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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 전태일이 꿈꾸었던 인간의 나라 / 11월 13일 국가기념일 지정 경기도민이 함께 — 거대한 차별의 장막과 차가운 노동의 벽을 넘어, 경기도 골목마다 다정한 존엄과 연대의 푸른 숲을 일구어내는 감동의 여정

     소외의 그늘과 쉴 새 없는 고단함의 소용돌이 뒤편에서, 굳건한 연대의 손길로 인간의 권리를 빚어내고 찬란한 평화의 내일을 마주하는 눈부신 발자취

    저마다의 자리에서 묵묵히 경기도 구석구석의 일상을 지켜내며 노동의 존엄을 염원해 온 수많은 노동자들과 도민들. 열악한 현실과 차가운 권익의 사각지대라는 무거운 장벽 앞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서 모든 인간이 차별 없이 존엄한 삶을 누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라는 깊은 울림의 질문 앞에 섰다. 방관과 망각의 장막을 걷어내고, 묵묵히 두 손을 모아 서로의 지친 손을 보듬으며 촘촘한 연대의 그물망을 엮어 온 ‘전태일이 꿈꾸었던 인간의 나라 / 11월 13일 국가기념일 지정 경기도민이 함께’ 기획의 눈부신 발자취를 깊이 들여다보다.

    "우리는 과연 ‘노동의 가치와 인간 존엄을 향한 목소리는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에 불과할 뿐, 평범한 이웃들과 공익활동 현장이 함께 손을 잡고 11월 13일을 온 국민의 기념일로 만들어낼 수는 없다’며 마음의 문을 닫아걸었던 차가운 방관의 장막을 걷어내고, 경기도 구석구석의 평범한 이웃들과 노동 활동가들, 그리고 공익활동지원센터가 손을 맞잡으며 저마다의 진심으로 평화와 상생의 품을 엮어내는 ‘전태일의 정신을 잇달으며 꽃피우는 노동 자치의 품’을 어떻게 활짝 열어갈 수 있을까?" 풀뿌리 노동·인권 자치와 상호 존중적 권익 안전망의 잠재력을 발굴하고, 경기도 전역에 지속 가능한 상생과 생명의 숲을 깊이 일구어가는 감동의 여정을 깊이 조명한다.

    ‘전태일이 꿈꾸었던 인간의 나라 / 11월 13일 국가기념일 지정 경기도민이 함께’가 품은 3가지 핵심 과제와 비전

    1. 방관과 망각의 장막을 허무는 ‘풀뿌리 노동 감수성 및 자발적 연대 생태계 구축’

      • 노동의 권리와 전태일 열사의 뜻을 멀리 떨어진 역사적 사건으로 여기며 무심히 지나치던 낡한 관행에서 벗어나, 경기도민과 노동 활동가들이 동네 골목과 일상의 마당에서부터 직접 인간 존엄의 가치를 나누고 국가기념일 지정을 외치는 자발적 생태계 다지기.

      • "진정한 노동 자치의 완성은 거창한 법 개정 선언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동네 작은 모임방에 모여 앉아 이웃들과 손을 잡고 '우리는 누구나 기계가 아닌 인간으로 당당히 살아가야 한다'며 서로의 어깨를 토닥이는 소박한 실천에서 시작된다"는 철학 실천.

    2. 고립을 넘어 온기를 잇는 ‘시민 참여형 인권 공감 및 연대 강화’

      • 일터에서 마주하는 차별과 부당함을 개인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지역 사회와 공익활동 현장이 함께 머리를 맞대어 지혜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공론장 창출.

      • "혼자서 거대한 불평등의 벽과 차가운 현실에 마주하면 숨이 막히고 버겁지만, 경기도 도민들이 손을 잡고 함께 연대를 외치면 그 어떤 어둠도 따스한 품으로 녹아내린다"라는 통찰.

    3. 경기도 31개 시·군 골목마저 평화와 존엄의 그물망으로 잇는 ‘상생 노동 네트워크’

      • 시·군의 경계를 뛰어넘어 경기도 내 다양한 노동·시민 커뮤니티들과 도민들이 유기적으로 손을 잡고, 모든 노동자의 권리와 인간다운 삶이 차별 없이 보장되는 상향식 민주주의와 시민 자치 실현.

      • "모든 도민과 이웃들이 소외되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로 오래도록 함께 웃을 수 있는 공정하고 평화로운 공생의 무대" 완성.

