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남오물풍선 살포로 인한 위기와 그 해결책
이바다 대표(평화누리 상임대표)
지난 6월 26일 임진각은 한여름 퇴약볕이 내리쬐는 속에서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관광 나온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그중에는 외국에서 단체여행을 온 사람들에게 임진각을 소개하는 그룹도 눈에 띄었다. 설명을 듣는 외국인들은 ‘남북 분단의 현장’이 신기한 듯 귀 기울여 듣는 모습이었다.
오전 11시가 되자 30여명의 시민들이 망배단 계단으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이날 ‘대북전단살포 즉각 중단 촉구 기자회견’을 위해 고양·파주 지역에서 온 시민단체와 종교단체 회원들이었다. 이 기자회견 모습에 외국 관광객들은 더 큰 호기심을 보였다.
그날 기자회견은 최근 북한 대남오물풍선 살포로 인한 한반도 정세의 불안과 접경지역 주민들의 고통을 알리고 그 해결을 촉구하고자 고양·파주 지역 24개 시민사회단체가 주관한 것이었다. 이 기자회견을 통해 시민들이 주장하는 내용을 토대로 대북전단풍선과 대남오물풍선 살포의 상관관계와 그로 인해 촉발된 한반도 위기 그리고 접경지역 시민의 고통을 멈추기 위해 시민들이 제시하는 요구를 살펴보고자 한다.
임진각 망배단 기자회견 2024. 6. 26.
1. 북한 대남오물풍선 살포의 원인
‘자유북한운동연합’(대표 박상학)을 주축으로 한 탈북민단체는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대북전단살포를 지속적으로 행해 왔다. 이로 인해 접경지역에서의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고, 지역 주민들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으며 남북관계 악화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쳐왔다. 그러던 중 2018년 체결된 9.19군사합의로 인해 남북간 첨예한 군사적 갈등, 특히 접경지역에서의 우발적 충돌 위험은 한동안 잦아들었으며 그에 따라 접경지역 주민들은 오랜만에 평온한 일상을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지난 5월 13일 박상학 대표는 “10일 밤 11시쯤 대형풍선 20개를 인천 강화도에서 북쪽으로 보냈다”고 발표했다. 이에 대해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은 조선중앙통신에 발표한 담화에서 “ 남쪽 국경과 일부 중심지대에서 대한민국 쓰레기들이 날린 대형풍선이 발견됐다”며 “처참하고 기막힌 대가를 각오하라”며 강력 경고했다.
이 경고 이후 북한은 5월 28일부터 현재까지 12차례에 걸쳐 오물과 분뇨, 생활쓰레기를 담은 대형 오물풍선을 남쪽으로 살포해 오고 있다. 이로써 접경지역에서의 짧았던 평화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으며 9.19군사합의 폐기로 인해 접경지역내 군사활동 재개, 대북 확성기 방송 재개 등으로 군사적 긴장이 다시 고조되었다.
이렇듯 북한의 대남오물풍선이 살포돼 한동안 유지됐던 접경지역내 평화가 사라지게 된 직접적 원인은 탈북민단체의 대북전단 살포라고 할 수 있다.
2. 현 정부의 대북전단 살포 방치
문재인 정부는 대북전단 내용이 “외설적 선전 및 가짜뉴스로 채워졌다”며 2020년 12월 대북전단금지법인 ‘남북관계 발전에 관한 법률’을 만들어 대북전단 살포 단체들에 대한 형사처벌이 가능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상당기간 대북전단 살포는 중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2023년 9월 26일 이 법에 대해 일부 조항이 헌법에 위반된다는 결정을 내렸다. 헌재의 판결은 대북전단 살포금지법의 입법 목적은 정당하지만 국가형벌권까지 동원했기에 과잉금지 원칙에 위배됐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보수언론들과 소위 우파들은 이 위헌 판결을 편의적으로 해석해 대북전단살포에 대한 수사와 처벌이 표현의 자유와 기본권을 침해한다고 주장한다. 이 결정을 계기로 탈북단체의 대북전단살포는 재개되었으며, 이에 윤석열 정부는 대북전단살포를 법으로 금지하거나 처벌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며 사태를 방치하고 있다.
3. 대북전단 내용과 문제점
대북전단을 살포하는 단체들은 이 행위가 북한의 인권 개선과 민주화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대북 전단의 내용을 보면 리설주에 대한 외설적 합성 사진과 자극적이고 저급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김정은에 대한 인신공격과 대안없이 북한 당국과 맞서 싸우라는 선동은 오히려 북한 주민들의 반감만 불러일으킬 수 있다.
또한 풍선을 이용해 날려 보내는 대북전단은 실제로 북한 땅에 떨어질 확률이 높지 않다. 한반도의 지리적 특성상 사계절 내내 북서쪽에서 불어오는 편서풍 영향으로 풍선이 북쪽으로 향할 가능성이 적기 때문이다.
4. 강대강 대응으로 군사적 대결 격화
7월 26일 현재까지 북한의 대남오물풍선 살포는 11차에 걸쳐 진행되고 있으며 이에 대해 정부는 “9·19 군사합의” 폐기로 맞대응하고 있다. “9·19 군사합의”는 2018년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 정상회담의 결과물로, 지상·해상·공중에서 군사적 긴장과 충돌의 원인인 ‘일체의 적대행위’를 전면 중지하는 내용의 남북한 간의 합의이다. 이번 ‘9·19 군사합의’ 폐기로 대북 확성기 방송이 재개된 바 있으며, 군은 군사분계선 일대에서 각종 군사훈련을 재개할 수 있게 됐다. 이에 따라 접경지역에서의 우발적 도발에 의한 군사적 충돌이 현실화될 가능성이 커졌다.
