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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고 2학년 2반 박혜선 양 엄마 임선미 님
날씨가 더워지니 올해 첫 수박을 샀다. 큰 쟁반에 놓고 쩍! 소리내며 가른다. 붉은 과육에 까만 씨에, 단물이 쟁반에 흐른다. 이래서 멕시코의 화가 프리다 칼로Frida Kahlo는 생의 마지막에 그린 수박 정물화에 ‘인생 만세(Viva la Vida)’라는 제목을 붙였을까. 단물이 뚝뚝 떨어지는 수박을 한입 베어 먹으며, 나도 모르게 “비바 라 비다”를 외치니 말이다. 스페인어는 전혀 모르면서도 수박이 주는 달콤한 청량감에 삶의 기쁨을 노래한다.
수박만이랴. 꽃과 나무와 하늘과 햇빛이 생명의 기운을 뿜어내는 계절이다. 안산 상록구청 1층 갤러리 ‘혜안’에 가면 생명 가득한 그림을 볼 수 있다. 세월호 유가족 엄마들의 유화전(6월 12일~7월 3일)이다. 삶의 고통을 생명의 빛으로 그린 “빛의 정원, 또바기 유화전’이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나는 치유되고, 삶은 아름다웠다.”라 고백하는 사람. 세월호의 별 단원고 2학년 2반 박혜선 양 엄마 임선미 님을 만나 보았다.

Q 또바기 유화전 축하합니다. 자기소개와 근황을 들려주세요.
단원고 2학년 2반 박혜선 엄마 임선미입니다. 이번 전시회에 유화 여섯 작품을 냈어요. 한 10년 또바기 모임에서 그림을 배우고 있어요. ‘또바기’는 아름다운 순우리말인데요. “언제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겠다”는 모임이죠. 저는 원래 유아교육을 전공했고 세월호 참사 전에는 어린이집 교사도 하고 아이돌보미도 했어요. 참사 이후에 도저히 아이들 보는 게 어려워서 못 하다가 올해 3월 다시 일을 시작했어요. 어린이집 등원 도우미로 오전 두 시간 돌보는데, 세 살 네 살 아이들이 얼마나 예쁜지 몰라요. 아이들이 안기고 웃어주면 저도 모르게 웃게 돼요. 오늘도 아이들과 웃고 노래하고 춤추고 왔어요. 아이들이 주는 에너지가 참 커요. 집에 돌아올 때 기분이 좋아지고 삶에 의욕이 생겨요.

Q 결혼 후에 계속 일하셨나요?
결혼 전에는 광명시청에서 비정규직 공무원으로 근무했어요. 결혼하면서 일을 그만두고 시어머니를 모시고 애들 키웠죠. 그때는 당연하게 그랬어요. 아이들도 직접 키우고 싶었고요. 두 딸을 연년생으로 낳아 키우며 전업주부로 오래 지냈죠. 둘째인 혜선이가 IMF 때 태어났는데, 남편 사업이 힘들어지면서, 아끼고 살아도 경제적으로 많이 어려웠죠. 그래도 아이들 키우는 재미로 버텼어요.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는 것만 봐도 행복했거든요. 애들이 중학교 가면서 어린이집 보조교사 일을 시작했고, 아이돌봄 서비스도 했어요. 저는 원래 아이들하고 있는 걸 좋아했어요. 아이들 눈높이에서 이야기하고 노는 게 즐거웠어요.


Q 지금 하고 있는 ‘빛의 정원-또바기 유화전’에는 언제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요?
세월호 참사 이후 천주교 수원교구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을 위한 ‘생명센터’를 운영했어요. 그 안에 여러 치유 프로그램이 있었죠. 도예도 하고 천아트도 하고 미술도 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끝난 프로그램들이 많았지만, 그림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어요. 그림 선생님 강사료, 작업실에 그림 도구며 밥값까지 다 지원되니 계속할 수 있었어요. 와동성당 홍 신부님이 정말 큰 힘이 돼주셨어요. 신부님은 늘 우리를 가족처럼 대해주셨어요. 기도도 함께하고, 엄마들이 조금이라도 숨 쉴 수 있도록 여러 프로그램을 마련해 주셨죠. 그 덕분에 그림을 배우고 이렇게 전시회도 할 수 있게 됐어요.

Q 그림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어떤 마음이었나요?
그림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어요. 학교 다닐 때도 미술 시간이 제일 싫었어요. 소질도 없고 자신도 없다고 생각했죠. 그래도 그림이 그리고 싶어서 1년 늦게 들어왔어요. 다른 엄마들이 너무 잘 그리는 거예요. 저는 창피해서 제 그림을 다른 사람이 못 보게 돌려놓고 다녔어요. ‘나는 왜 이것밖에 못 그리지?’ 그랬는데 하다 보니까 조금씩 달라졌어요. 색을 쓰는 법도 배우고 빛을 표현하는 방법도 배우고요. 생각하며 그리다 보니 ‘똥손’이 ‘은손’ 정도는 된 거 같아요. 지금도 어렵지만 처음보다는 훨씬 나아졌죠. 그림 그리는 시간을 좋아하고요.
Q 그림 그린다는 게 어떤 의미가 있던가요?
가장 큰 건 마음이 치유되는 거죠.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그 시간만큼은 그림에 집중하게 돼요. 저는 원래 음악 들으면서 뭘 못 하는 사람이에요. 그림을 그릴 때는 그림만 봐야 해요. 색을 맞추고 명암을 넣고 붓질하다 보면 집중하게 되고 마음이 정리되고 시간이 훌쩍 지나가요. 힘들어서 한동안 쉰 적도 있어요.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다시 하고 싶더라고요. 왔더니 엄마들이 예전과 똑같이 맞아줬어요. 마치 어제 본 사람처럼요. 그게 참 고마웠어요. 우리 세월호 엄마들은 서로 설명하지 않아도 알거든요. 왜 힘든지, 왜 말이 없는지, 왜 갑자기 울게 되는지, 왜 쉬고 싶은지, 다 아니까요.

Q 지금 함께 그림을 그리는 엄마들 이야기도 좀 해 주실까요?
지금은 여덟 명이 꾸준히 활동하고 있어요. 8반 엄마들이 많아요. 강지은(지상준 엄마), 고이경(임건우 엄마) 송미점(박선균 엄마), 이미숙(임현진 엄마) 이지연(김제훈 엄마), 그리고 1반 안명미(문지성 엄마), 10반 김경애(구보현 엄마), 그리고 저. 예전에 더 많을 때도 있었지만 힘들어서 떠난 분들도 있고 건강 문제로 못 나오는 분들도 있어요. 우리는 매주 화요일에 본오성당에 모여서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그림을 그려요. 그림 한 점 완성하기까지 몇 달 걸리기도 해요. 부지런한 어떤 엄마는 집에서도 계속 작업하지만 저는 화요일만 해요. 전시회를 열 때면 서로 작품을 봐주고 응원해요. 서로 비교하기보단 자기 작품을 끝까지 해낸다는 게 더 중요해요. 서로 응원하며 하죠. 건우 엄마가 디테일 표현이 탁월해요.

