사람들까지 폭넓게 포괄하는 방향으로 시행령이 다듬어져야 한다는 지적이 있었다.

    셋째는 통합 컨트롤타워 문제다. 분산된 재난 조사를 한데 모아 결과와 사후 대책까지 통으로 점검하는 역할을 이번 법에 담고 싶었지만, 다른 부처들의 반발로 온전히 반영되지 못했고 앞으로의 개정 과제로 남았다고 한다.

    이 부분을 들으며 오히려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법이 모든 것을 한 번에 완벽하게 담아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강연자 스스로 숨기지 않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12년 만에 어렵게 만든 법이니만큼 앞으로 더 탄탄하게 다듬어가야 한다는 과제가, 오히려 이 법이 살아있는 법이라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무대는 이제 지역, 안산이 먼저다

     

    법은 국가 전체를 규율하는 법이지만, 일상생활에서 실제로 작동하려면 지역의 조례가 뒷받침돼야 한다. 그리고 그 무대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지역으로 안산이 꼽혔다.

    사업을 추진할 때 피해자와 이해관계인의 의견을 듣는 절차를 의무화하는 조항이 담겼다. 곧 조성될 4·16생명안전공원, 그리고 안전도시 시민추진위원회가 앞으로 만들어갈 추모·회복 사업들이 이 법의 지원 안에서 이뤄질 수 있도록, 안산시 실정에 맞는 조례를 연구해 제정할 필요가 있다는 제안이 이어졌다.

    법과 조례가 있어도 이를 운영할 주체가 없으면 그저 종이에 적힌 글씨에 불과하다는 말도 나왔다. 지역에서 안전 거버넌스를 세우고 시민들의 안전 역량을 키우는 일이 중요한 과제이며, 안산에서는 이미 시민추진위원회가 그 역할을 해내고 있다는 평가도 있었다.

    이 대목에서 에디터로서 드는 생각은 이렇다. 법과 시행령은 국회와 정부의 몫이지만, 그 법을 지역에서 실제로 살아 숨 쉬게 만드는 일은 결국 우리 몫이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더해져 이 법이 세상에 나온 만큼, 안산에서 먼저 이 법이 잘 시행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람이 든다.

     


     

    질의응답 시행령 일정과 예산, 그리고 남은 쟁점

     
      /강연을 마친 강연자가 질의응답 시간, 스크린에 띄운 세월호 유가족들의 사진을 짚어가며 참석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에디터 안산사라

     

    강연 이후 참석자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시행령은 언제쯤 완성되나. 시행령 제정 기한을 정한 조항이 있는지, 언제쯤 완성된 법이 될 수 있는지를 묻는 질문에는, 법이 지난 5월 공포되었고 심사 과정에서 시행령의 방향까지 함께 논의했지만 강연 시점까지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나온 시행령안은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조사위원회 구성에 시민사회 몫이 있나. 특정 참사를 다루는 한시적 조사기구라면 피해자 대표 추천 몫을 두는 경우가 많지만, 이번 조사기구는 상설로 운영되는 성격이라 추천 대상을 특정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는 설명이었다. 다만 재난안전 분야에서 활동해온 시민사회와 유가족들의 목소리가 반영될 수 있는 인물이 참여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고 밝혔다.

    예산은 충분히 확보될 수 있나. 상설 조사기구 운영에 필요한 예산은 일반회계에서 편성되는 것이라 확보에 큰 어려움은 없을 것으로 본다는 답이 나왔다. 유가족과 시민사회가 세월호 참사 12주기 이전 제정을 요청했던 이유 중 하나도 각 부처의 예산 편성 시점과 맞물려 있었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중대재해처벌법과의 관계는. 산업현장에서 발생하는 사고에 이미 적용되는 중대재해처벌법과 생명안전기본법이 어떻게 함께 작동하는지를 묻는 질문에는, 구체적인 사례를 짚어가며 추가 설명이 이어졌다.

    질문들을 듣고 있자니, 이 자리에 모인 분들이 단순히 강연을 '듣는' 입장이 아니라 이미 이 법을 '어떻게 써먹을지'를 고민하는 입장이라는 게 느껴졌다. 시행령, 예산, 안전약자 범위처럼 구체적이고 실무적인 질문들이 이어졌다는 것 자체가, 안산이 이 법을 그저 뉴스로 흘려보내지 않고 있다는 증거로 보였다.

     


     

    나오며 에디터의 생각

     

    강연을 들으며 내내 든 생각은, 12년 만에 만들어진 법인 만큼 앞으로 잘 만들어지고 잘 시행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번 법 제정으로 유가족분들은 조금이나마 위안을 받으셨을 테지만, 정작 시행령을 채우고 지역 조례로 구체화하는, 앞으로 풀어가야 할 숙제가 더 크게 남아 있다는 느낌이 강연 내내 떠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시작이 반이라고 했다. 오랜 시간을 들여 겨우 결실을 맺은 법인 만큼, 앞으로는 더 탄탄한 법으로 자라나기를 바란다. 이 법이 통과되기까지 유가족과 시민사회, 그리고 국회의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더해졌다는 것을 이번 강연을 통해 새삼 확인할 수 있었고, 그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안산에서 먼저 이 법이 잘 시행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본다.

    법은 국회가 만들었지만, 그 법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일은 결국 지역에서, 우리 손으로 해나가야 할 몫이다. 이번 시민추진위원회 전체회의가 그 시작점이 되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맺는다.

     
     
    세월호 12년, '생명안전기본법'이 열어젖힌 시간 : 안산이 이어가야 할 이야기
    안산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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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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