5. 한반도 정세 악화와 접경지역 시민의 삶 피페화
현재 북·러 관계의 심화와 미·중 갈등으로 인해 한반도 정세는 매우 불안정한 상황에 직면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남쪽 탈북단체 중심의 대북전단살포로 인한 북한 당국의 대남오염풍선 살포로 촉발되는 위기는 남북간의 불필요한 갈등을 증폭시켜 전쟁위협으로까지 나아가고 있다. 더불어 접경지역 주민들에게는 일상생활의 기본적인 생활권마저 침해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6. 시민단체들의 제안
이날 기자회견에 담긴 시민들의 제안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대북전단풍선 살포를 즉각 중단하라
풍선을 이용한 대북전단살포는 남북간의 불필요한 긴장을 조장하고, 한반도 평화에 악영향을 끼칠 뿐 아니라 접경지역 주민들의 삶을 위협하는 행위이다. 대북전단살포는 한반도 평화를 위협하고 전쟁 위기를 가속화시키는 일에 다름아님을 깨닫고 즉각 중단해야 한다.
(2) 접경지역 주민의 안전을 보장하라
접경지역 주민들이 불안없이 생활할 수 있도록 정부와 경기도는 물론 관련 당국에서는 대북전단살포 행위를 철지히 단속하고, 주민들의 안전과 평화를 보장하기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특히 풍선을 활용한 대북전단살포 행위는 ‘항공안전법’ 위반에 해당된다고 확인된 만큼 수사당국은 신속한 수사로 관련법 위반 행위가 중단되도록 해야 한다.
(3) 평화적인 방법을 통한 남북대화를 재개하라
남북관계의 개선을 위해서는 대화를 통한 평화적인 해결만이 최선의 방법이다. 대북전단살포와 같이 북측을 자극하는 방법보다는 남북 상호이해를 기반으로 대화에 나서야 한다.
7. 신뢰구축이 최우선
대남오물풍선 살포를 막는 방법은 자명하고 간단하다. 그 직접적 원인이 된 대북전단살포를 즉각 중단시켜야 한다. 상대를 자극하고 갈등을 부추키는 방식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그 상황을 이용해 자기가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려는 얄팍한 방책에 불과하며 그 결과는 공멸이다.
남북문제는 신뢰구축이 최우선이다. 대남오물풍선 문제 역시 남북한 신뢰구축 선상에서 되짚어봐야 하고, 그 점에 심각한 손상이 야기됐다는 것이 확인된 만큼 상황이 아무리 어렵다해도 신뢰를 다시 쌓는 일에 매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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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6
‘6.15 공동선언실천 경기중부본부’에서 40여 명의 회원이
‘통일 힐링 걷기’의 일환으로
교동도(강화도 소재) 평화기행을 하였다.
‘6.15 공동선언실천 경기중부본부’는 안양,군포,의왕 지역 시민이
평화와 통일 열망을 담아내고자 하는 기치로 6.15남북공동선언 이후
선언이 제대로 이행되어 한반도 평화와 남북공동 번영 및 통일로 나아가야 한다는 취지로
지역주민과 정당, 종교, 시민사회단체가 폭넓게 참여하는 조직이다.
‘통일 힐링 걷기’의 주목적은 반전 자주평화이다.
매년 4월에 시작하여 연중 계속 행사가 진행된다.
주요내용은 두가지가 있다. 첫 번째로는 시민들이 일상 속에서 매주 6만보를 걷고 평화 인증샷을 공유하며, 두 번째로는 매월 넷째 주 토요일 오전에 다 같이 모여서 걷기를 정례화 하고 있다.
척박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未知(미지 : 알지 못하는)의
마을을 찾아 나선다는 것은, 삶의 소소한 기쁨이자 나를 재충전하여
주는 원동력이다.
금번 행선지는 강화도 서북단에 위치한 교동도이며,
교동도는 한국전쟁(1950.6.25)때
황해도 연백지방 주민 다수가 피난 온 곳이다.
교동도는 고려시대 때부터 왕족의 유배지였다.
고려 21대 희종 등 무려 다섯 분의 왕이 유배되기도 하였다.
조선의 10대 나이의 왕, 연산군의 유배지이기도 하다.
교동도 역사기행의 백미는 맛집이 모여있는 “대룡시장”이다.
1950~1953년 전쟁 중에 피난 오신 황해도 연백지방 분들이
고향의 시장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여 시장을 만들었다고 한다.
식당, 다방, 상점, 이발관, 양복점, 방앗간, 철물점 등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이 꽤 정겹다.
이곳에 오면 꼭 맛보아야 한다는 연백지방의 아픈 사연이 담긴
“강아지떡”은 별미라고 한다.
쌀을 강제 수탈 당하던 일제 강점기 때에, 강아지 모양으로
만들어 몰래 마을 사람들과 나누어 먹었다고 전해 내려온다.
교동도는 수도권역 최고의 볼거리가 있는 여행지라고 정평이 나있다.
맑은 날이면 황해도 연백땅이 보여 실향민들을 눈물짓게 한다.
유유히 흐르는 강을 끼고 남한과 북한을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분단의 아픔을 모르는 갈매기가 되었으면...