Q 혜선이 이야기해 주세요. 어떤 아이였나요?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였어요. 제가 혜선이를 너무 이뻐해서 ‘우래기(우리애기)라 불렀어요. 연년생이었지만 혜원이도 동생을 ‘우래기’라고 했죠. 언니와 엄마를 무수리처럼 부리는데도 우리는 혜선이 말이라면 무조건 오케이였어요. 참 신기했어요. 삼겹살 비계도 발라 주고 바지락도 까줘야 하는 상전이었죠. 여섯 살 때부터 안경을 썼어요. 아기가 거꾸로 있어서 수술로 낳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 과정에서 태변을 먹어서 눈이 나빠진 게 아닌가 싶었어요. 선천적이라 라식도 라섹도 할 수 없는 상태라니 늘 마음이 쓰였죠. 집에서는 조용한 애가 학교 행사에선 노래하고 춤추는 걸 너무 잘했어요. 무대만 올라가면 완전히 달라지는 거죠. 안산시 청소년 종합예술제에 나가서 2등을 한 적도 있어요. 저는 그것만으로도 대단하다 생각했는데 혜선이가 집에 와서 울더라고요. 자기 팀이 더 잘했는데 친구가 1등을 한 게 억울했대요. 그때 처음 알았어요. ‘아, 우리 딸이 승부욕이 있구나. 노래를 정말 잘하는구나!’ 깜짝 놀랐어요. 평소에는 잘 몰랐던 모습이었죠.
Q 혜선이의 꿈은 방송작가 국어 선생님이었잖아요?
글 쓰는 걸 참 좋아했어요. 처음에는 문예창작과에 가고 싶다고 했고, 나중에는 동국대 국문학과에 진학해서 방송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어요. “나 꿈을 정했어. 수학여행 갔다와서 공부 열심히 할 거야.”라던 말이 지금도 귓가에 맴돌아요. 2018년 11월 사단법인 한국방송작가협회가 혜선이를 ‘명예 방송작가’로 위촉해 줬어요. 명예회원증으로 혜선이의 꿈을 기억해 주니 감사히 받았어요. 저는 글쓰는 건 혜원이가 잘하고 음악 쪽 재능은 혜선이가 많다고 생각했어요. 일기도 열심히 썼고 글 쓰기 좋아했지만, 피아노도 잘 쳤고 노래도 정말 잘했어요. 절대음감이 있었어요. 혜원이가 먼저 음악 쪽으로 방향을 정하니 혜선이는 공부 쪽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더라고요. 지금 생각하면 어떤 길을 가도 자기 몫은 충분히 해냈을 아이였어요.

Q 엄마로서 가장 미안한 기억은 무엇인가요?
사춘기 때 일이에요. 친구 관계 때문에 왕따 비슷한 경험으로 힘들어했는데 제가 “혹시 너한테도 문제가 있는 거 아니냐” 한 적이 있어요. 부모로서 객관적으로 보려고 한 건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니더라고요. 큰딸 혜원이도 이야기했어요.
“엄마는 그때 무조건 혜선이 편을 들어줬어야 해.”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혜선이는 엄마에게 위로받고 싶었을 텐데 저는 오히려 상처를 준 거죠. 지금도 미안해요. 그리고 더위를 타고 땀을 많이 흘리는 혜선이는 에어컨 집에 살아본 적 없다는 게 마음 아파요. 에어컨 켜는 게 미안해요. 이모네 갔다오면 “엄마, 우리는 언제 화장실 두 개 있는 집으로 이사가?”라고 말하던 걸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져요. 지금 우리는 화장실 두 개 있는 집에 사는데 혜선이는 없네요.

Q 참사 이후 새롭게 알게 된 혜선이의 모습이 있나요?
친구들을 만나면서 많이 알게 됐어요. 친구들이 하나같이 그러더라고요.
“혜선이는 늘 남을 먼저 챙겼어요.”
“배려심이 많았어요.”
저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어요. 남을 배려하느라 자기 속마음은 얼마나 숨겼을까 싶은 거죠. 그리고 엄마는 몰랐던 첫사랑 이야기도 있었어요. 학원 같이 다니던 친구였는데, 일기장에 그 아이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더라고요. 그런 걸 보면서 ‘아, 우리 혜선이도 그런 감정을 느낄 만큼 컸구나’ 싶었어요.

Q 수학여행을 떠나기 전 마지막 기억은 무엇인가요?
아직도 생생해요. 수학여행 가기 전에 캐리어를 사달라고 해서 분홍색 캐리어를 사줬어요.
집 계단을 내려가면서 그러더라고요.
“엄마, 나 이거 끌고 가기 창피해.”
그래서 제가 웃으면서 말했어요.
“가방 메고 가는 애들이 더 창피하지. 너 인기 짱일 거야.”
그게 마지막이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지금도 분홍색 캐리어만 보면 그날 모습이 떠올라요. 계단을 내려가던 뒷모습, 목소리, 표정까지 다 기억나요. 내가 해 준 마지막 음식은 유부초밥이었어요. 평소에 별로 안 좋아하던 아이가 그날은 다섯 개나 먹고 갔어요. 제가 지금도 유부초밥을 잘 못 먹고 있어요.
Q 지난 12년간 가족들은 어떻게 버텨왔나요?
참사 후에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 활동을 같이 하면서도 남편은 힘들어하며 술로 버티는 시간이 길었어요. 일에 집중하기도 쉽지! 않았고요. 큰딸 혜원이도 마찬가지였어요. 원래 음악하던 아이였는데 결국 그 길을 포기해야 했어요. 참사 났을 때 같은 단원고 3학년이었으니 어땠겠어요. 혜원이를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곤 했어요. 세 식구 중에 제일 힘든 사람이 혜원이었으니까요. 글쓰기 응모에서 당첨돼서 스페인 여행을 다녀왔어요. 여행을 통해 자기 미래를 다시 설계하고 돌아왔어요. 힘든 시간을 버텨내고 재수해서 대학에 갔어요. 엔터테인먼트 회사에서 일 잘하다가 최근 더 높은 연봉으로 스카우트 돼서 이직한 게 너무 기특해요. 가족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버텨온 것 같아요.