    [기획]전태일이 꿈꾸었던 인간의 나라/11월 13일 국가기념일 지정 경기도민이 함께
    박미경(전태일재단 사무총장)

    조회수 1272

    2025-10-28
  • “얼쑤~~” 민요나 판소리를 부를 때 자주 쓰는 추임새다. 흥을 돋우고 소리꾼을
    응원하며 사람들을 하나로 연결하는 마법의 소리다. 안산에는 한 20년 “얼쑤!”로
    불리는 사람이 있다. 광폭 시민 활동가 얼쑤 김미숙의 일문일답 추임새를 들어 보
    자. “각자도생에서 함께 어울려 사는 사회로, 얼쑤!”

    후원하고 활동하는 단체 목록을 세어보니 26개더라. 조금만 소개해 달라. 안산 YWCA의 평생회원이자 현재 대표다. 활동비를 받는 자리가 아닌 비상근 활
    동가다. 4.16안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안산평화연대 공동대표, 안산 기후위기 비상
    행동 공동대표기도 하다. 오라는 데 많고, 가야 할 데도 많다. 사랑하는 4.16합창
    단 소프라노 단원, 시화호생명지킴이와 안산환경운동연합 활동가이자 강사이며
    (사)안산공동체미디어 단원FM에서 환경 방송 ‘얼쑤의 얼쓰Earth’를 진행하고 있
    다. 안산·시흥 지역 노동자들의 생활안정과 권익증진을 위해 만들어진

    사)일하는 사람들의 생활공제회 ‘좋은이웃’의 생활안정팀에서 오래 활동하고 있다. 올해는 캄보
    디아 노동자들과 만나 잔치 음식도 해 먹고 지지하는 만남을 6번 진행하는데, 8
    월에는 여행도 간다. 양계장에서 일하는 한 캄보디아 여성 노동자는 한 달에 휴일
    이 두 번뿐이다. 이동의 자유도 이웃과의 소통도 없다. 외부에서 병원균이 옮겨
    와 닭이 조류독감에 감염될 수 있다는 이유다. 모임에서 뭐가 좋았냐 물으니, 올
    때 전철도 타고 나무도 보고 자동차도 보고, 사람들과 얘기한 거라고 하더라. 단체 상관없이 제일 신경 쓰는 건 탈핵이다. YWCA가 2년마다 집중 과제를 선정
    하는데 10년 넘게 ‘탈핵’이 있다. 우리 아이 초등학교 6학년 때 환경운동연합, 안
    산YWCA 등이 버스 한 대로 월성 원전 이별 퍼포먼스에 갔다. 후쿠시마 핵폭발
    사고는 정말 무서웠다. 핵에너지가 안전하다 경제적이다 그러지만, 터지면 끝이다. 탈핵과 정의로운 에너지 전환 운동이 중요하다. 안산시민햇빛발전협동조합에서는
    작년에 발전 수익으로 사회기여를 1억 원 했다. 발전 수익을 낼 수 있고, 지역에
    선한 영향력을 미친 귀한 사례다. 여성단체 YWCA(이하 Y)에 발을 들이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아이를 낳고 나니 환경이 망가진 게 보이더라. 내가 배워서 아이가 살아갈 세상에
    무언가 기여하고 싶었다. 당시에 돌도 안 된 아기의 사교육을 위해 선생님을
    집으로 부르는 주변 사람을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이와 직접
    재미있게 놀고 싶어 아이를 안고 도서관, 서점, 미술관을 다녔다. 아이 교육에
    대해 좀 더 배우고 싶어 찾아간 게 YWCA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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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권유받은 게 NIE(Newspaper In Education) 지도사였다. 당시 N.I.E.가 붐
    이었다. 신문을 활용한 교육 자료로 아이들의 생각을 키우는 활동이다. 심화 과정
    수료 요건이 60시간인가 80인가 봉사 후 보고서 제출이었다. 5살 딸아이를 데리
    고 일주일에 한 번씩 N.I.E. 교육 봉사를 했다. 2년, 3년 계속하니 ‘검증된 강사’
    소리 들으며 강의 요청을 받았다. 새로 문을 연 지역아동센터나 재정이 넉넉하지
    않은 작은 도서관에서 봉사 수업을 하다 보니 입소문이 나고 점점 강사 경험이
    쌓였다. ‘시화호생명지킴이’라는 단체도 찾아가 교육을 받고 지역에 봉사하게 되었
    다. 지금 내 주업이 강사다. 독서 강사, N.I.E. 강사, 환경 강사 등으로 영역이 넓
    어졌다. 아이 잘 키우려던 엄마가 광폭 시민 활동가가 된 어떤 전환점이 있었나?

