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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어 통역사는 손으로 말하는 사람들과 입으로 말하는 사람들 사이의 다리가 된다. 한국수어를 제1 언어로 사용하는 농인들과, 한국어를 제1 언어로 사용하는 청인 사이에서 그들은 단어와 표정, 침묵마저 언어로 바꾸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 다리 위에 또 다른 다리가 존재한다면? 바로 ‘농(聾) 통역사’이다. 공식 명칭은 ‘청각장애인 통역사’이지만, 현장에서는 농 통역사라 불린다. 이들은 청인 통역사조차 채 다 담아내지 못하는 농인의 삶과 언어, 그 미묘한 숨결을 대신 읽고, 대신 전한다.
     
    농 통역사는 모든 농인을 위한 통역자이다. 왜냐하면 모든 농인이 수어를 완전하게 구사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글로 대화하고, 어떤 이는 입 모양으로 말하고, 또 어떤 이는 오직 눈빛으로 세상을 받아들인다. 농인의 언어는 하나로 묶을 수 없다. 유년기의 언어 환경, 교육, 가족, 그리고 농 사회와의 연결 여부에 따라 언어의 형태도, 깊이도 달라진다. 그래서 농 통역사는 단순한 ‘전달자’가 아니라, 마음의 결을 어루만지는 소통의 안내자다.
     
    그런 길을 걷는 한 사람, 박수진. 그는 두 아이의 엄마이고, 안산농아인협회 간사이며, 무엇보다도 자신의 이야기를 잃지 않은 한 명의 ‘나’다. 이 글은 장애에 대한 담론이 아니라,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고, 성장의 기록이며, ‘엄마’라는 말이 품고 있는 깊이에 대한 증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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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산농아인협회 간사 박수진 / 출처: 박수진 님 제공
     
     
    
    나는 농아인입니다.
    나는 손으로 말하고, 눈으로 듣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입술로 소리를 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내 삶을 고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 고요 속에서 너무나도 분명한 울림을 들으며 살아왔습니다. 그 울림은 언제나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언제나 ‘엄마’라는 이름으로 다가왔습니다.
     
    나는 한 번도 혼자라고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누군가의 딸이었고, 누군가의 동생이었고, 누군가의 엄마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빠의 손 편지, 아빠의 눈물, 그리고 엄마의 수많은 메모. 말 대신 건네받은 글자들은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스며들었고, 내 삶을 꿰뚫는 선이 되었습니다.
     
    내가 두 살 무렵이었을 거예요. 말을 좀 늦게 배운다는 것 외에는 그저 귀엽고 예쁜 막내딸이었어요. 어느 평범한 날, 나는 거실에서 놀고 있었고, 그 뒤에서 컵이 떨어졌습니다. 집 안은 순간 정적이 흘렀고, 모두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습니다. 그런데 나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어요. 소리를 듣지 못했던 것이죠.
     
    그날 이후, 부모님은 병원을 전전하며 검사를 받으셨고, 결국 의사의 입에서 ‘청각장애’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그 순간, 부모님은 눈앞이 깜깜했다고 해요. 저는 변한 게 없었지만, 세상이 저를 다르게 보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습니다.
     
     
    
    두 살 박수진 님 / 출처: 박수진 님 제공
     
    
    내 고향은 부산입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방파제에 갔던 기억이 또렷이 남아있어요. 바다를 바라보던 아버지의 손이 내 쪽으로 뻗어왔고, 나는 그 손을 잡았어요. 아버지는 나를 번쩍 들어 올려 안으시고, 이마를 맞대며 웃으셨어요. 그리고 천천히 방파제 아래로 걸어 내려갔죠. 나는 아빠 품에 있어도 넘실거리는 파도가, 얼굴에 날리는 바닷물이 무서웠어요. 그 순간, 나는 입을 열어 처음으로 소리를 냈어요.
     
    “아빠.”
     
    아버지는 저의 목소리를 듣고,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어요. 그리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 앞에서 펑펑 울었습니다. 훗날 아버지에게 물었어요. 그날, 방파제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아버지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네가 살아갈 앞날이 너무 걱정돼서… 바보처럼 같이 죽으러 간 거였다. 그런데 네가 '아빠'라고 불러서… 정신이 번쩍 들었지.”
     