Q 세월호 이후 임선미 님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나요?
독해졌어요. 예전에도 할 말은 하는 성격이었지만 지금은 더 그래요. 남 눈치를 덜 보고 남한테만 좋게 하려 하지 않게 됐어요. 가족들 챙기고 성실하게 살아왔다고 믿었건만, 세월호를 겪고 나니까 세상이 당연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됐어요. 열심히 살았는데 왜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는지 아직도 답을 찾지 못했어요. 하느님께 삿대질하며 원망하기도 했고, 세상을 원망하기도 했어요. 그 과정을 버텨내면서 조금 더 단단해진 것 같아요.
Q 지금 혜선이를 다시 만난다면 무엇을 보여주고 싶나요?
많은 말을 하지는 못할 것 같아요. 엄마가 계속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것. 너를 기억하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것. 마음을 치유하며 삶의 아름다움을 볼 수도 있게 됐다는 그것을 보여주고 싶어요. 그리고 다시 어린이집 아이들과 잘 놀고 있다는 것도요. 혜선이는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는 아이예요. 그래서 저는 그림을 그릴 때도, 어린이집 아이들과 놀 때도, 혜선이만 생각하면 미소가 넘쳐요. 제가 새로운 꿈을 꾸고 있어요. 혜선이가 음악을 좋아했듯, 저도 피아노를 배워서 성당에서 봉사하고 싶어요. 혜선이가 이런 엄마를 보면 환하게 웃으면서 말하지 않을까요. “엄마, 잘하고 있어.” 이 한마디면 충분할 것 같아요.
Q ‘빛의 정원, 또바기 유화전’의 그림은 꽃과 자연이 많다. 특히 노란 해바라기가 생명력이 넘치게 피어 있다. 소재를 자연으로 택한 의미가 있을 거 같다.
그렇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도 그렇지만 꽃과 자연이 우리 마음을 많이 위로하고 치유해 줬다. 나는 자연을 좋아한다. 노란색 꽃을 좋아하는 엄마들에게 노란 해바라기는 아이들 같다. 아이들의 웃음, 아이들의 생명력, 아이들과의 추억, 그리고 꿈, 모든 걸 떠올리는 시간이었다. 꽃으로 피는 아이들과 만나는 시간이었다. 내 그림도 그렇다. 혜선이에게로 가는 ‘아득히 먼 곳’은 혜선이를 생각하며 그렸다. 빨간 동백꽃은 혜선이에게 못다 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림 그리기는 사랑스러운 우래기를 만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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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29※「공익웹진」은 시민 기록 활성화를 위해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가 발행하는 참여형 아카이브입니다. 경기도 공익활동 현장의 다양한 시선과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콘텐츠의 내용은 경기도민 에디터가 직접 취재·작성한 것으로, 일부 의견은 기관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안산(安山). 사람들은 농담처럼 말하곤 한다. '안 산다, 안 산다' 하면서도 결국 사는 곳이 안산이라고. 웃자고 하는 말이지만 그 안에는 뭔가 씁쓸한 진실이 담겨 있다. 집값이 싸서, 공장이 가까워서, 달리 갈 데가 없어서. 이런저런 이유로 모여든 사람들이 만든 도시. 그러나 나는 이 이름을 다르게 읽고 싶다. 안전하게(安全하게) 산다. 안전하게 살고 싶어서 모인 사람들의 도시. 그것이 안산이어야 한다, 그래서 5월 9일의 행진은 말하고 있었다.

오후 세 시, 두 갈래의 물줄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단원고 앞 원고잔 공원 입구에서 한 줄기가, 중앙동 월드코아 광장에서 또 한 줄기. 바람이 조금 불었지만, 따뜻한 봄볕이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사람들은 저마다 깃발을 들고 있었다. 깃발이란 원래 선언이다. 내가 여기 있다는, 내가 이것을 원한다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라퍼커션의 드럼 소리가 먼저였다. 타악기의 진동은 공기를 통해서만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가슴팍을 두드리고, 발바닥을 타고 올라와 무릎을 움직이게 한다. 사람들이 걸었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이윽고 자연스럽게, 마침내는 즐겁게. 선두에는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배치가 아니었다. 이 도시에서 가장 먼저 안전해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를, 말 한마디 없이 그 줄 세움이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 뒤로 시민들이 이어졌고, 후미에는 노동자들이 든든하게 받쳤다. 안산시청 앞에서 두 물줄기가 하나로 합쳐졌을 때, 그것은 이미 강이었다.

나는 깃발들을 오래 바라보았다. 손으로 만든 깃발, 글씨를 써넣은 깃발, 그림을 그려 넣은 깃발. 깃발 컨테스트에서 1등을 차지한 것은 일동 지역아동센터가 만든 '우산 깃발'이었다. 우산. 비바람으로부터 서로를 지켜주겠다는, 그 단순하고 완벽한 상징. 어른들이 수십 장의 기획안과 정책 문서로 표현하려 했던 것을 우산 하나로 해냈다.

안전이란 결국 그런 것이 아닐까. 비가 올 때 곁에 우산을 들어줄 누군가가 있다는 것. 혼자 비를 맞지 않아도 된다는 것. 산업단지에서 일하다 다친 이주노동자에게 말이 통하는 안내가 있다는 것. 노후 건물에 혼자 사는 노인에게 누군가의 시선이 닿는다는 것. 장애인이 휠체어를 밀며 이 도시의 어느 골목이든 막힘없이 갈 수 있다는 것. 이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았던 시간이 너무 길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걸었다.

며칠 전, 조용하지만 결코 작지 않은 일이 있었다. 「생명안전기본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세월호 참사로부터 꼭 12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12년. 그 긴 시간 동안 유가족들은 거리에 섰고, 시민들은 광장에 모였고, 활동가들은 국회 앞에서 밤을 지새웠다. 법이란 선언이다. 이제 안전은 국가가 베푸는 혜택이 아니라, 모든 시민이 누려야 할 권리라고 이 나라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늦었다. 그러나 왔다. 그리고 온 것들은 쉽게 돌아가지 않는다.

안산은 희생자 250명이 학교에 다녔고, 골목에서 뛰어놀았다. 10년 넘는 세월 동안 안산은 세월호의 도시였다. 슬픔의 도시, 기억의 도시. 그러나 안산 시민들은 슬픔에 머물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물었다. "세월호 이후 안산은 정말 안전해졌는가." 기억이 기억으로만 끝나서는 안 된다고. 질문은 행동이 되었고, 행동은 130개의 지역 주체가 모인 시민추진위원회가 되었다. '304개의 노란 테이블' 시민대토론회가 되었고, 마침내 다섯 가지의 구체적인 정책 제안이 되었다. 이제 안산은 세월호의 도시가 아니라, 안전의 도시로 거듭나려 한다. 슬픔을 동력 삼아, 변화를 향해.