    4.16세월호 참사였다. 단체라고는 YWCA, YMCA, 시화호생명 지킴이, 환경운동연합 정도만 알다가 4.16 참사를 계기로 수많은 시민과 연결되었다. 안산에 연대하는 작은 시민단체가 엄청나게 많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됐다. 이상하게 여겼던 이 사회가 그래도 여기까지 굴러온 건 이분들 덕분이겠구나, 알겠더라. 시간이 되면 달려가 힘을 보태고, 행동하고 후원하게 됐다. 내 삶이
    ‘각자도생에서 함께 어울려 사는 사회로’ 전환했다. 우리 집이 단원고등학교 근처 빌라 101호다. 302호가 단원고 2학년 4반 고
    박수현 군의 집이었다. 2002년 3월에 이사 와서 제일 처음 사귄 이웃이 수현이
    엄마 영옥 언니였다. 언니는 “배추전 먹으러 와.” “떡볶이 했으니 올라와.”
    하고많은 날 우리를 불러주거나 음식을 갖다주었다. “밥이 똑 떨어졌어, 밥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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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기 줄 수 있어?” “언니 달걀 좀 주세요.” 이게 우리 일상이었다. 수현이가 고2
    때 우리 딸이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외동인 딸에게 수현이는 가장 가까운
    오빠요, 놀이 상대였다. 수현이는 연년생인 누나의 가방을 들어주고, 밤이 늦으면
    누나 마중을 나가는 동생이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2014년 4월 16일, 집에서 컴퓨터로 N.I.E. 수업
    자료를 만들다 인터넷 속보를 본 거다. 세월호와 단원고, 이걸 보는 순간
    수학여행 간 수현이 생각이 나 바로 영옥 언니한테 전화했다. “걱정하지 마, 다
    구했대. 그래도 다 젖었을 테니 깨끗한 옷 챙겨서 지금 형부랑 내려가는 중이야.”
    그랬다. “너무 다행”이라며 전화를 끊었다. 놀란 가슴에 배는 고픈데 먹고 싶은
    게 없어 밥을 물에 말아 후루룩 먹은 기억이 난다. 그런데 애들을 못 구했다는
    거다. 세월호가 내 이웃의 일이자 내 일로 연루되었군요.

    그날 아이가 학교에서 오길래 “수현이 오빠가 어떻게 됐는지 모른대. 우리 같이
    학교로 가볼까? 사람들이 모여 소식을 듣는 것 같아.” 말하며 단원고에 갔다. 4월
    16일, 무사귀환을 간절히 바랐던 첫 번째 촛불 기도회로 4.16활동이 시작됐다. 멈
    출 수가 없었다. 영옥 언니가 진상 규명이라든가 서명 활동을 계속하니 나는 뭐라
    도 언니를 도와야 했고 돕고 싶었다. 참사 4일째, 남편과 아이랑 셋이 진도 체육
    관에 갔다. 영옥 언니와 은희 언니와 유가족이 된 지인들을 보았다. 두 언니는 당
    시 내 인생의 롤모델이었다. 울고 소리지르고 쓰러지고, 민간 잠수사가 어떻고, 왜
    찍어, 카메라 뺏고, 막 드잡이하고, 그걸 다 보았다. 사복 경찰이 진짜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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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히 그분들만큼 큰 아픔, 슬픔에 빠졌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가장 가까이에서
    그 슬픔을 같이 겪었다. 너무 끔찍한 세월이었다. 영옥 언니가 진도에 계시면서, “뉴스에서 나오는 거 저거 다 거짓말이야”라며 진실을 알려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뜨거운 폰을 얼마나 눌러댔던지 오른쪽 집게손가락이 아파서 아직도 잘 못 쓴다. 소식을 전하는 과정에서 거의 20년 가까이 지낸 지인하고 의절하는 일도 있었다. 참사 후 며칠 안 돼서 노란 리본 이미지를 카카오톡 프사로 쓰는데, 저작권에 걸
    린다고 1인당 몇백만 원을 물어야 한다고 했다. 우리 딸 학교 보내기 전에 노란
    리본으로 머리를 묶어주고 뒤통수를 찍어서 그걸 지금까지 프사로 쓰고 있다. 못
    바꾸겠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지만, 세월호 참사는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군요?

