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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엄마의 메모가 들려주는 말 – 농 통역사 박수진의 이야기

    수어 통역사는 손으로 말하는 사람들과 입으로 말하는 사람들 사이의 다
    리가 된다. 한국수어를 제1 언어로 사용하는 농인들과, 한국어를 제1 언어
    로 사용하는 청인 사이에서 그들은 단어와 표정, 침묵마저 언어로 바꾸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 다리 위에 또 다른 다리가 존재한다면? 바로 ‘농(聾) 통역사’
    이다. 공식 명칭은 ‘청각장애인 통역사’이지만, 현장에서는 농 통역사라
    불린다. 이들은 청인 통역사조차 채 다 담아내지 못하는 농인의 삶과 언어, 그 미묘한 숨결을 대신 읽고, 대신 전한다. 농 통역사는 모든 농인을 위한 통역자이다. 왜냐하면 모든 농인이 수어를
    완전하게 구사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글로 대화하고, 어떤 이
    는 입 모양으로 말하고, 또 어떤 이는 오직 눈빛으로 세상을 받아들인다. 농인의 언어는 하나로 묶을 수 없다. 유년기의 언어 환경, 교육, 가족, 그리
    고 농 사회와의 연결 여부에 따라 언어의 형태도, 깊이도 달라진다. 그래서
    농 통역사는 단순한 ‘전달자’가 아니라, 마음의 결을 어루만지는 소통의
    안내자다. 그런 길을 걷는 한 사람, 박수진. 그는 두 아이의 엄마이고, 안산농아인협
    회 간사이며, 무엇보다도 자신의 이야기를 잃지 않은 한 명의 ‘나’다. 이
    글은 장애에 대한 담론이 아니라,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고, 성장의 기록이
    며, ‘엄마’라는 말이 품고 있는 깊이에 대한 증언이다.

    (안산 농아인 협회 간사 박수진)

    나는 농아인입니다. 나는 손으로 말하고, 눈으로 듣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입술로 소리를 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내 삶을 고요하다고 생
    각하지만, 나는 그 고요 속에서 너무나도 분명한 울림을 들으며 살아왔습니
    다. 그 울림은 언제나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언제나 ‘엄마’라
    는 이름으로 다가왔습니다. 나는 한 번도 혼자라고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누군가의 딸이었고, 누군가
    의 동생이었고, 누군가의 엄마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빠의 손 편지, 아빠
    의 눈물, 그리고 엄마의 수많은 메모. 말 대신 건네받은 글자들은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스며들었고, 내 삶을 꿰뚫는 선이 되었습니다. 내가 두 살 무렵이었을 거예요. 말을 좀 늦게 배운다는 것 외에는 그저 귀
    엽고 예쁜 막내딸이었어요. 어느 평범한 날, 나는 거실에서 놀고 있었고, 그
    뒤에서 컵이 떨어졌습니다. 집 안은 순간 정적이 흘렀고, 모두가 놀란 눈으
    로 나를 바라봤습니다. 그런데 나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어요. 소리
    를 듣지 못했던 것이죠. 그날 이후, 부모님은 병원을 전전하며 검사를 받으셨고, 결국 의사의 입에
    서 ‘청각장애’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그 순간, 부모님은 눈앞이 깜깜했

    다고 해요. 저는 변한 게 없었지만, 세상이 저를 다르게 보기 시작한 건 그
    때부터였습니다.

    (두 살 박수진님)

    내 고향은 부산입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방파제에 갔던 기억이
    또렷이 남아있어요. 바다를 바라보던 아버지의 손이 내 쪽으로 뻗어왔고, 나는 그 손을 잡았어요. 아버지는 나를 번쩍 들어 올려 안으시고, 이마를
    맞대며 웃으셨어요. 그리고 천천히 방파제 아래로 걸어 내려갔죠. 나는 아
    빠 품에 있어도 넘실거리는 파도가, 얼굴에 날리는 바닷물이 무서웠어요. 그 순간, 나는 입을 열어 처음으로 소리를 냈어요. “아빠.”

    아버지는 저의 목소리를 듣고,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어
    요. 그리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 앞에서 펑펑 울었습니다. 훗날 아버지
    에게 물었어요. 그날, 방파제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아버지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네가 살아갈 앞날이 너무 걱정돼서... 바보처럼 같이 죽으러 간 거였다. 그런데 네가 '아빠'라고 불러서... 정신이 번쩍 들었지.”

    아버지는 어린 내게 세상의 소리를 들려주고 싶어 하셨어요. 그래서 병원

    에 보내 구화 훈련을 시켰습니다. 휴지를 입에 대고 불어 찢는 연습을 매일
    같이했어요. 휴지가 찢어지지 않으면, 집에 돌아갈 수 없었죠. 나는 그 시간
    이 괴로웠고, 슬펐어요. 무언가를 말해야 했지만, 무슨 뜻인지 몰랐고, 들리
    지 않는 소리를 흉내 내야만 했어요. 입술은 움직였지만, 마음은 굳게 닫혔
    어요.