    아버지는 어린 내게 세상의 소리를 들려주고 싶어 하셨어요. 그래서 병원에 보내 구화 훈련을 시켰습니다. 휴지를 입에 대고 불어 찢는 연습을 매일 같이했어요. 휴지가 찢어지지 않으면, 집에 돌아갈 수 없었죠. 나는 그 시간이 괴로웠고, 슬펐어요. 무언가를 말해야 했지만, 무슨 뜻인지 몰랐고, 들리지 않는 소리를 흉내 내야만 했어요. 입술은 움직였지만, 마음은 굳게 닫혔어요.
     
    * 구화인
    모든 청각장애인이 농인은 아닙니다.
    유년기에 청각장애가 생긴 사람 중
    ①보청기·인공와우 등 청각 보조 장치를 사용하거나, 대화 상대방 입술의 움직임을 읽어서 상대방의 발화를 파악하고
    ②발성 훈련을 하여 음성언어로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을 구화인이라고 합니다.
     
    구화인은 청능훈련·구화법·발성 훈련 등을 통해 한국어를 제1 언어로 사용하는 것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
    
    그러던 어느 날, 부모님은 이혼하셨고, 나는 생모의 손을 잡고 서울로 이사했어요. 이유는 몰랐지만, 오빠와 함께 낯선 도시에 전학을 가게 되었죠. 학교에서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고, 수업 시간은 고통이었어요. 청인들과 함께하는 수업 시간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저는 바보처럼 앉아만 있어야 했죠. 하지만 쉬는 시간에는 달랐어요. 친구들과 뛰어다니며 재미있게 놀았죠. 쉬는 시간만 기다리는 무의미한 학교생활, 초등학교 3학년 때였어요. 선생님이 장래 희망을 적어 내라는 것에요. 저는 장래 희망이라는 단어의 뜻도 몰랐죠. 가만히 앉아 있는 저에게 선생님은 직접 저의 장래 희망을 적었어요.
     
    ‘왕자님과 결혼하기.’
     
    저도 모르는 저의 장래 희망은 왕자님과 결혼이 되었죠. 한글도 모르는 저는 멍청히 앉아서 쉬는 시간만을 기다리는 학교가 그래도 좋았어요. 나는 그저 조용히 앉아 있다가, 쉬는 시간이 되면 친구들과 뛰어놀고, 청소하고, 다시 조용히 앉아 있는 그런 아이였습니다. 공부는 못했지만, 청소는 누구보다 잘했죠. 그래서일까요? 선생님은 나를 안쓰럽게 여기셨고, 생모와 상의해 나를 농아학교로 전학 보냈어요.
     
     
    서울 농아학교 운동장에서 / 출처: 박수진 님 제공
    
    
    농아학교는 내게 새로운 세상이었습니다. 나처럼 손으로 말하고, 눈으로 듣는 친구들이 이렇게 많다니! 처음으로 ‘같다’라는 감정을 느꼈습니다. 기숙사 생활도 즐거웠어요. 밤늦도록 속닥속닥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수어로 수다를 떨었죠. 나도 평범한 아이였다는 것을 그곳에서 처음 알았습니다. 기숙사에서 생활하다 주말이면 집으로 갔어요. 보통 오빠가 데리러 왔죠. 어느 날 오빠가 저에게 묻더군요.
     
    “수진아, 돈 있니?”
     
    저는 많지 않지만, 학교에서 주는 용돈이 있었어요. 가끔 용돈을 모아서 오빠에게 주곤 했죠. 나에게 돈이 있냐고 물었던 그날, 오빠는 며칠을 굶은 상태였어요. 생모의 방임으로 오빠는 혼자 지내는 날이 많았어요. 저는 생모에게 부산 할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떼를 썼어요. 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하면 보내주지 않겠죠. 그래서 할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꾀를 썼죠. 생모는 마지못해 오빠와 저를 부산에 다녀오라고 허락을 해줬죠.
    부산에서 만난 아빠는 우리를 보고 눈물을 흘렸어요. 그날 이후, 지루한 소송 끝에 오빠와 저는 아빠와 함께 살기로 했죠. 그때 제 나이가 초등학교 6학년이었어요. 그 당시 아빠는 대전에서 생활하고 있었어요. 대전 아빠 집에는 처음 보는 언니가 있었어요.
     
    “이제부터 언니가 아니라 엄마라고 불러.”
     
    나는 그 말을 듣고 마음을 닫았어요. 나에게는 이미 생모가 있었으니까요. 그녀를 무시했고, 눈도 마주치지 않았어요. 심지어 아빠에게 거짓말을 했어요.
     