    그렇다. 나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언니와 함께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취업했다. 대학을 왜 가는지 몰랐다. 그런데 내가 대학에 갔더라면 더 일찍
    진보적인 사상을 접하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역할을 했을 텐데, 모르고 살아 너무
    안타깝더라. 나는 부당한 일을 보면 조용히 떠나는 식으로 살았다. 일만 하다 결
    혼했고, 아이 낳고서야 세상을 보기 시작했다. 세월호 참사는 거리를 둘 수 없는
    내 일이었다. 우리 애는 수현이네 집에서 먹고 놀기 좋아했다. 오빠 놀아 줘, 하
    면 수현이는 뭐 하고 놀까, 물어보며 다리에 미끄럼을 태워주는 오빠였다. 수현이
    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유치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커서 오빠랑 결혼한다고 했다. 수현이가 부모님에게 무언가 사 달라고 하면 “넌 1층 장모님한테 가서 얘기해라”
    놀림받을 정도였다. 그런 수현이가 우리 곁을 떠나 너무 안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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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사가 아이한테도 큰 영향을 미쳤을 거 같은데 괜찮은지?

    아이가 한동안 수현이를 입 밖에 못 내더라. 딸은 모태신앙이었는데 참사 후 하나
    님은 없다 했다. 수현이 오빠가 살아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도했던 거다. 중학교 2
    학년 때 학교 수업 중에 자꾸 다른 책을 읽었다. 왜 그러느냐니까 “내일 죽을지도
    모르잖아. 지금 안 읽으면 모르고 죽잖아.” 그랬다. 수현이 오빠를 며칠 만에 찾았
    냐길래 일주일쯤이라 했더니, 배 안에서 하루만 살고 죽었으면 좋겠다더라. 살아
    있었으면 얼마나 슬프고 고통스럽고 무섭고 춥고 보고 싶고 그랬겠냐고. 딸아이는
    여주로 고등학교를 갔는데, 택시 기사가 어디서 왔냐길래 안산이라 했더니, ‘세월
    호!’ 이러면서 말 잘 듣는 애들은 가만히 있어서 다 죽고, 말 안 듣는 애들만 살
    았다 하더란다. 애가 그 기사를 죽이고 싶었다고, 막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싶다
    그랬다. 트라우마가 있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애도하고 있더라.

    시민 활동가로서 바쁜 중에 4.16 합창단 활동도 한다.

    4.16합창단이 생길 때부터 마음이 갔는데 몇 년 전에야 결합했다. 친언니
    ‘만주벌판’도 단원이다. 좋은 목소리와 건강한 정신을 주신 엄마도 합창단 행사로
    자주 본다. 아픔이 있는 곳에서 노래로 폭넓게 연대하니 참 좋다. 최근 전태일
    의료 센터 건립을 위해 공연했다. 효순이 미선이 저금통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우리 딸이 재작년엔가 “엄마 생일 선물 뭐 해줄까?” 하다가 “엄마는 물건은 안
    좋아하니까 엄마 이름으로 기부해 줄게.” 그러더니 효순이 미선이 평화공원 짓는
    데 딸이 5만 원을 기부해 준 적 있다.

    현재 가장 마음 쓰는 활동이나 고민도 좀 나누자.

    아무래도 YWCA 회장이라는 중책이 마음 쓰인다. 지금 회원 증모 기간인데, 이걸
    내가 잘 못한다. 대신 남편이 평생회원에 가입하게 했고, 내년에 우리 딸 돈 벌면
    평생회원 가입시키려 한다. Y는 기독청년여성회(Young Women Christian
    Association)다. 나도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지만, 기독교 신앙이 왜 필요한가, 계속 질문한다. 내가 나가는 교회와 한국 기독교회들이 정말 예수를 따르는지, 세
    상의 빛과 소금인지, 우는 자와 같이 울고 웃을 때 함께 좋아해 주는가, 의심스러
    웠다. 남편은 교회에 있는 시간을 좋아한다. 내가 “왜 비판하지 않아?” 그러면 그는
    좋은 것만 들려, 부분으로 기분 나빠할 필요 없다는 식이다. 답답함을 느끼지만, 그 말이 틀린 건 아니잖나. 나는 일부 교회가 없어져도 된다고 본다. 교회 안에만
    하나님이 계시는 게 아니니까. 헌금도 교회 말고 사회로 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인데, 남편은 다르다. 그가 우리 가정의 주 수입을 담당하니 내 뜻대로 할 수
    없다. 내 수입은 사회로 12조 13조도 낸다. Y가 있어서 사회 정의나 연대의
    갈증이 해소되고 내 신앙을 이어가는 거 같다. YWCA 활동가로서 정체성을 좋아하는군요?