    * 구화인
    모든 청각장애인이 농인은 아닙니다. 유년기에 청각장애가 생긴 사람 중
    1보청기·인공와우 등 청각 보조장치를 사용하거나, 대화 상대방 입술
    의 움직임을 읽어서 상대방의 발화를 파악하고
    2발성 훈련을 하여 음성언어로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을 구화 인이라고
    합니다. 구화인은 청능훈련·구화법·발성 훈련 등을 통해 한국어를 제1 언어로
    사용하는 것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

    그러던 어느 날, 부모님은 이혼하셨고, 나는 생모의 손을 잡고 서울로 이
    사했어요. 이유는 몰랐지만, 오빠와 함께 낯선 도시에 전학을 가게 되었죠. 학교에서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고, 수업 시간은 고통이었어요. 청인들과
    함께하는 수업 시간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저는 바보처럼 앉아만 있어
    야 했죠. 하지만 쉬는 시간에는 달랐어요. 친구들과 뛰어다니며 재미있게
    놀았죠. 쉬는 시간만 기다리는 무의미한 학교생활, 초등학교 3학년 때였어
    요. 선생님이 장래 희망을 적어 내라는 것에요. 저는 장래 희망이라는 단어
    의 뜻도 몰랐죠. 가만히 앉아 있는 저에게 선생님은 직접 저의 장래 희망을
    적었어요. ‘왕자님과 결혼하기.’

    저도 모르는 저의 장래 희망은 왕자님과 결혼이 되었죠. 한글도 모르는 저
    는 멍청히 앉아서 쉬는 시간만을 기다리는 학교가 그래도 좋았어요. 나는

    그저 조용히 앉아 있다가, 쉬는 시간이 되면 친구들과 뛰어놀고, 청소하고, 다시 조용히 앉아 있는 그런 아이였습니다. 공부는 못했지만, 청소는 누구
    보다 잘했죠. 그래서일까요. 선생님은 나를 안쓰럽게 여기셨고, 엄마와 상의
    해 나를 농아학교로 전학 보냈어요.

    (서울 농아학교 운동장에서)

    농아학교는 내게 새로운 세상이었습니다. 나처럼 손으로 말하고, 눈으로
    듣는 친구들이 이렇게 많다니! 처음으로 ‘같다’라는 감정을 느꼈습니다. 기숙사 생활도 즐거웠어요. 밤늦도록 속닥속닥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얼
    굴을 마주 보며 수어로 수다를 떨었죠. 나도 평범한 아이였다는 것을 그곳
    에서 처음 알았습니다. 기숙사에서 생활하다 주말이면 집으로 갔어요. 보통
    오빠가 데리러 왔죠. 어느 날 오빠가 저에게 묻더군요. “수진아, 돈 있니?”

    저는 많지 않지만, 학교에서 주는 용돈이 있었어요. 가끔 용돈을 모아서
    오빠에게 주곤 했죠. 나에게 돈이 있냐고 물었던 그날, 오빠는 며칠을 굶은

    상태였어요. 엄마의 방임으로 오빠는 혼자 지내는 날이 많았어요. 저는 엄
    마에게 부산 할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떼를 썼어요. 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하면 보내주지 않겠죠. 그래서 할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꾀를 썼죠. 엄마는
    마지못해 오빠와 저를 부산에 다녀오라고 허락을 해줬죠. 부산에서 만난 아빠는 우리를 보고 눈물을 흘렸어요. 그날 이후, 지루한
    소송 끝에 오빠와 저는 아빠와 함께 살기로 했죠. 그때 제 나이가 초등학교
    6학년이었어요. 그 당시 아빠는 대전에서 생활하고 있었어요. 대전 아빠 집
    에는 처음 보는 언니가 있었어요. “이제부터 언니가 아니라 엄마라고 불러.”

    나는 그 말을 듣고 마음을 닫았어요. 나에게는 이미 엄마가 있었으니까요. 그녀를 무시했고, 눈도 마주치지 않았어요. 심지어 아빠에게 거짓말을 했어
    요. “그 언니가 날 괴롭혀.”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생리가 터졌어요. 너무나 무서웠
    죠. 화장실에 숨어 울고 있는 저에게 언니는 달려왔어요. 회사에서 집까지
    한달음에 달려와 저를 구해주셨죠. 생리대 사용법부터 모든 것을 알려주신
    언니는 그날부터 저에게 엄마가 되었답니다.

    (중학생 박수진 가족 사진)

    아이를 낳고 병원 침대에 누워 있을 때, 나는 엄마에게 조심스럽게 물었어
    요. “엄마는 왜, 아이를 낳지 않았어?”
    엄마는 내 곁에 누워 잠든 아기를 바라보며 말했어요. “너희들을 본 순간 알았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선물이라고. 하나님이
    이미 두 명이나 아이를 주셨는데, 또 아이를 낳을 필요가 있을까?”

    제가 고등학생 무렵이었을까요? 버스 정류장에서 엄마와 두런두런 이야기
    하며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죠. 그때, 곁에 앉아 있던 아주머니가 나에게 물
    었죠. “너는 어느 나라에서 왔니?” 제가 어눌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외국
    인인 줄 알았나 봐요? 엄마는 정색하며 아주머니에게 말했죠. “제 딸이에
    요.” 저는 분명 엄마의 입술에서 나오는 ‘제 딸이에요’라는 말을 읽었어
    요. 그때 저도 “우리 엄마예요.”라고 이야기해야 했는데 못 했어요. 죄송
    해요. 하지만 엄마의 ‘제 딸이에요’라는 말은 저에게 힘이 되었어요. 내
    가 엄마의 딸이구나. 그때부터 엄마는 나에게 하나밖에 없는 나의 엄마 그
    리고 서울 엄마는 생모가 되었어요. 엄마는 수많은 메모와 편지를 내게 남겨주셨습니다. 학교에 다녀오면 냉장
    고에 붙은 메모가 반겨주었고, 서랍 안에는 언제나 손 편지가 기다리고 있
    었죠. 내가 힘들 때마다, 외로울 때마다, 엄마는 어떻게 알았는지 편지를 남
    겼어요. 그 글들은 내가 버리지 못한 사랑의 기록입니다.