정겨운 4월의 훈풍을 온몸으로 느끼며, 애써 슬픔을 감추고
오늘도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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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07
● 코리안 디아스포라와 일본 내 항일 독립운동
‘디아스포라’는 자의든, 타의든 거주한 땅을 떠나 다른 곳으로 생활 터전을 옮기는 것을 말하며, 보통 ‘난민’을 지칭하기도 한다. ‘난민’은 이주한 곳에서 법적 보호는커녕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되는 소수자의 삶을 살게 된다. 현재에도 내전이나 전쟁으로 디아스포라가 생겨나고 있지만 대표적인 디아스포라는 재일조선인이다.
한일합방 후 약 200만 명(1945년 기준)의 조선인은 먹고살기 위해, 또는 일제의 강제 동원으로 일본으로 생활터를 옮겨왔다. 군수공장과 탄광, 철도 및 비행장 건설에 많은 조선인이 동원되었으며, 내지인보다 훨씬 싼 임금과 차별로 일본 내 최하층민이 되었다. 또한 해방된 조국에서조차 그들은 잊혀진 사람들이었다.
오는 9월 1일 간토(관동)대지진 100주년을 맞아 7월 4일부터 7월 8일까지 재일조선인의 역사를 알아보고 일본 내 항일독립운동 사적지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1923년 9월 1일 발생한 간토대지진은 일본 도쿄도를 포함한 관동지방에 대규모의 지진 발생과 9월 3일까지 3일간 지속된 화재로 약 10만여 명의 사망자와 200만여 명의 이재민이 생겼다. 그리고 이 아비규환 속에서 자연재해가 아닌 조선인을 상대로 한 학살이 함께 벌어졌다.
지진이 일어나자 흉흉한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일제는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 ‘형무소에 있는 조선인이 탈출하여 일본사람을 죽이고 있다.’라는 유언비어를 의도적으로 퍼트려 군대가 아닌 자경단이 조선인 학살의 주범이 되게 했다. 더구나 이러한 학살은 어른뿐 아니라 아이들도 가담했으며 약 6천~7천 명의 조선인이 비참하게 죽어갔다. 또한 오사카, 교토, 가나자와, 도쿄지역을 돌며 일본에 대한 항일독립운동의 흔적을 찾아갔다.
- 오사카지역 : 1907년 조선촌이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츠루하시쵸157번지 에 ‘초센쵸’라는 한인 밀집 지역이 만들어진 후에 츠루하시역 부근에 한인 시장이 만들어졌다. 오사카에 거주했던 한인들은 텐노지 공원 등지에서 일제의 조선 총독 폭압 정치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이거나 노동운동 및 사회운동을 통한 항일운동을 끊임없이 했다.
- 교토지역 : 일제강점기 교토대학과 도시샤 대학을 중심으로 조선 청년들이 유학하여 조직을 결성하여 민족주의 운동을 펼쳤던 곳이다. 특히 도시샤 대학에는 윤동주. 정지용 시비가 있으며 이총(비총)공원에는 정유재란 당시 왜군이 전리품으로 베어간 조선군의 코와 귀를 매장한 무덤이 있다.
- 가나자와 지역 : 일제강점기 일본 육군 형무소가 있었으며 이곳은 상하이에서 의거를 일으킨 윤봉길 의사가 압송되어 순국한 곳이다. 또한 일제가 사형 후 몰래 암매장한 곳이며 이곳에는 ‘윤봉길의사 암장지적비. 순국기념비’가 있다. 많은 조선인 노동자가 동원되었던 ‘누카다니’ 채석장과 일본의 태평양 전쟁을 미화하는 ‘대동아성전대비’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 도쿄 지역 : 도쿄는 일본의 수도이자 조선의 많은 지식인이 유학하고 독립투사들이 잠입하여 활발한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한 곳이다. 이곳에는 ‘2.8독립선언기념비’와 2,8독립만세운동 당시 한인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발표했던 ‘조선기독교청년회관(YWCA)터가 있다. 그리고 김지섭, 서상한, 이봉창, 양근한 의사의 의거지가 있으며 이봉창 의사가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순국한 ‘이치가야 형무소’터가 있다.
짧은 일정이었지만 재일조선인 차별의 역사와 ‘윤봉길 의사’, ‘윤동주’, ‘간토대지진의 희생자’의 흔적을 찾아보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이며, ‘우리 사회가 가장 우선시해야 하는 가치는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 우토로 마을 – 차별을 넘어 평화를 꿈꾸다.
첫 비행기를 타고 오사카 간사이 공항에 도착하여 바로 ‘우토로 마을’로 향했다. 우토로 마을은 일제가 전쟁 중 1941년 교토에 군 비행장을 건설하기 위해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이 만든 재일조선인 마을이다. ‘함바’라고 불리는 임시 합숙소에 모여 살면서 시작되었으며, 여기서 일하면 징병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많은 조선인이 이 마을로 모여들었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다른 지역에 살던 조선인이 우토로 마을로 이주했다. 이들은 ‘재일조선인 학교’ (우리학교)를 세우고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조선어와 전통을 가르치며 일본 정부의 오랜 폐교 압박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이어가고 있다.