    그렇다. 7월 초 Y 신입 직원 교육이 있었다. 작년에 못 해서 올해 교육 대상이
    꽤 많았다. 삼성이나 SK에 입사 지원할 때 그 회사에 대해 공부한다. 그런데 모
    법인에 대해서는 모르고 오는 사람이 태반이다. 회장으로서 Y 100년 역사와 안산
    Y 40년 역사를 강의하며, “YWCA를 알고 나면 내가 참 좋은 기관에서 일하고
    있구나, 자부심을 느낄 거예요.”라고 말해 줬다. YWCA가 교회는 아니지만, 이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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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보다 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목소리와 행동을 계속해야 한다. YWCA 회장으로서 자부심 뿜뿜인데, 어려움은 없는지?

    역사 인물 최용신 선생은 안산의 자랑이자 Y의 자랑이다. Y에서 공부하고 농촌
    계몽 운동하셨는데, YMCA로 아는 사람들이 있더라. 내가 어느 단체에 가니 안산
    YMCA에서 오신 얼쑤라고 소개하더라. ‘YWCA’라고 바로잡곤 한다. 최용신
    기념관 관련 기사에도 몇 년에 한 번씩 YMCA라고 나온다. 재작년에도 메일로
    항의했다. 시에서 발행한 책자도 스티커로 다 수정하게 한 적 있다. 남성이
    디폴트인 사회라 여성단체를 더 드러낼 필요가 있다.

    ‘회장님’, ‘이사님’ 호칭 보다 ‘얼쑤’가 좋다. 사람들은 ‘얼쑤’ 말고 ‘회장 김미숙’을
    쓰라 한다. 공적인 자리에서야 어쩔 수 없지만, 활동가로서는 ‘얼쑤’가 편하다. 지금까지의 내 활동을 보고 대단하다, 기왕이면 학위를 좀 업그레이드해서 더
    많이 강의하고 돈도 더 받으라 한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그러면 지역에서 적은
    돈만 줄 수 있는 데서 누가 활동하나. 나 같은 사람도 있어야지.” 더러는, 왜
    그렇게 활동이 많냐, 정치할 거냐 한다. 정치하란 말은 10년 전부터 들었지만, 내
    대답은 같다. 너무 열심히 하다 병나서 죽을 거라고. Y회장만으로도 ‘거룩한
    부담감’이 큰데 더는 아니다. 그때그때 마음 가는, 기울어진 운동장을 위해, 내 할
    만큼만 한다.