    “그 언니가 날 괴롭혀.”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생리가 터졌어요. 너무나 무서웠죠. 화장실에 숨어 울고 있는 저에게 언니는 달려왔어요. 회사에서 집까지 한달음에 달려와 저를 구해주셨죠. 생리대 사용법부터 모든 것을 알려주신 언니는 그날부터 저에게 엄마가 되었답니다.
    
     
    중학생 박수진 가족 사진 / 출처: 박수진 님 제공
     
    
    아이를 낳고 병원 침대에 누워 있을 때, 나는 엄마에게 조심스럽게 물었어요.
    “엄마는 왜, 아이를 낳지 않았어?”
    엄마는 내 곁에 누워 잠든 아기를 바라보며 말했어요.
    “너희들을 본 순간 알았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선물이라고. 하나님이 이미 두 명이나 아이를 주셨는데, 또 아이를 낳을 필요가 있을까?”
     
    제가 고등학생 무렵이었을까요? 버스 정류장에서 엄마와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죠. 그때, 곁에 앉아 있던 아주머니가 나에게 물었죠. “너는 어느 나라에서 왔니?” 제가 어눌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외국인인 줄 알았나 봐요? 엄마는 정색하며 아주머니에게 말했죠. “제 딸이에요.” 저는 분명 엄마의 입술에서 나오는 ‘제 딸이에요’라는 말을 읽었어요. 그때 저도 “우리 엄마예요.”라고 이야기해야 했는데 못 했어요. 죄송해요. 하지만 엄마의 ‘제 딸이에요’라는 말은 저에게 힘이 되었어요. 내가 엄마의 딸이구나. 그때부터 엄마는 나에게 하나밖에 없는 나의 엄마 그리고 서울 엄마는 생모가 되었어요.
     
    엄마는 수많은 메모와 편지를 내게 남겨주셨습니다. 학교에 다녀오면 냉장고에 붙은 메모가 반겨주었고, 서랍 안에는 언제나 손 편지가 기다리고 있었죠. 내가 힘들 때마다, 외로울 때마다, 엄마는 어떻게 알았는지 편지를 남겼어요. 그 글들은 내가 버리지 못한 사랑의 기록입니다.
     
     
    
    가족들이 남긴 메모와 편지 /  출처: 박수진 님 제공
     
     
    내가 생각이 짧아서 엄마가 수어를 배우겠다고 했을 때, 저는 싫다고 했죠. 엄마가 수어를 알면 간섭과 잔소리가 더 심해질까 봐 그랬어요. 지금 생각하면 제가 철이 없었어요. 엄마와 수어를 함께 배웠다면 지금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 텐데요. 그리고 엄마, 나는 한 번도 엄마가 나를 낳지 않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엄마는 언제나 나의 엄마였고, 엄마의 메모 한 장, 편지 한 줄이 나를 살아가게 했어요. 내가 흔들릴 때마다, 엄마의 글이 나를 붙잡아줬어요. 그러니까 저에게 미안해하지 말아요. 엄마,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마지막으로 엄마에게 보내는 편지로 글을 마칠까 합니다.
     
     
    20살 박수진 가족 사진 / 출처: 박수진 님 제공

     

     

    사랑하는 엄마에게

    엄마를 처음 만난 건 아마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였을 거예요. 그 시절 나는 엄마를 “언니”라고 불렀지요. 상봉 국민학교에 다니던 나는 종종 아빠 회사를 찾았고, 그때마다 엄마는 아이스크림을 사주고, 시원한 물도 건네주셨어요. 그런 순간들이 너무 좋아서, 나는 매번 엄마가 있는 그 공간을 향해 들떴던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기곤 했어요. 그때의 나는 몰랐어요. 그 ‘언니’가 내 인생에서 가장 따뜻한 존재가 될 거라는걸.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내가 아빠와 함께 지내게 되면서 그 ‘언니’가 어느 날 갑자기 ‘엄마’가 되었을 때, 어린 마음에는 그 변화가 너무 낯설고 어색했어요. 좋아했던 만큼 당황스러웠고, 그만큼 거리를 두게 되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런 내 마음을 알았는지 몰라도, 엄마는 단 한 번도 내게서 멀어지지 않았어요. 언제나 다정했고, 꾸준했고, 따뜻했어요. 나를 기다려주고, 말없이 품어줬어요. 그래서 나도 모르게, 정말 자연스럽게 엄마를 사랑하게 되었어요.