    내가 생각이 짧아서 엄마가 수어를 배우겠다고 했을 때, 저는 싫다고 했
    죠. 엄마가 수어를 알면 간섭과 잔소리가 더 심해질까 봐 그랬어요. 지금
    생각하면 제가 철이 없었어요. 엄마와 수어를 함께 배웠다면 지금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 텐데요. 그리고 엄마, 나는 한 번도 엄마가 나를
    낳지 않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엄마는 언제나 나의 엄마였고, 엄마
    의 메모 한 장, 편지 한 줄이 나를 살아가게 했어요. 내가 흔들릴 때마다, 엄마의 글이 나를 붙잡아줬어요. 그러니까 저에게 미안해하지 말아요. 엄마,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마지막으로 엄마에게 보내는 편지로 글을
    마칠까 합니다.

    (20살 박수진 가족사진)

    사랑하는 엄마에게

    엄마를 처음 만난 건 아마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였을 거예요. 그 시절
    나는 엄마를 “언니”라고 불렀지요. 상봉국민학교에 다니던 나는 종종 아
    빠 회사를 찾았고, 그때마다 엄마는 아이스크림을 사주고, 시원한 물도 건
    네주셨어요. 그런 순간들이 너무 좋아서, 나는 매번 엄마가 있는 그 공간을
    향해 들떴던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기곤 했어요. 그때의 나는 몰랐어요. 그 ‘언니’가 내 인생에서 가장 따뜻한 존재가 될 거라는 걸.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내가 아빠와 함께 지내게 되면서 그 ‘언니’가 어
    느 날 갑자기 ‘엄마’가 되었을 때, 어린 마음에는 그 변화가 너무 낯설고
    어색했어요. 좋아했던 만큼 당황스러웠고, 그만큼 거리를 두게 되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런 내 마음을 알았는지 몰라도, 엄마는 단 한 번도 내게
    서 멀어지지 않았어요. 언제나 다정했고, 꾸준했고, 따뜻했어요. 나를 기다
    려주고, 말없이 품어줬어요. 그래서 나도 모르게, 정말 자연스럽게 엄마를
    사랑하게 되었어요. 기억나요? 내가 흰 바지를 입고 학교에 갔다가, 월경 자국이 묻은 줄도 모
    르고 당황하며 집에 돌아왔던 날. 그날 엄마는 회사 일을 잠시 미뤄두고 나
    를 향해 달려와 주셨어요.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다정하게, 월경에 관해 이
    야기해 주고, 나를 부드럽게 감싸안아 줬어요. 처음 겪는 몸의 변화에 놀란
    나에게 엄마는, 생리보다 더 큰 따뜻함을 가르쳐주셨죠.

    감기로 앓아누웠을 때도, 몸살로 말 한마디 못 할 때도, 엄마는 언제나 내
    곁에 있었어요. 병원도 함께 가고, 약도 챙겨주고, 말없이 손을 잡아줬어요. 내가 엄마 껌딱지처럼 들러붙었던 시절, 엄마는 아마 많이 피곤했을 거예
    요. 그런데도 엄마는 지친 내색 한번 없이 나를 안아줬어요. 그 모든 순간
    에, 지금이라도 늦게나마 말하고 싶어요. 정말 고맙고, 정말 미안해요. 요즘 나는 다시 출근을 시작했어요. 아침마다 전쟁처럼 바쁜 하루가 시작
    되고, 나도 정신없이 준비하면서 준혁이와 하나까지 챙겨야 하니 숨 돌릴
    틈이 없어요. 그런데 그런 어느 날, 문득 엄마가 떠올랐어요. 엄마도 예전에
    출근 준비하며, 오빠와 나를 챙기고, 매일 아침 도시락까지 싸셨잖아요. 그
    모든 걸 해내면서도 내 앞에서는 늘 웃어주셨던 엄마. 그때는 왜 몰랐을까
    요. 왜 나만 힘들다고 여겼을까요. 요즘의 나는 많이 지쳐 있어요. 준혁이는 사춘기에 접어든 중학생이고, 하
    나는 초등학교 1학년이라 여전히 손이 많이 가요. 남편은 직장을 옮겨 정신
    이 없고, 나는 사회생활을 다시 시작하며 모든 것이 낯설고 버겁기만 해요. 그런데 그런 순간마다, 이상하게 엄마가 떠올라요. 엄마를 떠올리면 이상하
    게 마음이 놓이고, ‘그래, 나도 할 수 있어’ 하는 용기가 생겨요. 그건 아
    마, 내 안에 엄마가 주신 힘이 아직도 살아 있기 때문이겠죠. 엄마, 나를 그렇게 사랑해 줘서 고마워요. 내가 엄마에게 벽을 세울 때도, 뒤돌아설 때도, 엄마는 한결같이 다가와 줬어요. 그 사랑이 나를 사람으로
    키우고, 지금의 엄마로 만들었어요. 그래서 나도 이젠, 엄마처럼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되고 싶어요. 할머니가 하늘나라로 떠나시던 날, 내가 할머니
    앞에서 약속했었죠. “할머니, 엄마는 제가 꼭 잘 챙길 테니까 걱정 마시고 편하게 쉬세요.”

    그 약속, 변하지 않을 거예요. 어떤 순간에도 나는 그 약속을 지킬 거예요. 결혼하고, 아이 낳고 살아가는 동안 엄마는 내게 늘 멘토가 되어주었고, 따
    뜻한 위로가 되어주었어요. 준혁이 키우며 막막했던 때, 조언해 주고 힘이
    되어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우리 아빠요. 성격이 쉽지 않잖아요. 그런 아

    빠 옆에서 묵묵히 함께해줘서, 아빠의 빈틈을 채워줘서, 정말 감사해요. 앞
    으로는 엄마께 더 자주 안부 전화도 드리고, 더 자주 웃게 해드릴게요. 말
    로만이 아닌 마음으로, 삶으로 효도할게요.