    “회장님”보다 활동가 “얼쑤~”가 좋아요!
    꿀벌

    조회수 89

    2025-07-29
  • 과거가 현재를 구할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에서 한 말이다. 5.18민주화운동 이야기인
    《소년이 온다》를 쓸 때 그와 함께 한 질문이라 했다. 그 책을 쓰는 동안만의
    질문이었을까. 지난 5월 17일(토) 광주의 5.18전야제를 다녀오는 동안 내게도
    살아 있는 질문이었다. 과거가 현재를,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하는 현장을 보
    았기 때문이다. 45년 전의 광주가 오늘 대한민국을 구하고 있었다. 총칼이 아
    니라 노래와 시로, 춤과 연극으로 연대하는 민주주의 대축제였다. 부끄러운 고백으로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1980년 5월에 나는 대구에 사는
    여고 2학년이었다. 당시 TV 화면에 나오는 광주는 ‘폭도’와 ‘빨갱이’의 도시
    였다. 대학생이 된 후에도 광주는 두려운 ‘벽’이었다. 독재와 냉전 시대 교육
    에 길든 아이가 광주의 진실을 마주하기까지는 20년이 더 걸려야 했다. 제45주년 5·18민중항쟁기념행사로 올해도 광주를 다녀오는 복을 누렸다. 개
    인으로서가 아니라 4.16합창단으로서 ‘민주주의 대합창’ 공연에 서는 덕분이
    었다. 구묘역 신묘역을 방문하고 5.18민중항쟁기념행사의 꽃이라 일컬어지는
    전야제도 즐길 수 있었다. 올해는 18일 밤까지 1박 2일로 확대 진행된 전야
    제를 하루만 보고 돌아온 게 아쉽다. 5.18 민주 광장, 동구 금남로 1~3가 차
    없는 거리, 동구 중앙로 일대는 시민 참여 부스 물결이었다. ‘임을 위한 행진
    곡’이 울려 퍼질 때마다 누구라도 목청껏 함께 부르는 축제였다. 다시 만난 소년, 아! 오월이여
    17일(토) 오전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거행된 추모식부터 소개하고 싶다. 안
    산에서 아침 7시에 출발해 구묘역을 들르고 신묘역에 도착했을 땐 5·18민주
    유공자유족회가 주최 주관하는 추모식은 끝나고 있었다. 식전 공연으로 놀이
    패와 장애인예술단의 공연이 있었고 5.18민주화운동 희생자에 대한 전통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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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례 의식을 마친 전통 한복을 입은 분들을 볼 수 있었다. 2부 순서인 국민의
    례로 시작하는 추모식(10시 30분)은 내빈 소개, 추모사, 유가족 대표의 인사
    가 있었고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과 헌화와 분향이 있었다. 추모식에서 가장 소개하고 싶은 순서는 ‘다시 만난 소년, 아 오월이여!’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5·18민주화운동 추모시 낭송 퍼포먼스’였다. 광주시낭송협
    회 사람들이 5·18 광주 추모시를 모아서 한 편 한 편 낭송하는 공연이었다. 오월 광주를 추모하되 시와 음악으로, 피로 쓴 민중항쟁의 역사가 노래와 시
    로 살아나는 시간이었다. 이창병의 ‘망월동에서’ 첫 자락을 보자. “광주 금남로에서/ 이 나라 최후의
    거리마다 쓰러진 넋들의 통곡은/ 우리들의 침묵 속에 깊이 가라앉아 있습니
    다.” 고정희는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라고 읊었다. 김준태의 ‘오 광주
    여! 우리나라 십자가여!’는 광주일보(구 전남일보) 1980년 6월 2일 자 조간 1
    면에 실렸던 시다. 계엄 당국의 검열에 기자들이 사표로 저항한 그 시였다. 다시 만난 소년, 아! 오월이여/ 광주시낭송협회/ 추모식에서 낭송된 시 맛보기
    길을 가다 불현듯
    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사람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달빛 아래서나 가로수 밑에서
    불쑥불쑥 다가왔다가
    이내 허공중에 흩어지는 너
    네가 그리우면 나는 또 울 것이다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고정희
    꽃 떼들도 나비들도 흩어져버린 광주여. 호남이여. 쓰러지고 엎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우리들의 피투성이 도시여. 죽음으로써 삶을 찾으려 했던
    아아, 너 통곡뿐인 남도의 불사조여. 우리들의 도시
    우리들의 도시
    아아, 광주여 광주여 광주여 광주여.
    ‘민족의 십자가여’ /김준태