안산문화광장 물의광장. 시장 후보들이 나란히 섰다. 더불어민주당 천영미 후보, 국민의힘 이민근 후보, 조국혁신당 조안호 후보, 진보당 홍연아 후보. 서로 다른 정당,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같은 자리에 섰다. 이주민 대표가 앞으로 나왔다. 언어가 달라도, 국적이 달라도, 이 도시에서 일하고 사는 사람이라면 똑같이 안전해야 한다고. 장애인 대표가 나왔다. 도시의 턱을 없애달라고, 경사로와 점자블록이 방치되지 않는 도시를 만들어달라고. 노동자 대표가 나왔다. 산업단지에서 매년 반복되는 사고를, 더 이상 개인의 불운으로 처리하지 말아달라고. 시민 대표가 나왔다. 이 모든 요구가 선거철 공약이 아니라, 임기 내내 지켜야 할 약속이 되어달라고.

다섯 가지였다.
1. 도시 비전 및 행정계획 수립: 4.16 정신을 계승한 중장기 안전 전략 마련
2. 「시민안전센터」 설치: 시민과 소통하며 일상 속 안전 교육을 전담할 기구 마련
3. 안전투자 적극 확대: 재난관리기금 조성 비율 상향 및 안전 인프라 예산 증액
4. 「안전영향평가」 제도화: 취약계층의 관점에서 정책의 위험 요소를 사전에 점검
5. 전담 행정조직 확대: 분산된 안전 부서를 통합하고 민관 협력 거버넌스 내실화
생명·안전 가치를 담은 도시 비전 및 행정계획 수립. 시민안전센터 설치. 안전 예산과 재난관리기금의 적극적 확대. 안전영향평가 제도화. 생명·안전 전담 행정조직 확대와 민관협력 거버넌스 강화. 어렵지 않은 말들이다. 그러나 이것들이 실제 예산이 되고, 조례가 되고, 담당 부서가 생기고, 취약계층의 목소리가 정책 설계 단계부터 반영되는 일은, 누군가 끊임없이 요구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걸었다. 그래서 전달했다.
정치인의 약속이란 언제나 유효기간이 불분명하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광장에 모인 시민들 앞에서, 이주민과 장애인과 노동자의 손에서 직접 건네받은 요구안을 들고 한 약속은 조금 다르다. 증인이 있는 약속은 그 무게가 다르다. 이날 광장에 있었던 모든 사람이, 그 약속의 증인이다.

행진이 끝나고 사람들은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깃발은 접혔고, 드럼 소리는 멎었고, 광장은 다시 평범한 광장이 되었다. 그러나 무언가가 달라졌다. 그것은 도시의 표면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변화다. 함께 걸었다는 사실, 같은 방향을 향했다는 기억, 우리가 원하는 것을 큰 소리로 말했다는 경험. 이런 것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몸이 기억하기 때문이다.
도시란 무엇인가. 건물과 도로와 행정구역의 합산이 아니다. 도시는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서로에 대해 갖는 책임감의 총합이다. 내 옆집 사람이 오늘 안전한지,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무사히 집에 돌아가는지, 이주민 아이가 아플 때 말이 통하는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이것을 묻고, 따지고, 바꾸려는 사람들이 함께 걸었던 5월 9일의 안산은, 그래서 잠깐 더 나은 도시였다.
안전하게 산다. 그래서 안산이다. 함께 걸었던 우리 모두의 바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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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26※「공익웹진」은 시민 기록 활성화를 위해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가 발행하는 참여형 아카이브입니다. 경기도 공익활동 현장의 다양한 시선과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콘텐츠의 내용은 경기도민 에디터가 직접 취재·작성한 것으로, 일부 의견은 기관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웃의 손을 놓지 않는 든든하고 다정한 배경”, 내 이름은 춤추는 나무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 사람으로 살다가 안산에 정주한 사람이 있다. 이웃의 아픔을 외면할 수 없어서 찐 안산 사람이 되기로 했다. 세월호 참사의 기억을 잇는 ‘기억과 약속의 길’ 시민 안내자이며 발달장애인 바리스타들의 직무 지도원.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가슴에 ‘별을 품고 사는 사람’으로 ‘춤추는 나무’. 4월이라 더 바쁜 고명선 활동가를 소개한다.

Q 자신을 ‘춤추는 나무’라고 소개하는데, 어떤 의미인가?
20대 때부터 상담소에서 닉네임으로 ‘나무’를 썼다. 내 주변엔 뿌리 깊은 나무도, 아낌없이 주는 나무도 이미 너무 많더라. 나는 그들 사이에서 그저 이웃들과 바람이 가는 대로 춤추며 살고 싶었다. 거창한 존재보다 주변과 어우러지는 사람이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Q 춤추는 나무로 매일 출근하는 일부터 소개해 달라.
안산의 한 카페에서 성인 발달장애인 바리스타 6명 곁에서 ‘직무지도원’으로 일하고 있다. 우리 바리스타들이 샷 추출이나 음료 제조 실력은 정말 뛰어나다. 다만 숫자 계산, 재고 파악, 그리고 동료 간의 의사소통에서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다. 단순히 기술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그들의 속도에 맞춰 호흡하며 일상을 나누고 지역사회 안에서 당당한 직업인으로 살아가도록 곁을 지키는 ‘다정한 이웃’이 되는 일이다.


Q 장애인 활동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와 이전의 이력이 궁금하다.
대학 시절, 집안에만 갇혀 지내는 재가장애인들에게 책을 배달하며 장애인 인권에 눈을 떴다. 이후 ‘장애여성공감’ 상담원으로 일했고, ‘성공회 나눔의집’에서 어린이와 어르신을 돌보고 성인장애인들과 함께 일했다. 장애인도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있는 그대로 당당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 활동의 뿌리가 됐다.