    2025. 04. 05
    사랑합니다. 우리 엄마.

    덧붙이며
    이 글을 읽는 여러분께 조심스레 바라봅니다. 혹시라도 농아인을 향한 낯선
    시선이 있었다면, 이 글을 통해 마음이 조금은 바뀌었기를 바랍니다. 농아
    인도 여러분과 다르지 않은 딸이고, 엄마이고, 아내입니다. 우리는 ‘소리
    없이’ 살아가지만, 그 안에는 세상의 어떤 언어보다 깊고 진한 사랑이 있
    습니다. 제 글에서 그 사랑을 느끼셨나요?

    엄마의 메모가 들려주는 말 – 농 통역사 박수진의 이야기
    윤작가

    조회수 70

    2025-04-12
  • 여성의 기본 인권, 월경권 — 거대한 침묵과 차가운 방관의 장막을 넘어, 경기도 골목마다 다정한 존중과 평등의 푸른 숲을 일구어내는 감동의 여정

    편견의 그늘과 쉴 새 없는 생리의 공백 뒤편에서, 여성의 당연한 존엄을 지키며 평등한 내일을 빚어내는 눈부신 발자취를 마주하다

    여성이라면 누구나 겪는 자연스러운 생리현상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부끄러움과 은폐의 대상로 치부되며 씻을 수 없는 소외와 경제적 부담을 감내해야 했던 수많은 여성과 청소년들의 일상. 방관과 침묵의 장막을 깨부수고, 묵묵히 두 손을 모아 월경을 건강권이자 기본적 인권으로 바로 세우기 위해 나선 이들의 헌신 속에서 촘촘히 엮어 온 ‘여성의 기본 인권, 월경권’의 눈부신 발자취를 깊이 들여다보다.

    "우리는 과연 ‘월경은 개인이 알아서 해결해야 할 사적인 문제일 뿐, 사회나 공공이 개입할 일이 아니다’며 마음의 문을 닫아걸었던 차가운 방관의 장막을 걷어내고, 경기도 구석구석의 평범한 이웃들과 인권 활동가들, 그리고 공익활동가들이 손을 맞잡으며 저마다의 진심으로 평화와 상생의 품을 엮어내는 ‘월경권을 통해 존엄을 꽃피우는 인권 자치의 품’을 어떻게 활짝 열어갈 수 있을까?" 풀뿌리 여성 인권 자치와 보편적 건강권 보장의 잠재력을 발굴하고, 경기도 전역에 지속 가능한 상생과 평등의 숲을 깊이 일구어가는 감동의 여정을 깊이 조명한다.

    ‘여성의 기본 인권, 월경권’이 품은 3가지 핵심 과제와 비전

    1. 방관과 침묵의 장막을 허무는 ‘풀뿌리 월경권 보장 및 자발적 안전 생태계 구축’

      • 월경을 숨겨야 할 비밀이나 개인의 책임으로 치부하던 낡한 관행에서 벗어나, 경기도민과 공익활동가들이 동네 골목과 공공의 공간에서부터 직접 안전한 용품을 나누고 건강권을 챙기는 자발적 생태계 다지기.

      • "진정한 인권 자치의 완성은 거창한 복지 담론의 선언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동네 골목 작은 보건 사랑방에 모여 앉아 이웃들과 손을 잡고 청소년과 취약계층의 월경 용품 접근성을 꼼꼼히 살피며 따스한 온기를 전하는 소박한 실천에서 시작된다"는 철학 실천.

    2. 고립을 넘어 온기를 잇는 ‘시민 참여형 건강 감수성 및 연대 강화’

      • 월경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경제적 부담을 개인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지역 사회와 공익활동 현장이 함께 머리를 맞대어 지혜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공론장 창출.

      • "혼자서 거대한 편견과 경제적 벽과 마주하면 막막하고 두렵지만, 경기도 도민들이 손을 잡고 함께 목소리를 높이면 그 어떤 차별도 따스한 품으로 녹아내린다"라는 통찰.

    3. 경기도 31개 시·군 골목마저 평화와 평등의 그물망으로 잇는 ‘상생 월경권 네트워크’

      • 시·군의 경계를 뛰어넘어 경기도 내 여성 커뮤니티들과 도민들이 유기적으로 손을 잡고, 모든 이의 신체적 존엄이 차별 없이 보장되는 상향식 민주주의와 인권 자치 실현.

      • "모든 도민과 여성들이 소외되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로 오래도록 함께 웃을 수 있는 공정하고 평화로운 공생의 무대" 완성.

    현장의 온기로 채워졌던 뜨거웠던 토론과 교감의 시간들

    도내 각지에서 모인 여성 인권 활동가들과 평등한 경기도를 염원하는 수많은 도민이 한자리에 모여 월경권의 의미를 되새기고, 경기도를 진정한 '어떤 이도 배제되지 않는 평화와 인권의 고향'으로 만들기 위한 지혜를 모았던 공론장 및 연대 현장은 깊은 공감과 함께 뜨거운 연대의 온기로 가득 채웠다.

    • 참가자들의 진솔한 고백 및 상생 나눔 세션: "학창 시절 당장 월경 용품이 없어 불안하고 서러웠던 기억을 떠올리며, 오늘 이 자리에 모여 이웃들과 함께 '모든 여성이 안전하고 당당하게 월경할 권리를 누리자'며 손을 맞잡으니 비로소 세상을 바꾸는 진짜 따뜻한 온기가 내 가슴 깊은 곳에서 흐르고 있음을 깨닫는 벅찬 감동을 느꼈습니다"라며 눈시울을 붉히던 참가자들의 뭉클한 순간들.