일본 내 최하층민과 재일조선인이 사는 우토로 마을을 없애기 위해 일본정부는 1998년에 토지의 소유권이 없다는 이유로 강제 추방을 위한 소송을 제기했으며, 이어 2000년에 일본 최고재판소의 판결로 주민들의 강제 퇴거가 확정되었다. 이에 많은 재일조선인이 우토로를 떠났고 삶터는 무너졌으며 2015년 기준으로 이 지역에는 약 150명의 주민만 남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이 일본 및 한국 사회에 알려지면서 일본과 한국의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우토로 땅 매입을 위한 모금’ 운동과 한국 정부의 지원으로 2010년 ‘우토로 민간기금재단’을 설립하고 우토로 땅을 매입하여 재개발을 진행했고, 2018년 원주민들이 다시 들어오면서 완전한 거주지가 되었다. 그 후 2022년에는 우토로 마을의 역사를 기록한 ‘우토로 평화기념관’이 설립되어 차별과 혐오의 역사가 아닌 함께 평화를 꿈꾸는 곳이 되었다. 재일조선인 3, 4세들과 일본 시민단체 자원봉사자들이 함께 박물관에 상주하며 공존과 평화를 이야기한다.
함바(조선인 임시 숙소) / 우토로 평화기념관 전경
그리 크지 않은 3층의 우토로 평화기념관은 야외에 ‘함바(임시 숙소)’의 원형이 보존되어 있었고, 각층에 우토로 마을의 고단한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188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 1876년 강화도 늑약으로 시작되는 제국주의 열강들의 한반도 침탈 야욕에서 조선의 왕과 지배층은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을 철저히 배제했다. 자신들의 안위와 사리사욕만을 위해 행동했던 그들은 외세를 한반도에 끌어들였을 뿐만 아니라 이 땅의 진짜 주인으로 살아왔던 백성들에게 총을 겨누고 삶과 삶터를 빼앗았다.
살길을 찾아, 또는 강제로 이주당한 조선인은 바다 건너 일본에서 더 심한 차별과 혐오를 겪으며 살아가게 됐다. 그리고 그들을 향한 혐오와 차별은 110년이 지난 현재도 지속되고 있다.
● 독립운동가 ‘윤봉길 의사’ 암매장지를 가다.
서울 효창공원에 가면 4기의 독립운동가 묘소가 있다. 여기 안장된 4명의 독립운동가가 어떤 분들인지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여기엔 임시정부를 이끌었던 김구 선생의 묘소와 1933년 중국주재 일본 공사 ‘아리요시’를 암살하려다 실패한 백정기 의사, 중국 홍커우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시라카와’ 대장을 사망케 한 윤봉길 의사, 이봉창 의사가 모셔져 있다. 그리고 아직 시신을 찾지 못한 안중근 의사의 가묘가 있다.
윤봉길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홍커우공원 의거’로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홍커우공원에서 공개처형이 예정돼 있었다. 하지만 일제는 윤봉길 의사의 처형이 독립운동가와 현지 사람들에게 자극이 될까 두려워 그를 오사카 위수 형무소로 옮긴 후 사형을 집행하고자 했지만, 이곳에서 한 달 정도 독방에 감금한 후에 일본육군 제9사단 주둔지인 ‘가나자와’로 옮긴 뒤 다시 ‘미츠코지’산 육군작업장에서 사형을 집행했다.
당시 윤봉길의 거사는 중국인들의 대대적인 환대를 받게 되었고 이는 중국에 있던 임시정부와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중국의 주석 장개석은 “중국의 백만대군도 불가능한 거사를 한국의 한 젊은이가 했다.”며 임시정부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하게 되었으며 이는 조선독립 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처형 후 윤봉길의 시신을 수습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시신을 화장했다는 일제의 발표에도 1946년 임시정부는 서상한을 대표로 하는 ‘임시정부 유해발굴단’을 조직하여 재일조선인들의 도움을 받아 윤봉길 의사의 유해를 발굴하게 된다.
형틀에 양손이 묶인 채 이마 정중앙에 한 발의 총알이 박혀 절명한 윤봉길 의사의 유해는 노다산 육군 묘지 언덕과 시영묘지와의 경계에 있는 도로에 암매장하여 의도적으로 사람들이 그 위를 지나다니게 했다. 나중에 이곳은 쓰레기 집하장이 되었고, 매장지 바로 위에는 작은 소각로를 세워 유해를 찾지 못하게 방해했다. 그러나 임시정부와 재일조선인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발굴된 유해는 1946년 3월, 거사가 일어난 지 14년 만에 ‘순국의사윤봉길지구’라고 표기된 새 관에 옮겨져 고국의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책으로 읽는 역사와 직접 찾아가서 느끼는 역사는 그 무게감이 다르다.
한숨으로 호흡을 가다듬고 윤봉길 의사의 사진과 비석을 바라보니 먹먹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윤봉길 의사의 유해를 발굴한 재일조선인의 후손인 이 보여주시는 발굴 당시의 사진을 보자 곳곳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나무 괘짝과 같은 상자에 구부리고 있는 윤봉길 의사의 유해.
시신에 대한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 사진에 일제에 대한 분노와 늦게라도 고국에 안장된 것이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함께 올라왔다. 그리고 윤봉길 의사를 잊지 않고 끝까지 찾아낸 많은 재일조선인과 독립운동가, 팔십이 넘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윤봉길 의사의 업적과 더불어 독립에 대한 의지를 알리는 재일조선인 2세분의 헌신에 고개를 숙이게 된다.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로 하루아침에 해방이 된 것이 아니다.