    동호야!
    죽은 친구의 등허리를 껴안고 우정을 포개고 죽은 소년
    억울한 주검을 나르던 열여섯에게 민주란 무엇이었을까
    어젯밤 나누어 삼킨 주먹밥 한 덩어리
    마지막 눈물처럼 가슴에 퍼부었겠지
    주먹밥처럼 꼭 끌어안고
    죽음도 떼어놓지 못한 밀도로
    어린 친구들은 하늘에서도 주먹밥이 되었을까
    -‘주먹밥의 밀도’ /전숙
    네가 오리고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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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사람이 개처럼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하지
    만 신문에는 한 줄도 실리지 않았다.” 45년 전 전남일보 기자들의 그 절규가
    시로 다시 살아나는 시간이었다. “끝나지 않는 오월 다시 찾은 민주주의 당신
    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80년 오월을 기억하겠습니다. 그날을 잊지 않겠습
    니다.” 시와 노래로 하는 기억의 다짐이었다. 민주주의 대축제 대합창
    3부로 구성된 민주주의 대축제 5·18전야제는 지정남 배우가 진행했다. 1부 ‘오월광주 환영대회’는 오월길맞이굿을 시작으로 금남로에 집결하는 수만 명
    의 민주 평화 대행진 대열을 노래와 춤으로 환영하는 행사였다. 2부는 ‘민주
    주의 축제’로 뮤지컬과 노래로 꾸며지고 3부는 ‘빛의 콘서트’로 노래를 찾는
    사람들을 비롯한 노래밴드들의 무대였다. 전야제 중앙무대는 금남로 4가역
    교차로에 설치되고 양방향으로 여러 개의 대형 스크린이 있었다. 내가 416합창단으로 참여하는 ‘민주주의 대합창’ 공연은 17일(토) 오후 3시반
    에 시작했다. 5.18민주광장에 마련된 특설무대에서였다. 서울 부산 안산 광주
    등에서 온 7개 시민합창단이 개별 공연으로 두 곡씩 부른 후 대합창단으로
    함께 두 곡을 불렀다. 광주는 광주였다. 7개 합창단 중 푸른솔합창단, 1987합
    창단, 광주흥사단합창단 3개가 광주 소재 합창단이었다. 푸른솔합창단(광주): 2015년 6월 ‘합창’을 통해 민주 인권 평화로 상징되는 ‘광주정신’을 전달하
    고, ‘광주공동체’의 희망을 노래하고자 창단했다. 2017년, 2018년 창작 뮤지컬 ‘빛의 결혼식-임
    을 위한 행진곡’ 공연을 성황리에 마쳤다. 615시민합창단(서울): 2009년 8.15행사 공연을 시작으로, 민족의 역사와 겨레의 삶에 수많은 아
    픔을 안긴 분단장벽을 허물고 남북 화해와 평화통일의 새 세상을 열어가기 위해 창단했다. 1987합창단(광주): 광주 전남의 1980년 5.18민중항쟁의 불꽃을 1987년 6월 항쟁의 횃불로 군부
    독재를 종식시키고 민주헌법을 쟁취한 그 뜻을 노래와 합창으로 계승하고자 2018년 창단했다. 광주흥사단합창단(광주): 1913년 도산 안창호 선생이 창립한 민족운동단체 흥사단. 독립운동, 대
    한민국의 민주화, 청소년 계몽, 육성운동으로 2017년 3월 창단, 형화와 자유를 노래한다. 박종철합창단)부산):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열사와 6월 항쟁의 정신을 기리고, 시민문화운동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고자 2016년 8월 16일 창단했다. 416합창단(경기안산):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단원고 희생자 유가족과 생존자 가족, 일반 시민으로 2014년 창단됐다. 소외와 불의, 불평등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곳에 함께 한다. 이소선합창단(서울):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의 영결식을 계기로 2011년 결성된 노동자 합
    창단이다. 서울시로부터 2020년 전문예술단체로 지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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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주의 대합창에서 불려진 노래 제목을 소개해 본다. 아, 민주정부/ 무궁화
    / 다시 만난 세계/ 타는 목마름으로/ 죽창가/ 깍지손 평화/ 그날이 오면/
    죽순밭에서/ 바람에 지는 풀잎으로 오월을 노래하지 말아라/ 개벽/ 껍데기는
    가라/ 인간의 노래/ 돌덩이/ 오월의 노래2/ 단결한 민중은 패배하지 않는다. 전체 합창단이 함께 ‘임을 위한 행진곡’과 ‘광주출전가’를 불렀다. 전야제 2부 순서를 연 뮤지컬 <봄의 겨울, 겨울의 봄>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겠다. 80년 봄과 2025년의 겨울이 중첩되는 판타지 스토리의 뮤지컬. 공연은 “계엄이 계엄이 계엄이 계엄이 계엄이 선포됐다.”를 반복해 부르면서
    시작했다. 이어서 “2024년 12월 3일 도시를 통제하고 국회를 해산하고 수많
    은 사람들을 붙잡아 가두겠다고 계엄령이 선포됐다.”라는 가사는 45년 광주
    와 현재의 서울을 관통하는 ‘계엄’을 보여 주었다.

    “응 엄마, 나? 여의도 가는 길.”
    “응 여보. 걱정말게. 서울 다 와 부렀어. 아 어치게 가만히 있나. 국회 앞에
    탱크가 처들어와부렀다는디!”
    이어서 노래한다. “하늘에는 헬리콥터가 거리에는 탱크부대가. 상상해 본 적
    없어. 이런 세상이 다시 올 거란 걸.”