Q 서울 사람이 어떻게 안산의 시민 활동가가 되었나?
결혼하면서 안산에 왔다. 세 아이 엄마로서, 2014년 4월 16일 도서관에서 강의를 듣다가 세월호 소식을 접했다. ‘전원 구조’라는 오보를 믿고 큰 걱정 안 했다가, 저녁에야 상황이 절망적이라는 걸 알게 됐다. 세월호가 가라앉는 화면을 계속 바라볼 수밖에 없는 무력감에 발만 동동 굴렀다. 다음 날, 당시 초등학생이던 큰아이와 어린이집에 다니는 두 아이를 데리고 택시를 타고 무작정 단원고로 달려갔다. 수많은 사람이 촛불을 들고 아이들이 돌아오기만을 비는 밤이었다. 운동장에 교복 입은 학생들이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라는 피켓을 들고 서 있었다. 평생 잊을 수 없다. 여러 번 촛불을 들었지만 아이들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던 그 촛불이 제일 간절했다. 그 이후 화랑유원지, 안산문화광장, 광화문광장에서 나는 계속 촛불을 들었다.


Q 시민안내자로서 걷는 ‘기억과 약속의 길’은 무엇인가?
참사 직후부터 정부합동분향소와 단원고 교실을 찾아가는 ‘기억과 약속의 길’이 있었다. 나는 2017년 4.16기억저장소 ‘4.16 민주시민교육’에서 알게 되었다. 부모님의 해설을 들으며 걷는 고잔동에서 별이 된 아이들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2019년부터다. 수료생들과 함께 “누가 오든 안 오든, 우리끼리라도 한 달 한 번은 꼭 이 길을 걷자”고 다짐했다. 4.16기억교실에 모여서 단원고 추모조형물, 4.16기억전시관, 고잔동 마을의 골목골목을 지나 4.16생명안전공원 부지까지, 2~3시간을 시민들과 걷고 있다.
지난 7년여 동안 이 길을 지키며 느낀 건 ‘기억의 힘’이다. 매달 셋째 주 토요일이면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든다. 어떤 날은 비바람이 몰아치고, 때론 눈이 내리기도 했지만 모두 노란 우산을 쓰고 끝까지 걸었다. 걷는다는 게 특별한 일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기억공간에서 서로의 기억을 꺼내고, 어떻게 기억하고 약속할까 이야기했다. 태풍 때 한 번 취소된 거 말고는 지금까지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이 길을 걷는 행위 자체가 4.16 이전과 이후는 반드시 바뀌어야 한다는 다짐이라고 본다.



Q ‘기억과 약속의 길’에서 시민들과 함께하는 특별한 의례가 있다고 들었다.
매번 출발을 4.16기억교실에서 한다. 3월엔 3반, 4월엔 4반 이런 식이다. 교실에 모여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는 ‘출석’ 시간이 있다. 시민 안내자가 아이의 이름을 부르면 그 아이 자리에 앉은 시민이 “네!”라고 대답하는 식이다. 아이들의 존재를 다시 확인하고 그들의 삶과 꿈을 기억하는 시간이다. 기억과 약속의 길은 함께 기억하고 약속하는 연대를 길이다.
Q 춤추는 나무는 별을 품은 사람들(이하 ‘별품사’)도 만들었다고 들었다.
2018년경 4.16 안산시민연대에서 ‘별을 품은 이웃’이라는 마을별 세월호 모임을 제안했다. 그때 나는 '함께크는여성울림'에서 상근 활동가로 피켓팅과 서명전 등으로 함께하고 있었다. 활동가들과 고민하다가 “울림 사람들끼리 정기적으로 모여 활동하고 마음을 나누자”라며 회원들을 모아 소모임 ‘별품사’로 의기투합했다.


대단한 목표보다 그저 참사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별이 된 아이들을 우리 가슴에 품고 살아가자는 뜻이었다. 별품사 첫 활동이 별이 된 단원고 아이들의 약전 읽기였다. 《4.16 단원고 약전, 짧은 그리고 영원한》은 1반 1권으로 시작해 10반 10권까지, 그리고 선생님들과 일반인들 이야기 2권으로 책이 12권이다. 책을 펼쳐 아이들 이름을 부르고 이야기하는 게 처음엔 우느라 너무 어려웠다. 아이들의 꿈, 좋아했던 음식을 이야기했고 아이가 좋아한 음악을 모임에서 함께 들었다. 아이와 부모님들의 일상을 한 페이지씩 넘길 때마다 우리는 많이 울고 또 웃었다. 약전 전권을 2년에 걸쳐 완독 토론한 후 아이들 모두에게 편지를 썼다. 그 결과물로 250편의 편지 모음집 《잊지 않을게 행동할게》를 펴내 기억교실 각 반에 갖다 두었다.

별품사는 세월호의 진실과 별이 된 아이들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는 ‘공부방’이자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다. 세월호 관련 영화나 연극을 관람하고 기억식 등 관련 행사에 참여해 왔다. 세월호 공방 어머니들을 모셔 와 꽃누르미와 퀼트로 소품을 만들며 아이들 이야기를 들었다. 416 희망 목공소에 가서 아버지들과 목공 실습도 했다. 올해는 별품사 새 회원들과 함께 약전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3월에는 약전에 빠진 아이 중 1반 문지성 이야기를 어머니 안명미 님을 모셔서 생생히 듣는 시간도 가졌다.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유가족들 곁에서 안산의 한 귀퉁이를 지키는 온기가 되려고 한다.
Q 그 외에도 매달 피케팅과 생명 안전 공원 예배에 참여하지 않나.
피켓을 드는 것은 시민들에게 참사의 진실을 알리며 잊지 말자고 호소하는 직접적인 소통 창구다. 매월 둘째 수요일 5시 30분 광화문광장에서 ‘기억공간 지키기 집중 피케팅’을 하고 있다. 지나가는 사람의 차가운 시선이나 “인제 그만 좀 해라”, “지겹지도 않냐?”라는 말이 비수처럼 꽂힐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피켓을 놓지 않은 건, 다시는 어떤 참사도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마음이고, 밝혀지지 않은 진상규명에 끝까지 함께 하겠다는 다짐이었다.
매달 첫 일요일 오후 5시, 공사가 진행 중인 거친 흙바닥 위에서 우리는 함께 기도하고 노래한다. 예배에서 별이 된 아이들 이름을 부르는 시간이 있다.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기억하는 그 시간이 소중하다. 이름을 부르며 아이들이 모두 안산으로 돌아올 걸 믿기 때문이다. 수학여행을 떠난 아이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린 엄마아빠 마음이다. 4.16 생명 안전 공원은 별이 된 아이들의 봉안당을 포함해서 모든 시민이 찾아와 머무는 열린 공간이 될 것이다.
Q 생명 안전 공원 건립을 반대하는 목소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공원 부지 앞에서 반대하는 분들을 마주할 때면 마음이 아프다. “너희 때문에 경제가 망했다”라며 화를 내는 분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분들이 느끼는 불안은 우리 때문이 아니라 사회 구조 전반의 불안정함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타깃을 눈앞의 노란 리본으로 정해버린 거다. 생명 안전 공원은 특정 누군가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참사를 성찰하고 더 안전한 사회를 다짐하는 공간이다. 그분들과도 결국 함께 풀어가야 할 숙제다.
Q. 세월호 참사 이후 내 삶에 일어난 변화가 있다면?
배우자에게 같은 질문을 했더니, “마누라가 바빠져서 얼굴 보기 힘들다”라더라. 그래서 “참사 이전에도 세 아이 엄마로 늘 바빴거든?” 농담해 줬다. 첫째 변화는, 내가 안산이라는 도시에 뿌리를 내리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고 학교도 다녔기에 결혼하고 살게 된 안산이 늘 낯설었다. 그런데 참사가 터졌다. 어느 순간 차마 이곳을 떠날 생각을 할 수 없더라. 그렇게 비로소 안산에 정주하는 진짜 ‘안산 사람’이 됐다.
둘째는, 참사 이후 그분들이 겪는 사회적 고립과 혐오를 보면서, “이분들 또한 우리 이웃으로서 존중받으며 함께 살아가야 한다”라는 확신이 들었다. 장애인들이 세상 밖으로 나와 함께 숨 쉬어야 하듯, 세월호 가족들도 우리 공동체 안에서 당당하게 자리를 잡아야 한다. 그분들이 외롭지 않게 안산이라는 공동체의 품을 넓히는 것이 내 활동의 동력이자 철학이다.