    • 경기도형 인권 자치 도시 확산을 위한 유쾌한 브레인스토밍: "동네마다 주민들과 활동가들이 함께 모여 월경용품을 공유하고 건강 정보를 나누는 '우리동네 월경안심 사랑방'을 상설화하자", "시민들의 따뜻한 연대를 모아 더 큰 인권의 망을 만드는 '경기 월경권 연대 네트워크'를 튼튼하게 꾸리자"며 쉴 새 없이 아이디어를 쏟아내던 반짝이는 눈빛들.

    • 응원과 다짐의 피날레: "비록 우리가 마주한 편견의 파고와 제도적 벽이 때로는 높고 매섭다 할지라도, 경기도 구석구석에서 피어나는 이 지혜롭고 푸른 환대의 손길들이 모여 모든 도민이 소외되지 않고 오래도록 함께 웃을 수 있는 공정하고 평화로운 내일을 활짝 열어주기를 바란다"며 환한 미소와 박수로 마무리된 연대.

     

    여성의 기본 인권, 월경권을 소개합니다.
    주야

    조회수 4717

    2025-01-15
  • ‘모두를 위한 화장실(줄여서 ‘모장실’)’은 성별, 장애 유무, 나이, 신체적 조건 등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나 차별이나 배제 없이 안전하고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설계된 1인용 독립 공중화장실을 뜻합니다.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의 공익웹진 등 시민사회 영역에서도 활발히 다뤄지고 있는 인권·배리어프리(Barrier-free) 의제 중 하나입니다.

    주요 특징 및 도입 배경

    • 배제 없는 공간: 기존의 공중화장실은 주로 비장애인, 성인, 그리고 남녀 성별이분법에 맞춰져 있어 누군가에게는 이용이 매우 불편하거나 불가능했습니다. 모장실은 이러한 경계를 허물고 모든 사회 구성원이 기본권을 누리게 하자는 취지에서 출발했습니다.

    • 다양한 이용자 배려:

      • 장애인 및 노인: 성별이 다른 활동지원사와 함께 화장실을 이용해야 하는 장애인이나, 휠체어 이용자, 거동이 불편한 노인 등이 접근하기 쉽습니다.

      • 영유아 동반자: 성별이 다른 보호자와 함께 온 아이, 기저귀 갈이대가 필요한 보호자가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습니다.

      • 성소수자 및 기타: 지정성별과 자신이 인식하는 성별이 다르거나 기존 남녀 화장실 이용 시 겪는 시선 압박을 덜어주며, 월경 등 특정한 생리적 필요를 겪는 이들도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습니다.

    • 구조적 형태: 여러 사람이 함께 쓰는 다인용 형태가 아니라, 내부에 변기와 세면대, 안전바, 기저귀 갈이대 등이 모두 갖추어진 1인용 독립 공간으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두를 위한 화장실(모장실)이 모징?
    심지

    조회수 5219

    2025-01-10
  • [기획] 월경을 월경이라 부르지 못 하고 — 거대한 침묵과 은폐의 장막을 넘어, 경기도 골목마다 다정한 이름과 인권의 푸른 숲을 일구어내는 감동의 여정

    편견의 도시와 쉴 새 없는 터부의 그늘 뒤편에서, 월경을 당당한 이름으로 부르며 존엄을 되찾는 눈부신 발자취를 마주하다

    오랜 세월 동안 부끄러운 것, 숨겨야 하는 것으로 취급되며 입에 올조차 꺼려졌던 차가운 사회적 통념 속에서. 자연스러운 생리 현상임에도 '그날'이나 숨은 단어로 대체되어 온 월경의 권리를 바로 세우고, 모든 이가 건강하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묵묵히 손을 잡고 걸어온 이들의 눈부신 발자취를 깊이 들여다보다.

    "우리는 과연 ‘월경은 그냥 혼자 숨어서 해결해야 하는 은밀한 일일 뿐’이라며 마음의 문을 닫아걸었던 차가운 방관의 장막을 걷어내고, 경기도 구석구석의 평범한 이웃들과 여성 인권 활동가들, 그리고 공익활동가들이 손을 맞잡으며 저마다의 진심으로 평화와 상생의 품을 엮어내는 ‘월경을 월경이라 당당히 부르며 인권을 꽃피우는 자치의 품’을 어떻게 활짝 열어갈 수 있을까?" 풀뿌리 여성 건강 자치와 인권의 잠재력을 발굴하고, 경기도 전역에 평등과 존중의 자치 숲을 깊이 일구어가는 감동의 여정을 깊이 조명한다.

    ‘월경을 월경이라 부르지 못 하고’가 품은 3가지 핵심 과제와 비전

    1. 방관과 침묵의 장막을 허무는 ‘풀뿌리 월경 인권 옹호 및 건강 생태계 구축’

      • 월경을 부정한 것으로 치부하거나 터부시하던 낡은 관행에서 벗어나, 경기도민과 공익활동가들이 동네 골목과 일상에서부터 월경을 자연스러운 권리로 인식하고 건강한 정보를 나누는 자발적 생태계 다지기.

      • "진정한 건강 자치의 완성은 거창한 보건 정책 선언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동네 골목 작은 공간에서 이웃들과 손을 맞잡고 월경용품을 나누며 편견 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소박한 실천에서 시작된다"는 철학 실천.

    2. 고립을 넘어 온기를 잇는 ‘시민 참여형 건강 감수성 및 연대 강화’

      • 월경 빈곤이나 신체적 고통을 개인의 부주의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지역 사회와 공익활동 현장이 함께 머리를 맞대어 서로를 돌보는 지혜로운 공론장 창출.