    그랬다. 45년 전의 그 계엄령 세상이 21세기에 다시 올 줄은 나도 상상하지
    못했다. “추운 겨울이 더욱 추워질지도 모른다,”라고 노래하면 “안 돼! 우리
    가 만든 나라”라고 화답했다. “어떻게 가만히 있어. 학교에서 배웠는데. 나도
    다 알아. 이거 5·18 때랑 똑같은 거잖아. 우리도 광주 사람들처럼 나서야 되
    는 거잖아.”라고 젊은 여성이 외치면 “어쩌면 다시 봄이 오지 않을지 모른다” 라고 노래했다. 현재와 과거를 노래와 춤으로 연결해 주었다. 1980년 오월이
    2024년 12월이고, 광주의 영령이 오늘의 우리를 구했음을. 가수 이은미가 작곡가 김형석이 해석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광주에
    서 사람들과 같이 부르고 싶었단다. ‘서른 즈음에’, ‘가슴이 뛴다’ 그리고 ‘애
    인 있어요’를 열창했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라서일까, 시종 가슴 뭉클하고 눈
    물을 멈출 수 없었다. 작곡가 김종률은 임을 위한 행진곡은 “희생하신 분들에
    대한 존경, 죽음을 뛰어넘는 사랑의 찬사 그리고 물러서지 않겠다는 각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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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아” 작곡했다고 했다. 5·18전야제 브로셔의 글을 옮겨 본다. 민주항쟁의 연원 오월광주로 연어처럼 몰려오는 민주시민들. 고향 집 부모의 마음으로 뜨겁게 환
    영하는 오월 광주 공동체.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금남로에서 새로운 세계를 전망하다. 항쟁의 연원 5·18: 계엄의 밤, 장갑차 앞을 맨 몸으로 가로막은 시민들의 용기는 광주 시민군의 헌
    신이었습니다. 남태령의 새벽, 고립된 농민들을 끝내 지켜낸 연대의 마음은 오월 어머니들의 사랑이
    었습니다. 한남동의 눈보라를 맞으며 새로운 세계를 꿈꾸던 낭만은 민주대성회의 횃불이었습니다. 승리의 약속 5·18: 오월의 기억으로 내란과 맞서 싸우고 있는 국민들이 민주주의 승리의 염원을
    안고 광주로 달려올 것이며, 광주 공동체가 고향 집 부모의 마음으로 뜨겁게 환영할 것입니다. 서로에게 감사를 표하고, 서로를 응원하며, 내란청산과 민주승리를 약속하는 축제를 펼칩니다. 미래의 표상 5·18: 5·18은 미래의 표상으로 승화할 것입니다. 국민주권이 실현되는 민주국가, 국가
    주권이 실현되는 자주국가는 오월 광주가 꿈꾸었던 대한민국입니다. 계급과 계층, 성별과 세대를
    넘어 누구나 서로를 귀하게 여기며 존중하는 대동세상을 오월 광주가 먼저 체험했던 미래입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 그리고 ‘5.18헌법’ 5·18전야제 시민참여 부스의 인상을 정리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올해도 45년
    전 오월의 ‘주먹밥’이 있었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연대와 사랑의 밥을 3개나
    받아먹었다. 영화 <택시운전사>의 모델이 된 독일 기자 한스 패터를 기리는
    초록 택시와 운전자가 있었다. 그 앞에서 인증 사진을 찍어 제시하면 광주의
    소주 ‘잎새주’ 샘플 한 병 받을 수 있었다. “1980년 5월, 광주로 간 택시운전
    사”라는 문구와 초록 택시가 라벨로 붙어 있는.

    ‘아시아의 노벨평화상’이라 불리는 광주인권상을 아는가? 5·18기념재단이
    2000년부터 인권과 평화를 위해 기여한 민주화 운동가들에게 수여하는 상이
    다. 올해 수상자는 동남아시아에서 군사폭력과 인권침해에 맞서 생존자 보호, 진실 규명, 평화 구축 활동을 펼쳐온 인권 단체 ‘아시아 정의와 권리(Asia
    Justice and Rights, AJAR)’다. 특별상은 필리핀 코르딜레라 지역에서 34년
    간 예술을 통해 인권과 공동체 권리를 옹호해 온 ‘DKK문화동맹’이 받았다.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의 실제 주인공인 고 문재학 열사를 비롯한 민주
    유공자들의 묘비를 찾아보자. 구묘역에도 신묘역에도 너무나 어리고 젊은 얼
    굴들을 보라. “5·18정신 계승 민주유공자법 제정하라”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 유족·가족에 대한 교육지원, 취업지원, 의료지원, 대부, 양로지원, 양육지
    원 및 그 밖의 지원”이나 “국가와 지자체는 각종 기념·추모 사업을 실시하고
    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시설물이나 교양시설을 설치할 수 있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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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 정신 헌법전문 수록”이라 적힌 부채를 보았다. 홍보 부스에서 “청원 참
    여” 유인물이 배포되고 있었다. 5·18정신을 국가가 책임지고 헌법에 새겨야
    한다는 요지였다. 우원식 국회의장도 “광주의 희생과 단호한 투쟁이 있었기에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지켜졌다. 12·3 불법 계엄의 국민 승리가 바로 오월광주
    의 승리”라며 “5·18정신 헌법 전문 수록을 통해 대한민국을 지켜온 힘이 국
    민에게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새기겠다"라고 말했다. 5·18 정신을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현재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
    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 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
    하여....

    수록 후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
    과 불의에 항거한 4.19와 5.18의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
    명에 입각하여....

    민주주의 대축제 5.18 전야제를 다녀와서
    꿀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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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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