사형집행 / 발굴된 윤봉길 의사의 유해 / 윤봉길 의사의 생전사진
● 강제동원의 현장 – 누카다니 채석장
더운 날씨를 피해 아침 일찍 ‘누카다니 채석장’으로 출발했다. 버스에서 내려 대나무가 우거진 숲을 걸어 한참을 올라가다 보니 숲길 양쪽에 여러 개의 동굴이 보였다. 이 중에는 인공적으로 만든 동굴도 보였는데 숲속에 웬 인공동굴인가 물어봤더니 연합군의 눈을 피해 전쟁물자를 만들기 위해서란다.
에도 시기부터 쇼와 초기까지 ‘누카다니’ 산간 지역에는 채석장이 수십여 개 운영되었고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미쓰비시 중공업이 항공기 엔진공장의 건설을 계획하였고 기계설비가 일부 설치되었다.
대표적인 전범 기업인 미쓰비시는 일본 제국주의 침략 확대와 함께 성장한 독점 재벌이다. “미쓰비시 있는 곳에 전쟁이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미쓰비시의 광업과 중공업은 전쟁을 수행하는데 핵심적인 요소였다. 한 예로 나가사키에 있는 미쓰비시 조선소에서는 당시 군함 82척과 어뢰 1만 7천 개가 생산되었다.
이러한 군수공장 시설 건설에는 일본 노동자보다 훨씬 싼 임금으로 강도 높은 노동에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가 많았으며 미쓰비시 나가사키 조선소에도 약 6,000 천 명의 조선인이 강제 연행되어 노예와 같은 노동을 강요당하다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됐을 때 많은 조선인이 원폭 피해를 당했다. 그러나 현재까지 미쓰비시는 원폭 피해를 입은 조선인을 찾아낼 의지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강제 동원까지 부인하고 있는 현실이다.
누카다니 채석장 소개글 / 미쓰비시 군수공장 터
채석장 올라가는 길, 산양인지 일본 사슴인지 의견이 분분했지만 홀연히 나타나 오랫동안 기다려왔다는 듯이 채석장을 올라가는 우리를 미동도 없이 한참을 내려다본다. 뭔가 익숙하게 전해오는 교감과 떨림이 어쩌면 식민지 조선 청년의 환생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보았다.
● 일본 우익의 상징 – 대동아성전대비, 야스쿠니 신사
1941년 12월 8일 미국의 진주만 공습으로 2차 세계대전은 새로운 양상을 맞게 된다. 진주만 공습부터 1945년 9월 2일까지 계속된 이 전쟁을 일본은 ‘대동아전쟁’이라고 한다.
반격에 나선 미국은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승리를 하고 1944년 사이판, 필리핀을 탈환한데 이어 1945년 4월 오키나와에 상륙하여 일본 본토에 공습을 가했다. 결사 항전을 외치던 일본이었지만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면서 무조건 항복에 조인하였다.
서양 제국주의에 맞서 동양의 평화를 지키기 위한 전쟁이었다며 이 전쟁을 미화하고 정당화시키는 대표적인 상징물은 일본 이시카와현 가나지와시 이시카와 호국 신사에 세워진 ‘대동아성전대비’와 도쿄에 있는 ‘야스쿠니 신사’이다.
‘대동아성전대비’는 폭 4m, 높이 12m로 2000년 8월 ‘일본을 지키는 모임’이라는 우익단체가 주축이 되어 건립되었으며 정면에는 일장기 모양의 붉은 원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전 세계는 천황 아래 한 집안’이라는 뜻의 ‘팔광위우’가 적혀 있다. 또한 이 비에는 대동아전쟁에서 천왕을 위해 죽은 이들의 이름과 단체가 새겨지는데 1945년 종전 직전에 전사한 조선인 7명의 이름과 조선계로 추정되는 정체불명의 단체 6개의 이름이 유족의 동의도 받지 않고 무단으로 새겨져 있다.
일본 제국주의 상징인 야스쿠니 신사는 1853년 개항 이후부터 태평양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전쟁에서 숨진 246만 명의 전몰자를 신격으로 추앙하며 제사를 지내는 장소이기 때문에 일본문화 혹은 일본 정신의 핵심이 되고 있다. 특히 이곳엔 태평양 전쟁의 1급 전범 14명과 조선인도 합사되어 있는데 한국 유족이 명단에서 빼달라고 요구해도 천왕을 위해 전사한 사람들이라며 일본 정부는 거절하고 있다.
그러나 막상 가보니 논란의 중심인 ‘야스쿠니 신사’보다 옆에 있는 ‘신이 노니시는 곳’이라고 불리는 ‘유슈칸 전시관’도 심각해 보였다. 가미가제를 수행했던 자살 폭격기는 물론이고 적함에 돌진하여 자폭하는 ‘인간어뢰’와 천왕을 위해 죽는다는 내용이 담긴 전사자들의 혈서 등 광적인 군국주의를 무수히 전시해 놓으며 전쟁을 미화하고 있다.
소년으로 보이는 전사자와 조선인으로 보이는 청년들의 사진 아래에는 천왕을 위해 장렬히 전사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우리는 강제 징병을 당했다고 하는데 그들은 천왕을 위해 자발적으로 전쟁을 수행했다고 한다.