Q 세월호 가족들 곁에서 특별히 배운 점이 있다면?
10주기 때 ‘유류품 기록’ 작업을 함께했다. 아이들의 손때 묻은 물건들을 기록하며 부모님들이 들려주시는 목소리를 듣고, 다시는 어떤 참사가 일어나면 안 된다는 걸 느꼈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내가 감히 “그 마음 다 안다”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함부로 ‘공감’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게 됐다. 나는 ‘이해하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있어 주는 이웃’이 되기로 했다. 슬플 때 함께 울고 기쁠 때 함께 웃고!
Q 4.16 세월호 참사 12주기를 맞는 소회는 어떤가?
생명 안전 공원이 계획대로 차질 없이 건립되어 흩어져 있는 우리 아이들이 비로소 안산이라는 집으로 평안히 돌아오길 간절히 바란다. 공사 부지를 지날 때마다 지난 10년여의 갈등과 눈물, 그리고 그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우리 이웃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그곳은 단순히 희생자를 추모하는 무거운 공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시민들이 언제든 찾아와 산책하고,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일상을 나누고, 생명의 소중함을 자연스럽게 체득하는 ‘희망의 광장’이 되어야 한다. 아이들이 돌아오는 그날, 안산이 비로소 참사의 아픔을 딛고 생명과 안전을 상징하는 새로운 도시로 거듭날 수 있다고 믿는다.
Q 춤추는 나무의 남은 꿈도 나눠달라.
내 곁에서 함께 일하는 발달장애인 동료들의 속도, 그리고 세월호 가족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다정한 이웃’이 되고 싶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서로 연결된 우리는 서로를 돌보고 서로를 살린다. 4.16 이전과 이후는 반드시 바뀌어야 한다는 첫 마음을 잊지 않고 끝까지 함께 걸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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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09
“생명과 안전을 위한 약속, 우리는 다시 만났습니다.”
2025년 11월 1일, 가을이 깊어 가는 안산 화랑유원지 수변 산책로. 이곳에서
열린 ‘4·16생명안전공원 문화제 – “만나요”’는 단순한 행사가 아니었습니다. 잊지 않겠다는 약속과, 생명을 지키겠다는 다짐이 모인 자리였습니다. 이번 문화제는 (사)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4·16재단, 4·16연대, 4·16안산
시민연대, 안산마음건강센터가 공동으로 주관했습니다. 세월호참사 피해 가족
과 시민 약 500명이 함께하며, 생명안전공원 건립에 대한 깊은 관심과 지지
를 보여주었습니다. 이날 모인 시민들은 ‘안전’과 ‘생명’이라는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서로의 마음을 나누며 연대의 의미를 확인하는 시간을 가졌습
니다.

우리는 왜 지금, ‘생명안전공원’을 이야기할까?
4·16생명안전공원이 필요한 이유는 단지 과거의 아픔을 되돌아보자는 데 있
지 않습니다. 세월호참사가 남긴 상처와, 그 이후 우리 사회가 겪은 수많은
고통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같은 슬픔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생명과 안전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상기시키기 위해 마련된 공간이 바
로 4·16생명안전공원입니다. 이 공원은 단순한 추모 공간을 넘어, 우리 사회의 안전과 생명의 가치를 되새
기고, 시민들이 머무르며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 설계되었습니
다. 지하 2층부터 지상 3층까지, 약 7,377m2 규모의 공간에는 추모 시설뿐
아니라 문화·교육·치유·휴식이 가능한 복합 공간이 포함될 예정입니다. 이곳은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을 기억하는 장소이자, 공원을 찾는 아이들, 가
족, 시민 모두가 ‘안전하게 살아갈 권리’를 다시 생각하는 상징적 공간이 될
것입니다. 단순한 기억의 장소를 넘어, 생명과 안전, 그리고 연대를 체험하는
살아 있는 공간으로 자리하게 될 4·16생명안전공원은, 우리 모두의 미래와 연
결된 약속입니다.