      • "혼자서 월경의 고통과 사회적 시선을 감당하면 막막하고 두렵지만, 경기도 도민들이 손을 잡고 행동하면 그 어떤 편견의 벽도 따스한 품으로 녹아내린다"라는 통찰.

    3. 경기도 31개 시·군 골목마저 평화와 존엄의 그물망으로 잇는 ‘상생 여성건강 네트워크’

      • 시·군의 경계를 뛰어넘어 경기도 내 여성 단체들과 도민들이 유기적으로 손을 잡고, 모든 이의 건강권이 보장되는 상향식 민주주의와 인권 자치 실현.

      • "모든 도민과 이웃들이 소외되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로 오래도록 함께 웃을 수 있는 공정하고 평화로운 공생의 무대" 완성.

    현장의 온기로 채워졌던 뜨거웠던 토론과 교감의 시간들

    도내 각지에서 모인 여성 인권 활동가들과 보건 실천가들, 그리고 평등한 세상을 염원하는 수많은 도민이 한자리에 모여 월경에 얽힌 차별과 침묵의 역사를 깨부수고, 경기도를 진정한 '모든 몸이 존중받는 건강의 고향'으로 만들기 위한 지혜를 모았던 공론장 현장은 깊은 공감과 함께 뜨거운 연대의 온기로 가득 채웠다.

    • 참가자들의 진솔한 고백 및 상생 나눔 세션: "그동안 월경이라는 말을 꺼내는 것조차 눈치를 보며 숨겨야 했는데, 오늘 이 자리에 모여 이웃들과 함께 당당하게 '월경'을 입에 올리고 서로의 경험을 나누니 비로소 내 몸을 온전히 사랑하는 진짜 자유를 얻은 벅찬 감동을 느꼈습니다"라며 눈시울을 붉히던 도민들의 뭉클한 순간들.

    • 경기도형 여성 건강 자치 도시 확산을 위한 유쾌한 브레인스토밍: "동네마다 주민들과 함께 월경의 가치와 건강한 정보를 나누는 '우리동네 당당한 월경 사랑방'을 상설화하자", "편견을 넘어 서로의 건강권을 지지하는 '경기 여성건강 연대 네트워크'를 튼튼하게 꾸리자"며 쉴 새 없이 아이디어를 쏟아내던 반짝이는 눈빛들.

    • 응원과 다짐의 피날레: "비록 우리가 마주한 오랜 편견의 벽과 침묵의 파고가 때로는 높고 매섭다 할지라도, 경기도 구석구석에서 피어나는 이 지혜롭고 푸른 연대의 손길들이 모여 모든 도민이 소외되지 않고 오래도록 함께 웃을 수 있는 공정하고 평화로운 내일을 활짝 열어주기를 바란다"며 환한 미소와 박수로 마무리된 연대.

    정직한 땀방울과 다정한 손길로 그려가는 경기도의 찬란한 내일

    세상을 바꾸고 진정한 건강 자치와 공생의 시대를 여는 위대한 힘은 차가운 사회적 통념이나 거창한 보건 복지 담론 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늘 아침 경기도의 좁은 골목길에서 이웃의 손을 먼저 잡고 "월경을 월경이라 부르며 서로의 건강과 존엄을 지켜주자"며 따스한 온기를 건네는 평범한 시민들과 인권 활동가들의 정직한 땀방울과 다정한 연대 위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방관과 침묵의 장막을 걷어내고 경기도 구석구석에 평화와 인권의 숲을 영원히 일구어가는 공익활동가들과 도민들, 그리고 언제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 경기도 곳곳에서 피어나는 이 지혜롭고 푸른 온기들이, 모든 도민이 소외되지 않고 오래도록 함께 웃을 수 있는 공정하고 지속 가능한 경기도의 내일을 활짝 열어주기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월경을 월경이라 부르지 못 하고
    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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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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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의 아카이브 에디터로서,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의 구성원들은 어떤 활동을 하다가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이런 고민을 매니저님과 나누던 중, 정말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다 오신 구성원분들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이를 여러분께 알려드리기 위해서 인터뷰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로 소개해드릴 구성원은 이정희 성장지원팀장입니다. 인터뷰는 수원에 위치한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 공익나눔 소회의실에서 진행하였습니다.

     

     

     

    1. 전에 다니던 직장이 어떤 곳인지 소개하자면?

     

    이정희 성장지원팀장 : 경기여성연대라는 여성단체에서 활동을 했었다. 1994년도 당시 가정폭력을 당한 여성을 구명하기 위해서 경기지역 여성들이 모이게 되었는데 가정폭력 피해여성은 폭행을 지속적으로 당하다가 남편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졌다. 하지만 정당방위가 인정되지 않고 살인죄로 수사가 이루어지자 이에 대응하며 여성들이 결집하였고 구명운동을 했다. 사건이 정리 된 후 모인 여성들이 계속 이어서 활동을 하자는 뜻을 모아 경기여성연대를 발족하게 되었고, 현재 20년 넘게 활동 중이다.