     

    기억나요? 내가 흰 바지를 입고 학교에 갔다가, 월경 자국이 묻은 줄도 모르고 당황하며 집에 돌아왔던 날. 그날 엄마는 회사 일을 잠시 미뤄두고 나를 향해 달려와 주셨어요.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다정하게, 월경에 관해 이야기해 주고, 나를 부드럽게 감싸안아 줬어요. 처음 겪는 몸의 변화에 놀란 나에게 엄마는, 생리보다 더 큰 따뜻함을 가르쳐 주셨죠.

     

    감기로 앓아누웠을 때도, 몸살로 말 한마디 못 할 때도, 엄마는 언제나 내 곁에 있었어요. 병원도 함께 가고, 약도 챙겨주고, 말없이 손을 잡아줬어요. 내가 엄마 껌딱지처럼 들러붙었던 시절, 엄마는 아마 많이 피곤했을 거예요. 그런데도 엄마는 지친 내색 한번 없이 나를 안아줬어요. 그 모든 순간에, 지금이라도 늦게나마 말하고 싶어요. 정말 고맙고, 정말 미안해요.

     

    요즘 나는 다시 출근을 시작했어요. 아침마다 전쟁처럼 바쁜 하루가 시작되고, 나도 정신없이 준비하면서 준혁이와 하나까지 챙겨야 하니 숨 돌릴 틈이 없어요. 그런데 그런 어느 날, 문득 엄마가 떠올랐어요. 엄마도 예전에 출근 준비하며, 오빠와 나를 챙기고, 매일 아침 도시락까지 싸셨잖아요. 그 모든 걸 해내면서도 내 앞에서는 늘 웃어주셨던 엄마. 그때는 왜 몰랐을까요? 왜 나만 힘들다고 여겼을까요?

     

    요즘의 나는 많이 지쳐 있어요. 준혁이는 사춘기에 접어든 중학생이고, 하나는 초등학교 1학년이라 여전히 손이 많이 가요. 남편은 직장을 옮겨 정신이 없고, 나는 사회생활을 다시 시작하며 모든 것이 낯설고 버겁기만 해요. 그런데 그런 순간마다, 이상하게 엄마가 떠올라요. 엄마를 떠올리면 이상하게 마음이 놓이고, ‘그래, 나도 할 수 있어’ 하는 용기가 생겨요. 그건 아마, 내 안에 엄마가 주신 힘이 아직도 살아 있기 때문이겠죠.

     

    엄마, 나를 그렇게 사랑해 줘서 고마워요. 내가 엄마에게 벽을 세울 때도, 뒤돌아설 때도, 엄마는 한결같이 다가와 줬어요. 그 사랑이 나를 사람으로 키우고, 지금의 엄마로 만들었어요. 그래서 나도 이젠, 엄마처럼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되고 싶어요. 할머니가 하늘나라로 떠나시던 날, 내가 할머니 앞에서 약속했었죠.

     

    “할머니, 엄마는 제가 꼭 잘 챙길 테니까 걱정 마시고 편하게 쉬세요.”

     

    그 약속, 변하지 않을 거예요. 어떤 순간에도 나는 그 약속을 지킬 거예요. 결혼하고, 아이 낳고 살아가는 동안 엄마는 내게 늘 멘토가 되어주었고, 따뜻한 위로가 되어주었어요. 준혁이 키우며 막막했던 때, 조언해 주고 힘이 되어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우리 아빠요. 성격이 쉽지 않잖아요. 그런 아빠 옆에서 묵묵히 함께해 줘서, 아빠의 빈틈을 채워줘서, 정말 감사해요. 앞으로는 엄마께 더 자주 안부 전화도 드리고, 더 자주 웃게 해드릴게요. 말로만이 아닌 마음으로, 삶으로 효도할게요.

    2025. 04. 05.

    사랑합니다. 우리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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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덧붙이며
     
    이 글을 읽는 여러분께 조심스레 바라봅니다. 혹시라도 농아인을 향한 낯선 시선이 있었다면, 이 글을 통해 마음이 조금은 바뀌었기를 바랍니다. 농아인도 여러분과 다르지 않은 딸이고, 엄마이고, 아내입니다. 우리는 ‘소리 없이’ 살아가지만, 그 안에는 세상의 어떤 언어보다 깊고 진한 사랑이 있습니다. 제 글에서 그 사랑을 느끼셨나요?
    
     

     

     

    엄마의 메모가 들려주는 말 – 농 통역사 박수진의 이야기
    윤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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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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