문화제 현장, “시민이 만든 기억과 연대의 무대” 문화제는 오후 2시, 시민참여 마당으로 막을 열었습니다. 방향제 만들기, 압
화 엽서 공예, 자개 공예, 양모 펠트 공예 등 다양한 체험 부스가 시민들을
맞이했습니다. 부모와 아이, 친구와 연인들이 함께 손을 맞잡고 참여하는 모
습이 곳곳에서 펼쳐졌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생명’과 ‘안전’이라는 다소 무
거운 주제를, 일상의 손끝과 몸짓으로 나누는 시간으로 경험할 수 있었습니
다. 오후 4시 16분, 특별한 무대가 시작되었습니다. 공연과 기억, 연대의 목소리
가 하나로 모인 자리였습니다. 밴드 헤이븐, 가수 예람, 그리고 퍼커션 팀 타
쇼와노립의 무대가 이어지며, 음악과 리듬은 차갑던 늦가을 공기를 따뜻한 분
위기로 바꾸었습니다. 무대는 또한 피해 가족과 시민이 함께 마음을 나누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세월호 가족인 정부자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추모부서장(단원고 2학년 6반
신호성 학생의 어머니), 안산 시민 활동가, 서울에서 참여한 시민이 무대에
올라, 생명안전공원 건립에 대한 간절한 바람과 시민 참여의 의미를 나누었습
니다. 관객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과 연대의 눈빛으로 함께했습니다. 이어 무대에 오른 김순길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사무처장(단원고 2학년
9반 진윤희 학생의 어머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4·16생명안전공원은 단순한 추모 시설이 아닙니다. 애도의 장소이자 생명과
안전의 가치를 배우는 배움터, 시민들이 일상에서 머물며 서로를 돌보는 열린
공간, 그리고 더 나은 사회를 향한 약속의 상징이 될 것입니다.“
또 시민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하신 시민 한 분 한 분의 발걸음이 공원의 한 그루 나
무가 되고, 바람이 되어 이곳을 지켜 나갈 것이라 믿어요. 그 힘이 세월호참
사가 남긴 상처를 넘어 우리 사회를 더 안전하고 따뜻한 방향으로 이끌 것입
니다. 시민 여러분이 있었기에 세월호 가족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공연과 토크가 끝난 뒤, 시민들은 노란 별 모양의 응원봉을 들고 공사 부지
펜스 앞에 모였습니다. 그곳에서는 기억과 약속을 담은 퍼포먼스가 펼쳐졌고, 손짓 하나, 발걸음 하나마다 이 공원을 지키고 가꾸겠다는 시민들의 의지가
담겼습니다.