     

     

     

    2. 경기여성연대에서 일을 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이정희 성장지원팀장 : 27살쯤 여성운동을 시작했다. 사실 원래 여성단체나 여성인권에 대해 잘 몰랐다가 자원봉사를 오래 하게 되면서 복지관에서 봉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 복지관이 여성단체가 운영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여성학을 접했다. 고향이 경상도였기 때문에 여성학을 접하고 나서 내 삶을 돌아보니 모든 차별 속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의 충격은 마치 프라이팬으로 뒷통수를 한 대 맞은듯한 느낌이었고 이후부터 분노가 일기 시작해서 나같은 여성들이 몰라서 당하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여성운동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때는 당연한 줄 알았던 가부장성, 사실 가부장성이 뭔지도 몰랐지만 예를 들면 집안일을 여자들만 하고 오빠와 남동생은 손도 대지 않는 문화가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원래는 경남 마산에서 일을 하다가 수원으로 이사오게 되면서 경기여성연대에 들어왔는데, 연대의 활동 방향과 잘 맞아서 10년 넘게 일을 해왔다.

     

     

    3. 경기여성연대에서 일했을 당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일이 있나요?

     

    이정희 성장지원팀장 : 굉장히 많다. 그 중에서 크게 세 가지 정도가 기억에 남는데, 첫 번째는 경기도기지촌여성지원조례를 통과시킨일이다.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으나 미군 위안부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1950년대 한국전쟁 이후 정부가 주한미군을 위해 성매매 행위를 조장하여 기지촌여성들이 인권침해를 당한것에 대해 2012년부터 관련단체들과 피해여성들의 인권회복과 피해보상에 대한 활동이 시작되었다. 여러 활동 중에 피해여성과 함께 국가를 상대로 집단소송과 지원조례 제정에 대한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 했으며, 수 많은 기자회견과 토론회에서 피해 사실을 공론화 하며 기나긴 싸움 끝에 2020[경기도 기지촌 여성지원등에 관한 조례]가 통과되었다. 또한 국가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는 [국가가 책임이 있다]는 고등법원 판결을 통해 피해여성들의 인권이 회복 되는 큰 결과를 거두기도 했다.
    사실 정부를 상대로 재판을 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다. 무엇보다 당사자들이 겪었던 큰 아픔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진술해야 하는 과정에서는 정말 힘들어 하셨다. 그래도 모든 개인의 인권은 존중받아야 마땅한 것이니 힘내시라고 지지하면서 결국 승소하고 언론에도 많이 보도되어 피해여성들의 인권회복 및 사회 인식변화의 계기가 되었으며, 현재 평택에 [기지촌여성평화박물관]까지 건립 되었다.

    두 번째로는 성평등의식 확산 운동을 많이 했다. 아직 우리 사회는 성평등한 사회라고 하긴 어렵다. 사회생활, 정치, 경제, 문화 등 많은 분야에 차별이 있다. 그리고 경기도는 여성단체의 지속적인 요구로 [경기도성평등기본조례]로 개정되었다. 사실 성에는 양성만 있는 것이 아닌데 아직도 양성평등에 의한 정책들로 소수성들은 차별과 소외 받는 일들이 많다. 경기도 내 지역을 다니면서 성별에 따른 차별, 편견, 비하 및 폭력없이 인권을 동등하게 보장해야 한다는 기자회견, 길거리캠페인, 1인피켓, 연극공연 등 참 많은 활동을 해왔다.

    세 번째로는 [경기도 여성청소년 보건위생물품 지원에 과한 조례]를 만든 일이었다. 원래는 취약계층 여성들만 생리대를 지원받았다. 그런데 신발 밑창으로 생리대를 대신한다는 기사가 나오고 굉장히 충격을 받았다. 우리가 여성 인권을 대변한다고 하지만 이런 세부적인 부분을 챙기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생리대 보편 지급을 조례로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무상급식을 하듯이 생리대를 취약계층만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지급이 되어야 한다는 토론회 등 조례 제정을 위한 활동을 했다. 그 결과 2020년 만11세이상~18세 이하의 여성청소년에게 보건위생물품을 지원할 수 있는 조례가 통과되었다. 또한 획일적으로 패드형 생리대만 지급되는 것이 아닌, 월경컵 등 여러 가지 원하는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했다. 여성의 건강과 환경까지 생각하는 중요한 문제이며, 무엇보다 월경에 대한 사회 인식개선이 되어야 한다. 내가 어릴 때만해도 생리대는 숨겨야 하는 물품으로 검은 봉지에 싸서 다녔는데 이제는 여성청소년들에게 안심하고 월경할 권리가 당연시 되어야 한다.

     

     

     

    4. 경기여성연대에서 일하면서 뿌듯함을 느낀 순간이 있었나요?

     

    이정희 성장지원팀장 : 여러 활동을 하면서 순간 순간 뿌듯함을 느낄때는 참 많다. 그 중에서도 앞서 말했던 미군 위안부 관련해서 승소하고, 조례를 만든 순간에 가장 뿌듯함을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경기도성평등기본조례]로 개정한 활동들이 있다. 사실 정말 변화하기 어려운 일들을 조금씩 이루어내고 해낸 것이기에 매우 뿌듯했다.

     

     

     

    5. 앞서 말한 일들을 추진할 때 가장 장애물이 되었던 것은 무엇이었나요?

     

    이정희 성장지원팀장 : 여성운동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운동을 하는 데에는 그만한 목적이 있다. 그런데 여성운동의 가장 큰 걸림돌은 사회 인식이다. 예를 들면 여성은 감정적이며, 논리적이지 않다. 또는 여성이 주장하는 것을 싫어하는 식이다. 그런 인식을 겪어가면서 여성운동을 해온다.