대동아성전대비 / 야스쿠니 신사
● 재일조선인! 차별을 넘어 학살의 역사
간토대지진은 1923년 9월1일 간토 지방에서 일어난 대지진으로 10여만 명의 사상자와 수백만의 이재민이 발생한 사건이다. 이러한 재난으로 공포에 휩싸인 사회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일제는 재일조선인과 사회주의자들을 제물로 삼았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풀었다.” “조선인과 사회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있다.”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계엄령을 선포하고 약 6,000여 명의 조선인들을 학살했다. 이러한 학살에는 군인, 경찰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조직된 ‘자경단’에 의해 저질러졌으며, 이 자경단에는 겨우 14~15세로 보이는 소년들도 가담했으며, 조선인뿐만 아니라 ‘15엔 50전’, 이라는 단어를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오키나와인, 오사카인, 중국인도 학살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는 2차 세계대전 중 나치가 저지른 전쟁범죄인 ‘홀로코스트’에 대해 잘 알고 있지만, 일제가 같은 시기, 조선인에 저질렀던 ‘간토대학살’이나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내용은 잘 모르고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에서 허망한 죽임을 당한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일본 사회에 진상규명과 사죄를 100년 동안 꾸준히 요구하고 있는 사람들은 일본인이다. 우리가 방문한 도쿄 요코아미초 공원에는 ‘간토대지진 조선인위령비’가 세워져 매년 시민단체의 주도로 추모식을 하고 있으며 또 다른 일본 시민단체인 ‘봉선화’는 ‘조선인순국자추도비’를 세우고 이 사건을 자국의 사람들에게 알리며 일본인으로서 과거의 부끄러운 일을 반성하고 사죄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일본인들이 관리하는 이곳을 방문하고, 희생자들에게 묵념과 비석에 술을 부어드리며 많은 생각이 오갔다.
그리고, 일본지역에서 항일 독립운동하다 구속되고, 고문받는 독립운동가와 국적도 참정권도 없는 신민 조선인을 위해 노력한 일본인들도 꽤 있었다. 특히 ‘후세 다쓰지’는 일본인 변호사로 1923년 김시현 의사 등이 총독부 관공서 폭파를 계획하다 체포되자 이들의 공정한 판결을 촉구하며 변론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김지섭 의사와 영화로도 잘 알려진 박열 의사의 변론을 맡아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무죄를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1927년 조선공산당 활동으로 체포된 권오설, 강달영 등이 일제 경찰의 고문을 폭로하고 고소를 제기할 때 소송을 담당하고 일본 사회에 실상을 알렸다.
위와 같이 조국(일본)을 향해 폭탄을 던지고, 시위하는 조선 청년들을 변호하고 함께 행동한 ‘후세 다쓰지’와 간토대지진으로 희생된 재일조선인을 추모하고 조국의 만행을 알리는 ‘봉선화’와 같은 시민단체는 왜 이런 일들을 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무엇이 이들을 움직이게 했을까?
자경단 소년 / 조선인순국자추도비 / 학살현장 아라카와강변에서 설명하는 봉선화 대표
출처 : 국가보훈부
● 민족시인 윤동주, 정지용 시비
교토 시내를 지나 붉은 건물이 눈에 띄는 도시샤 대학 내에는 이 대학에 재학하며 사촌인 송몽규와 함께 민족 계몽 활동 등을 펼치다 일제에 의해 목숨을 잃은 윤동주의 시비가 있다. 이 시비는 윤동주의 항일정신을 기리며 1995년 2월 건립되었으며 그의 대표작인 ‘서시’가 친필과 함께 일본어로 번역되어 함께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10m쯤 떨어진 곳에 또 한 명의 민족시인인 ‘정지용’의 시비가 자리 잡고 있다. 시 ‘향수’로 잘 알려진 시인 ‘정지용’은 발행 당시 큰 반향이 일었던 ‘정지용 시집(1938년)을 윤동주가 항상 품에 넣고 다닐 정도로 존경하던 시인이었다. 그리고 정지용도 소문만 듣고 만난 적이 없는 윤동주의 유작인 ‘쉽게 씨워진 시’를 경향신문에 소개하며 세상에 처음 알렸으며 이후 윤동주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서문을 썼다.
월북 작가라는 이유로 한동안 우리가 잊고 있었던 정지용과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으로 불리는 윤동주는 이런 인연으로 모교인 도시샤 대학에서 시비로 나란히 기억되고 있다.
<정지용의 시를 모방한 윤동주의 습작품>
● 일본 내 항일독립유적지를 돌아보고.
역사 기행은 역사교육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알게 해준다. 책이나 영상으로 느껴보지 못한 감성이 흔적만 남아있는 터만 보아도 그 시절의 풍파를 온몸으로 맞았던 사람들의 눈물과 결의와 비명이 눈가와 귓가에 맴돈다. 요즘 ‘이젠 과거를 잊고 새로운 미래를 꿈꿔야 한다.’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린다. 맞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망각 위에 세워진 미래는 과연 희망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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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9
● 분단의 길에서 평화를 찾다!
올해는 정전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한반도 전역에 전쟁의 광기가 지나가고, 이 땅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삶이 파괴되었어도 우리가 기억하는 한국전쟁은 전투의 승리와 업적에 치중되어왔다.
그러나 종전이 아닌 정전협정으로 70년이 지난 현재에도 한반도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전쟁의 불씨를 품고 있으며 이러한 오랜 분단 상황은 남북 간의 갈등뿐만 아니라 남남갈등으로 인해 우리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많은 문제를 품고 있다.
