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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실의 빛나던 순간

작성자: 윤작가 / 날짜: 2025-03-24 / 조회수: 172

 

우리는 종종 가까이 있는 이웃을 보지 못하고 지나칩니다. 이주민, 농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공간에서 숨 쉬고, 일하고, 사랑하며 살아가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고, 삶은 쉽게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가장 행복했던 순간, 가슴속 깊이 간직한 사랑의 추억이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이주민, 농아인들이 직접 들려주는 가장 행복했던 순간과 사랑의 기억을 기록하는 작업입니다. 낯선 환경에서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넘어 삶을 개척해 온 그들에게도 웃고, 사랑하고, 희망을 품었던 시간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이주장애라는 틀을 넘어 인간적인 존엄과 감정을 마주하고자 합니다.

 

이 작업은 단순한 기록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손짓과 들리지 않는 말 속에도 깊은 감정과 삶의 서사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모아 함께 나누는 것은, 우리가 같은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연결하는 다리를 놓는 일입니다. 이제, 그들의 빛나는 순간을 함께 발견해 보세요.

 


 

정혜실의 빛나던 순간

안산의 다양한 공동체가 함께 만들어가는 라디오 방송을 꿈꾸는 단원 FM 정혜실 본부장입니다. 저에게 가장 빛나던 순간이 언제였나라고 물으신다면, 저는 주저 없이 1994년의 그 봄날로 돌아갈 거예요. 사실, 그날이 정말로 벚꽃잎이 흩날리는 화사한 봄날이었는지, 아니면 그냥 평범한 날이었는지 기억은 흐릿합니다. 하지만 그날의 만남은 제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고, 지금의 저를 있게 한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어요. , 커피 한 잔 들고 저와 함께 1994년 이태원 거리로 떠나볼까요?

 

 
 
1: 이태원에서 운동화 끈을 묶다.
 
1994년 봄날, 저는 버스를 타고 가다 이유 없이 이태원에서 내렸어요. 왜 그랬는지 지금도 모르겠어요. 운명이었다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죠. 당시 저는 기독교 신자로, 이태원은 제게 소돔과 고모라처럼 느껴지는 곳이었어요. 화장기 없는 얼굴에 짧은 단발머리, 청바지와 운동화 차림으로 에코백을 덜렁이며 거리를 걷던 저는 영락없는 대학 신입생 같았을 거예요. 상점 구경에 정신없던 중, 횡단보도 앞에서 운동화 끈이 풀린 걸 발견했죠. 허리를 숙여 끈을 묶고 고개를 드는데,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어요. 검은 피부의 남자가 저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더군요.
 
그는 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어요. “차 한잔하면 어떨까요?” 저는 그 말을 무시한 채 횡단보도 신호만 뚫어져라 쳐다봤죠. ‘이태원에서 낯선 남자가 말을 걸다니, 위험한 거 아니야?’라는 생각에 심장이 쿵쾅거렸어요. 그는 제 뒤를 따라오며 한 번 더 물었지만, 저는 고집스럽게 횡단보도를 건넜습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만약 저 남자가 백인이었다면, 나는 차를 한잔했을까?’ 제가 부끄러워졌어요. 횡단보도를 다 건넌 뒤, 아쉬운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그에게 돌아서서 말했죠.
 
좋아요.”
 
그렇게 시작된 커피 한 잔은 제 인생의 전환점이 됐어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요. 해밀턴 호텔 건너편 지하 커피숍에서 그와 마주 앉았죠. 그는 일본으로 가려다 브로커 권유로 한국에 온 파키스탄 남자였어요. 관광비자로 입국해 일하고 있었으니, 요즘 말로는 미등록체류자였죠. 하지만 1994년엔 미등록체류자라는 단어도 생소했고, 한국에 외국인 노동자도 거의 없던 시절이었어요. “한국이 어떠신가요?”라고 물었는데, 저는 속으로 친절한 사람들, 깨끗한 거리같은 뻔한 대답을 기대했어요. 그런데 그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한국이든 파키스탄이든 다 똑같아요.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고, 사람 사는 모습은 어디나 비슷해요.” 그 진솔함에 마음이 끌렸어요. 얼굴색은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죠.
 
 
2: 손을 잡고 감전된다.
 
그와 세 번째 만났을 때였나, 이태원 골목을 걷다가 그가 갑자기 제 손을 잡았어요. 파키스탄 사람들은 보수적이어서 연인 사이에도 거리에서 손을 잡지 않는다고 하던데, 그날은 달랐나 봐요. 그가 손을 잡는 순간, 온몸이 감전된 듯 바르르 떨렸어요. 남자 손을 처음 잡아본 것도 아닌데, 왜 그랬을까요? 네 번째 만남에서 우리는 서로 포옹했어요. 그 따뜻함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 사람이라면 내가 대신 죽어 줄 수도 있겠구나. 아니, 오히려 이 사람이 나를 위해 죽어 줄 사람일지도.’ 한 달 조금 넘은 시간이었지만, 우리는 결혼을 결심했어요.
 