    그 다음으로는 실질적인 장애물은 인건비의 부족이다. 10년 가량 월급을 100만 원 정도 받고 일을 했다. 금액 보다는 하는 일의 가치가 더 높기 때문에 자부심으로 살았다. 여성들과 사회가 변화하는 모습을 봐왔으니 급여 같은 건 장애물이라고 할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프로젝트 사업을 하기 위해서 사업비, 인건비가 지출되는데 보통 단체에서의 활동가는 1명 내지 2명이다. 이들이 인건비를 받으면서 정부를 상대로 큰 목소리를 낼 수 없다. 보통 이러한 비용은 회원들의 회비로 충당을 하게 된다. 경기지역에 있는 여성단체는 4개가 있는데, 경기여성연대, 경기여성단체연합, 경기자주여성연대, 경기여성단체협의회이다. 이렇게 4개 단체가 네트워크를 이루어서 큰 사업을 대응하기도 하고, 여성 관련된 모든 사업을 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6. 그렇다면 시민의식을 개선할 방안을 생각해보신 적 있나요?

     

    이정희 성장지원팀장 : 사람들에게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공연이나 연극 한편을 만들어서 보여주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개인적으로 문화 예술 분야를 좋아하기도 해서 연극이나 노래 공연을 지역을 돌아다니며 해왔다. ‘엄마는 지금 일하고 있다라는 연극을 만들어서 공연했는데, 엄마가 밖에 나가서 일하고 돌아오면 남편이 피곤하다며 양말을 던지면서 눕고, 육아도 엄마가 다 하는 내용이다. 전하고자 하는 것을 글이나 말로 하는 것보다 연극을 통해서 보여주니까 시각화되어서 더욱 전달이 잘된다. 연극을 보면서 몰입하여 우시는 분도 있었으며 특히 경기 외곽은 가부장적인 정서가 더욱 심하기에 공감을 하는 분들이 많다. 우리는 이 연극을 남성들에게 더 많이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시청, 공무원, 군인을 대상으로 보여주려고 전화도 많이 돌렸다. 물론 보다가 중간에 나가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런 과정에서 하나하나 단계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덧붙이자면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반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도 여성운동 또는 환경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사회가 유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활동은 하지 못하더라도 후원을 하는 등 꾸준한 관심을 가지는 시민의식이 필요하다. 여성운동을 할 때 돈 때문에 활성화가 되지 못하는 부분이 아쉽다. 우리는 모든 여성들이 평등해질 때까지 우리는 계속 간다는 구호를 외치곤 한다. 같은 여성끼리 지원해주고 연대하는 힘이 필요하다.

     

     

    7.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에서 일하면서 새로 생긴 목표가 있나요?

     

    이정희 성장지원팀장 : 목표가 있어서 그 목표를 이루려고 이곳에 왔다. 경기 시민단체연대에서 운영위원장을 두 번 했었는데 시민단체가 굉장히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들은 금전을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니기에 이렇게 일을 하고 있지만, 앞으로 세대는 교체될 것이고 윗세대는 학생운동과 민주화정신의 영향으로 열정페이로 일을 하지만 이후 청년들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고 우리가 요구할 수도 없다. 그렇기에 시민단체가 안정적인 기반을 가지고 시민운동을 할 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다. 고민을 해보니 하나의 센터를 만들어서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지원비를 제공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이든 시작이 제일 어려운데 그 과정을 함께해서 도와주고 싶어서 온 것이고 그 목표는 그대로 가지고 있다. 프로젝트에 매몰되면 정말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한다. 그런 어려움을 줄여주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어 그들이 하고싶은 운동을 할 수 있게 도와줘야 한다.

     

     

    8. 앞으로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갔으면 하나요?

     

    이정희 성장지원팀장 : 일단 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센터가 정말 중간지원조직으로써 해야 하는 일을 독립적이고 자율성 있게 하고 싶은데 아직 초반이라 그러지는 못한다. 기반이 다져져야 하는 시간과 기반이 필요한데 공약을 받고 시민단체들이 만든 센터라서 여러 의견들을 수렴하여야 한다. 흔들림 없이 안정적으로 지역의 활동가들이 원하는 것을 해줄 수 있게 방향을 같이 고민하고, 같이 나누고 필요한 대로 유동적으로 방향을 바꿀 수 있는 것이 결국 우리가 나아가야 하는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최종적인 목적지는 시민단체에서 일하면서 뿌듯함을 느끼며 충분히 활동할만하다는 말을 들을 때까지다. 시민사회가 활성화되지 않으면 지속적인 사회가 될 수 없다.

     

     

     

     

    9. 마지막으로 하고싶은 말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이정희 성장지원팀장 : 시민단체 활동을 하고 나서 후회를 해본 적이 없다. 이 길을 잘 왔다고 생각한다. 이 일을 하면서 나 자신의 성장도 많이 했고 그 과정 속에서 수많은 깨달음이 있었기에 이 활동에 대해서 후회는 없다. 내가 자식이 있었다면 엄마는 이런 활동을 하고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자부심이 있다. 다른 시민활동가들도 이런 마음가짐이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시민사회 활성화가 꼭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한 개개인이 모여서 일하고 있기는 하지만 결국 다 아울러서 우리 사회가 크게 변했으면 좋겠다. 지금 내 역할은 조그맣지만 사회가 변화하는데 참여했다는 사실에 의미가 있다.

     

     

    본 에디터는 이정희 팀장님의 공익활동 경험을 인터뷰를 통해 전해 들으며 배울 수 있던 점이 아주 많았습니다. 경기여성연대에서도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에서도 위치와 상황에 관계없이 팀장님이 생각한 사회적 가치를 전달하기 위해 차근차근 만들어가시는 모습이 상당히 흥미롭고 인상 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직접 발로 뛰었던 생생한 이야기와 실무자가 생각하는 앞으로 센터의 방향성을 듣고 센터의 에디터로 전달할 수 있어 행복합니다.

     

    [인터뷰] 무슨 일을 하다 왔니? - 이정희 성장지원팀장
    Tommy

    조회수 553

    2021-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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