분단 상황이 우리 사회에 가져오게 된 부정적인 영향은 비단 국방비 증가나 군대문제 등 외형적으로 보여주는 것뿐만 아니라 ‘종북’ ‘빨갱이’라는 금기를 만들어 우리의 상상력과 행동을 통제해왔다.
우리 사회에 ‘금기’가 통용될 수 있었던 배경엔 한국전쟁의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한마을에서 오랫동안 서로 의지하며 살아왔던 이웃, 친척, 가족이 가해자와 피해자의 역할이 반복적으로 바뀌면서 점점 더 잔인한 방법으로 학살함에 서로에 대한 분노와 혐오가 더 심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나는 이번 웹진에 전쟁의 상흔과 당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 이야기를 나눌 첫 번째 장소는 서쪽 바다, 북한과 가장 가까운 섬 강화도이다. 특히 강화도는 지리적인 특징으로 한국전쟁뿐 아니라 고려 때부터 외침으로 이골이 난 지역이다. 당시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 아름다운 섬 강화도, 염하로 스며든 섬사람들의 눈물!
강화도는 낙조가 참 아름다운 곳이다.
강화대교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붉게 물든 노을을 보고 있자니 돌아본 강화도의 역사가 다시 떠올라 나의 눈 또한 붉어진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와 백제가 싸웠고, 고려 시대에는 몽골의 침입으로 수도였던 개성을 버리고 왕과 지배층이 이곳으로 피란을 오면서 강화 사람들의 수난과 희생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근대에 들어오면 병인양요, 신미양요와 같이 서양 제국주의의 침략과 일제강점기의 시작을 알리는 운요호 사건이 발발하면서 강화 주민의 희생은 더욱 커졌다.
그 후, 한국전쟁을 겪으며 강화도는 외국의 군대가 침략했을 때 함께 무기를 들었던 사람들이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죽이며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문득 고개를 들어 올려본 하늘은 마치 시대를 가리지 않고 몰아친 잔인한 역사 속 사람들의 비명을 연상케 하는 붉은 색으로 물들어있다.
<강화도>
출처 :강화군 홈페이지
<광성보>
출처 :강화군 홈페이지
1871년 미군은 개항을 요구하며 조선을 침략하였는데 이를 ‘신미양요’라고 한다. 신미양요는 미국이 1866년 통상을 이유로 막무가내 대동강에 정박했던 미국의 제너럴셔먼호를 평양 백성들이 불태운 사건의 책임을 묻고 통상을 요구하며 일으켰다. 미군은 초지진과 덕진진을 공격한 후 광성보로 향했고, 광성보에는 어재연이 이끄는 조선 수비병이 약 600명 배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우리보다 월등히 앞선 대포 등 무기에 의해 어재연, 어재순 장군을 비롯한 조선군과 강화 백성은 목숨을 잃었다.
당시 미군의 기록을 보면 광성보에서 전사한 미군은 3명, 부상자는 10명이었고, 조선군은 전사자가 350명, 부상자는 50명으로 되어 있다. 강한 물살이 흐르는 천혜의 자연 요새인 광성보도 서양의 신식 무기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을까?
미군의 총알을 막아보고자 무명천을 여러 겹 덧댄 방탄조끼인 ‘면갑’을 입고, 솜을 덧대서 전투에 임했지만 더운 초여름 날씨에 ‘면갑’은 무겁고 불에 잘 타서 오히려 전투력을 떨어뜨렸다.
많은 병사와 백성들은 섬을 지키기 위해 물 속에서, 불 속에서 싸우다 죽어갔으며 섬 해안가에 널린 시체들은 수습하기도 전에 강한 물살에 쓸려 고향의 바다와 강이 아닌 낯선 곳을 떠돌다 사라졌을 것이다.
광성보 안으로 들어가면 당시 미군이 사용한 총포가 전시되어 있다. 그들의 무기를 보고 조선군의 무기를 생각해보면 질 수 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막막한 마음을 안고 돈대로 걷다 보면 ‘쌍충비’가 보인다. ‘쌍충비’는 전투에서 순절한 수장인 어재순, 어재연 형제와 그나마 시체를 찾은 59명의 병사를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비이다.
쌍충비각 / 수자기 (출처 : 강화군 홈페이지)
내가 어릴 적 학교에서 배운 ‘신미양요’는 외세의 침략에 끝까지 항쟁한 자랑스러운 역사였지만, 나이가 들어 다시 찾아본 ‘신미양요’는 피눈물 나는 슬픔의 역사였다. 우선 사상자 수만 봐도 그러하고 수장인 어재연 장군을 상징하는 깃발인 ‘수자기’는 미국이 승리의 기념하기 위해 전리품으로 약탈해갔다. 이후 수자기는 미국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있다가 2007년 10년 임대 형식으로 136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와 현재는 강화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수자기까지 빼앗기는 수모를 겪으면서도 최선을 다해 강화를 지켜냈던 백성들은 비명과 함께 사라지고 궁궐 안의 모리배들은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백성들의 희생은 안중에도 없었다. 용두돈대로 향하는 길에서 내려다보는 염하는 작은 섬들 사이로 세차게 흐르며 빼어난 풍경을 만들어낸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추억도 만들기 아까운 시간을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죽어갔을 그들이 다시 떠오른다.
10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
그때와 달라진 게 있을까?