집안 반대는 상상 이상이었죠. 어머니는 머리띠를 매고 드러누우셨고, 아버지는 입도 떼지 않으셨어요. 동생들이 유일한 응원군이었죠. 종교 갈등은 더 심각했어요. 한국에서 결혼하려면 이슬람으로 개종해야 했는데, 저는 그건 원치 않았어요. 결국 우리는 파키스탄으로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석 달을 보내며 받은 사랑은 평생 잊을 수 없어요. 말도 안 통하는 동양인 여자를 그의 가족은 진심으로 환대해 줬죠. 존중하는 눈빛, 깊은 온유함, 그리고 깨알 같은 유머까지. 그 사랑이 지금의 저를 지탱하는 힘이에요. 제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순간이었죠.
 
 
 
 
3: 다른 세상과 맞닥뜨리다.
 
결혼은 나와 다른 세상을 만나는 것이라고들 하죠. 저는 정말로 다른 세상을 만났어요. 한국으로 돌아온 후, 공항에서부터 투쟁의 연속이었죠. “왜 하필 파키스탄 사람이야?”라는 질문이 제 귀를 파고들었어요. 얼굴색이 뭐가 그리 중요한지, 가난한 나라 사람과 결혼하면 안 되는지 묻고 싶었죠. 공항 심사부터 의심의 눈초리가 쏟아졌어요. 반말과 하대는 참을 만했지만, 이유 없는 억류는 사람을 미치게 했어요. 어두운 피부색의 남편과 결혼한 저 역시 끊임없는 의심의 대상이었죠.
 
지금도 남편이 사업하며 수금에 어려움이 생기면 제가 나서요. 파키스탄인인 남편보다 제가 조금 더 수월하게 이야기를 풀어가니까요. 제 말은 무시당하지 않거든요. 그럴 때마다 제 전투력은 한 뼘 더 자라죠. 한번은 남편이 웃으며 말했어요. “당신은 나보다 더 파키스탄 사람 같아요.” 그 말에 빙그레 웃었죠. 사랑은 투쟁을 낳고, 투쟁은 우리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어요.
 
 
4: 라디오로 잇는 꿈.
 
그 빛나는 순간들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어요. 안산에서 공동체를 위한 라디오 방송을 꿈꾸는 이유도 그때의 경험에서 비롯됐죠. 서로 다른 세상을 연결하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때로는 유머로, 때로는 따뜻함으로 그들을 위로하고 싶어요. 1994년의 그 남자가 제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면, 제가 그의 손을 잡지 않았다면, 저는 지금 여기 있지 못했을 거예요.
 
단원 FM에서 저는 다양한 목소리를 모으고 싶어요. 이태원에서 만난 그처럼, 겉모습이나 배경이 달라도 진솔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죠. 언젠가 방송에서 농담을 던질지도 몰라요. “청취자 여러분, 저는 운동화 끈을 묶다 인생을 바꿨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바꿀 순간은 언제인가요?” 그리고 이어서 루이 암스트롱의 ‘What a Wonderful World’를 틀 거예요. 그 노래가 제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줬듯, 누군가에게도 작은 위로가 되길 바라며요. 안산의 파도는 그렇게 시작될 거예요. 사람과 사람을 잇는 따뜻한 파도로요. 제 가장 빛나던 순간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연결의 시작이었답니다. 여러분도 저와 함께 이 파도를 타보시겠어요?
 
 
 
 
인터뷰를 마치며
 
정혜실 본부장의 이야기는 단순한 한 사람의 사랑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한 개인이 어떻게 새로운 세계와 맞닥뜨리고, 그 세계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 가며, 다시 또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어 가는 여정이다.
 
운동화 끈을 묶던 순간이 인생을 바꾸었다는 그의 말처럼, 우연한 만남이 필연이 되고, 그 필연이 또 다른 변화를 만들어 낸다. 하지만 그의 삶은 단순한 운명적인 로맨스가 아니라, 끝없는 싸움과 연대, 그리고 포용의 과정이었다. 여전히 많은 이주민과 그 가족들이 차별과 편견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피부색, 국적, 경제적 배경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능력과 인격이 평가절하되거나, 그들의 사랑과 결혼이 의심받는다.
 
한국 사회는 이제 더 이상 단일민족 국가가 아니다. 안산만 보아도, 이미 다양한 국적과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법과 제도,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은 여전히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이주민과 그 가족이 한국 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법적·제도적 장치의 개선이 필요하다. 단순히 다문화 가정이라는 이름으로 시혜적 지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차별 없는 교육과 노동 환경을 만들고,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동등하게 보장해야 한다.
 
정혜실 본부장이 라디오를 통해 다양한 목소리를 담고 싶어 하는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세상과 연결되었고, 이제는 또 다른 이들의 목소리를 세상과 연결하고자 한다. 그의 바람처럼, 우리가 더 많은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언젠가 외국인 노동자’, ‘미등록체류자같은 단어들이 사라지고, 그저 이웃으로 불릴 날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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