<한국전쟁 중 강화지역 민간인 희생자 추모비>
온수리 산 16
장소명이 아닌 지번을 검색해야 찾아갈 수 있는 곳,
변변한 안내판조차 보이지 않는 곳,
여기는 한국전쟁 중 강화지역에서 학살당한 1천여 명의 민간인 희생자 가운데 신원이 밝혀진 430여 명 중 323명의 비석이 있는 곳이다. 희생자들은 1951년 ‘강화향토방위군’이라는 군인, 경찰 신분도 아닌 민간무장 단체에 의해 강화의 모든 지역에서 학살당했다.
이들이 죽임을 당한 이유는 인민군에 부역을 했거나 월북한 사람의 가족이거나 잠재적으로 북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판단된 사람들을 예방적인 차원에서 죽인 것이다. 그들은 재판도 없이, 최소한의 인권이라는 권리도 보장받지 못한 채 죽어갔다. 추모 공간을 찬찬히 둘러보면 여성과 아이들의 비석이 자주 눈에 띈다.
그런데 비석에는 희생자 이름이 아닌 ‘000의 처, 000의 자’처럼 남성과의 관계로 표기되어 있다. 강화도에서의 학살은 1951년이 처음은 아니다. 전 해인 1950년에는 인민군에 의해 친일파, 지주, 기독교인이 죽임을 당했다. 명분은 있었지만 분명 억울한 죽음도 존재했을 것이다.
인민군이 후퇴하고 미군과 국군이 1951년 1월 강화도에 들어오면서 주민들에 가해진 폭력과 학살은 상상을 초월했다. 하지만 강화주민들의 불안과 공포, 적개심은 미군이나 타지의 사람들이 아닌 강화도에서 오랫동안 함께 이웃으로 살아왔던 사람들로 인해 더욱 커졌다.
혹시 ‘손가락 총살’이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는지?
일명 ‘빨갱이’를 억지로 찾아내야 할 때 사람들은 자신과 가족이 ‘빨갱이’로 몰려 죽임을 당하지 않으려고, 또는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대상을 검지로 슬며시 가리키면 가족이 몰살을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1950년~1951년 겨울, 이렇듯 이성을 잃어버린 듯 광기가 강화를 지배하던 시절.
아름다운 강화의 드넓은 갯벌과 나룻가에서는 서로 죽고 죽이는 사냥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국가는 왜 존재하는가?
홉스는 ‘리바이어던’에서 인간은 이기적으로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권력 지향적이기 때문에 항상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무자비한 폭력의 위기에 처해 있으므로 안전과 물질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국가’라는 형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굳이 홉스의 생각을 빌려오지 않더라도 우리가 세금을 내고, 법이라는 강력한 통제를 따르는 것은 ‘국가’라는 공동체로부터 안전과 행복을 담보할 수 있다는 기대에 의한 것이다. 하지만 국가가 이러한 공동체 구성원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폭력의 주체가 돼버린다면 이는 ‘리바이어던’의 또 다른 존재인 혼돈과 무질서의 괴물일 뿐이다.
<교동도>
교동도지도 / 대륭시장(출처 : 강화군 홈페이지)
강화도에서 북쪽으로 좀 더 올라가면 북한과의 거리가 불과 2.6km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가까이 있는 섬 ‘교동도’가 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황해도 연백군에서 피난 온 실향민들은 전쟁이 끝나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에 교동도에 자리를 잡았다.
한 달, 두 달, 석 달이 지나면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가 흩어졌던 가족이 다시 모여 살 줄 알았던 피난민들은 70년이 지나면서 실향민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리고 실향민의 집성촌이 형성되면서 ‘대륭시장’이라는 시장이 만들어졌다. 이곳에는 1970년대를 연상하게 하는 이발소, 신발가게, 음식점 등 상점이 있고 시장 곳곳에 제비집과 제비를 보호하자는 포스터와 글을 자주 보게 된다. 그 이유는 고향 연백군에서 날아오는 제비에 대한 애정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대륭시장의 명물인 ‘강아지떡’은 일제강점기 이북에서 즐겨 먹던 인절미와 같은 떡인데 일본이 인절미를 못 먹게 하자 ‘강아지떡’라고 하며 먹었다고 한다.
정겨운 시장 풍경과 달리 교동도는 민간인통제구역선 안에 위치하여 신분증을 필히 소지하고 ‘임시출입 및 단기 체류 신청서’를 작성해야만 출입할 수 있다.
망향대에서 바라보는 북의 연백평야(출처 : 강화군 홈페이지)
손에 닿을 듯 가까이 있지만 갈 수 없는 고향,
그리운 사람을 기억에 묻고 망향대에서 바라보는 이북의 땅, 연백
70년이 넘는 분단의 시간은 사람과 추억을 사라지게 한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
하루에도 몇 번이 오갔을 물길과 육지길.
만선을 기원하는 뱃사람의 노동요와 탁주 한 사발의 후한 인심이 북적대던 해안가는 실향민들의 나이만큼 노쇠했으며 녹슨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있다.
팔십이 다 된 노인은 멀리 보이는 북쪽의 고향 집을 향해 ‘엄마’를 연신 불러본다.
육지와 달리 휴전선이 없는 바닷길.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경계선은 노인의 마음으로만 엄마를 불러보게 한다.
녹슨 철조망을 걷어내고 바닷물과 민물이 교차하는 풍요로운 한강하구에서 남과 북의 사람들은 가족의 상봉과 만선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날이 올 수 있을까?
이산의 아픔은 언제 끝이 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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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