문화제는 끝나지만, 기억의 불빛은 어둠을 밝히고
이번 문화제는 단순히 아픈 과거를 떠올리는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함께 울
고, 함께 노래하고, 함께 만들고, 함께 약속하며, 앞으로의 길을 서로 함께 걸
어갈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자리였습니다. 기억과 약속, 그리고 그날 남긴
꿈은 문화제가 끝난 뒤에도 공원 부지에 작은 불빛으로 남았습니다. 윤희 어머님의 말씀처럼,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발걸음은 공원의 나무가 되
고, 바람이 되며, 부드러운 약속이 되어 뿌리내릴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억
의 불빛은 어둠을 밝히며, 안전 사회를 위한 시민들의 노력을 이어갈 것입니
다.
“잊지 않겠다.”
“다시는 이런 아픔이 반복되지 않기를.”
“모두가 안전하고, 모두가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자.”
이 말들은 바로 4·16생명안전공원이 품을 미래에 관한 약속입니다. 이 공원은
앞으로 생명의 가치를 배우고, 안전을 지키고, 연대를 쌓아가는 공간이 될 것
입니다. 아이들이 뛰어놀고, 어른들이 쉬며, 서로를 돌보는 장소. 바로 그런
공간입니다. 안전한 사회를 위한 작은 관심, 누군가의 재난이 곧 우리 모두의
문제임을 느끼는 공감, 그리고 고통에 귀 기울이는 연대. 이것이 4·16생명안
전공원이 품고 있는 진짜 의미입니다.
이번 문화제를 찾은 시민의 발걸음, 세월호를 기억하며 노란 스티커를 붙이
고, 노란 팔찌를 끼는 작은 실천, 그 모든 순간이 안전한 내일을 만드는 힘이
됩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작은 관심과 의문도 누군가에게는 큰 안심
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도시, 우리가 함께 만드는 사회가 서로의 생
명과 안전을 지키는 공간이 되도록, 관심을 이어가야 합니다. 4·16생명안전공원은 현재 공사 중이지만, 그 의미와 가치는 이미 여기, 당신
과 나, 우리 속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기억이 빛이 되어 만나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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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03
침묵과 쉴 새 없는 기억의 유실 소용돌이 뒤편에서, 굳건한 발걸음의 손길로 역사를 빚어내고 찬란한 연대의 내일을 마주하는 눈부신 발자취
저마다의 자리에서 묵묵히 경기도 구석구석의 골목길과 삶의 흔적을 지켜내며 기록의 가치를 품어온 수많은 시민기록자들과 도민들. 빠르게 변해가는 도시의 풍경 속에서 “우리가 함께 골목을 걸으며 마주하는 기억의 조각들은 어떻게 영원한 기록의 유산이 되는가”라는 깊은 울림의 질문 앞에 섰다. 방관과 망각의 장막을 거두고, 묵묵히 두 손을 모아 서로의 발걸음을 보듬으며 촘촘한 연대의 그물망을 엮어 온 ‘시민기록자 양성교육 심화과정 <기억을 걷다>’ 현장의 눈부신 발자취를 깊이 들여다보다.
"우리는 과연 ‘우리동네의 소소한 역사와 평범한 이웃들의 삶은 박물관의 유물처럼 거창하지 않아 기록할 가치가 없고, 전문가가 아닌 시민들이 직접 기록을 남기는 일은 불가능하다’며 마음의 문을 닫아걸었던 차가운 방관의 장막을 걷어내고, 경기도 구석구석의 평범한 이웃들과 시민기록자들, 그리고 공익활동가들이 손을 맞잡으며 저마다의 진심으로 평화와 상생의 품을 엮어내는 ‘기억을 걸으며 꽃피우는 풀뿌리 기록 자치의 품’을 어떻게 활짝 열어갈 수 있을까?" 풀뿌리 기록 자치와 상호 존중적 기억 공유의 잠재력을 발굴하고, 경기도 전역에 지속 가능한 상생과 보존의 숲을 깊이 일구어가는 감동의 여정을 깊이 조명한다.
방관과 망각의 장막을 허무는 ‘풀뿌리 기억 수집 및 자발적 기록 생태계 구축’
일상의 공간들을 무심하게 스쳐 지나가며 소중한 흔적들을 흘려보내던 낡한 관행에서 벗어나, 경기도민과 시민기록자들이 현장의 마당과 골목에서부터 직접 발로 뛰며 기억을 채집하고 기록화하는 자발적 생태계 다지기.
"진정한 기록 자치의 완성은 거창한 역사 편찬 사업의 선언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골목길 작은 벤치에 모여 앉아 동료들과 손을 잡고 '우리가 걷는 이 길이 곧 경기도의 살아있는 역사다'며 서로의 기록을 격려하는 소박한 실천에서 시작된다"는 철학 실천.
고립을 넘어 온기를 잇는 ‘시민 참여형 기록 감수성 및 연대 강화’
기록 과정에서 마주하는 낯선 시선이나 표현의 한계를 개인의 부족함으로 치부하지 않고, 지역 사회와 공익활동 현장이 함께 머리를 맞대어 지혜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공론장 창출.
"혼자서 거대한 시간의 파고와 마주하면 막막하고 외롭지만, 경기도 도민들이 손을 잡고 함께 골목을 거닐며 이야기를 나누면 그 어떤 무관심도 따스한 품으로 녹아내린다"라는 통찰.
경기도 31개 시·군 골목마저 평화와 기억의 그물망으로 잇는 ‘상생 기록 네트워크’
시·군의 경계를 뛰어넘어 경기도 내 다양한 문화 및 시민 커뮤니티들과 기록자들이 유기적으로 손을 잡고, 모든 이의 발자취와 소중한 기억이 차별 없이 존중받는 상향식 민주주의와 시민 자치 실현.
"모든 도민과 활동가들이 소외되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로 오래도록 함께 웃을 수 있는 공정하고 평화로운 공생의 무대" 완성.
도내 각지에서 모인 시민기록자 심화과정 참가자들과 기억의 가치를 염원하는 수많은 도민이 한자리에 모여 골목을 함께 걸으며 뜨거운 열기를 나누고, 경기도를 진정한 '어떤 평범한 기억도 잊히지 않고 문화로 꽃피는 평화와 자치의 고향'으로 만들기 위한 지혜를 모았던 현장은 깊은 공감과 함께 뜨거운 연대의 온기로 가득 채웠다.
참가자들의 진솔한 고백 및 상생 나눔 세션: "내가 나고 자란 동네의 풍경을 기록하는 일이 과연 누구에게 의미가 있을까 의문이었는데, 오늘 이 심화과정을 통해 동료들과 함께 골목을 걸으며 '우리의 사소한 발걸음이 모여 마을의 역사가 된다'며 마음을 모으니 비로소 세상을 바꾸는 진짜 따뜻한 온기가 내 손끝에서 흐르고 있음을 깨닫는 벅찬 감동을 느꼈습니다"라며 눈시울을 붉히던 참가자들의 뭉클한 순간들.
경기도형 기록 자치 도시 확산을 위한 유쾌한 브레인스토밍: "동네마다 시민기록자들이 함께 모여 지역의 숨은 이야기를 발굴하고 기록을 나누는 '우리동네 기억 사랑방'을 상설화하자", "시민들의 반짝이는 에너지를 모아 더 큰 기억의 망을 만드는 '경기 시민기록 연대 네트워크'를 튼튼하게 꾸리자"며 쉴 새 없이 아이디어를 쏟아내던 반짝이는 눈빛들.
응원과 다짐의 피날레: "비록 우리가 마주한 무관심의 벽과 시간의 유실이 때로는 높고 매섭다 할지라도, 경기도 구석구석에서 피어나는 이 지혜롭고 푸른 기억의 물줄기가 모여 모든 도민이 소외되지 않고 오래도록 함께 웃을 수 있는 공정하고 평화로운 내일을 활짝 열어주기를 바란다"며 환한 미소와 박수로 마무리된 연대.
세상을 바꾸고 진정한 시민 자치와 공생의 시대를 여는 위대한 힘은 차가운 기록물 보존 통계 데이터나 거창한 정부의 행정 보고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늘 아침 경기도의 좁은 골목길과 현장에서 이웃들이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우리의 정직한 발걸음과 다정한 연대로 경기도의 찬란한 역사 역사를 활짝 밝힌다"며 따스한 온기를 건네는 평범한 시민들과 시민기록자들의 정직한 땀방울과 다정한 연대 위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방관과 망각의 장막을 걷어내고 경기도 구석구석에 평화와 기억의 숲을 영원히 일구어가는 공익활동가들과 도민들, 그리고 언제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 경기도 곳곳에서 피어나는 이 지혜롭고 푸른 온기들이, 모든 도민이 소외되지 않고 오래도록 함께 웃을 수 있는 공정하고 지속 가능한 경기도의 내일을 활짝 열어주기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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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17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9월 13일 토요일, 시민기록자 양성교육 심화과정 5강 <기
억을 걷다> 프로그램이 진행되었습니다. 이날의 프로그램은 경기도 교육청 4.16
생명안전교육원에서 진행되었습니다. 기억이 아름다운 추억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고통스러운 기억들도 있습니다. 그
래서 때론 기억을 기록하는 것이 아주 잔인하게 느껴질 때도 있죠. 심지어 인간의
정신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너무 고통스러운 기억은 왜곡하여 기억하거나 아예
잊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체 왜 이런 고통스러운 기억과 마
주해야 하는 걸까요? 이것은 공익활동 아카이브 에디터인 제가 마음 깊숙한 곳에
품고 있던 질문이자 고민입니다. 물론 한 번에 답을 찾을 수는 없겠지만, 이런 제
큰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얻은 기회였습니다. 이미 시간이 꽤 흘렀지만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분명 4.16 세월호 참사를 기억
하고 계실 겁니다. 이 가슴 아픈 참사는 분명 아프고 잔인한 기억이지만 분명히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린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4.16 세월호 참사 희생자의
유족과 그들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모여 이들의 이야기를 기록 및 보존하고
있습니다. 아픈 역사의 상처를 담고 있는 장소를 ‘다크 헤리티지(Dark Heritage)’라고 하는
데요. 잘 알려진 것으로는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등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5.18 기념 공원이나 제주 4·3 평화공원 등이 이런 다크
헤리티지에 속합니다. 그리고 ‘단원고 4.16 기억 교실’도 그중 하나입니다. 이곳의
운영은 4.16 기억 저장소 활동의 일부인데요. 4.16 기억 저장소는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고 기록하며 행동하기 위해 유가족과 전문가, 시민이 만드는 기억 공동체입
니다. 이곳에서는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기억과 기록을 수집, 관리, 전시 및 보존
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목표는 ‘기억하고, 기록하며 행동하라’라는 것입니다. 기억
을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것으로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연결 짓기
위한 활동인 것이죠. 그리고 이 행동은 세월호 참사의 기억과 기록을 미래세대에
전달해 지속가능한 안전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4.16 기억 저장소는 차가운 바다에서 세월호 참사 유족들을 위로했던 노란 리본
과 바람개비로 둘러싸여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기억과 기록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배우기 전에 4.16 세월호 참사를 왜 기억해야 하는지에 대한 영상을 먼저 시청했
습니다.
다크 헤리티지의 개념과 우리가 왜 이런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기록해야 하는지
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포함된 영상이었습니다. 이후에는 함께 희생자들이 머물던
학교 현장을 그대로 재현해 둔 교실로 이동했습니다.

[3-1. 4.16 참사 이전에 희생자 중 선생님들이 생활했던 교무실을 방문한 모습]

[3-3. 4.16 참사 희생자들을 향한 방문자의 메시지]
2층은 7반부터 10반까지, 3층은 1반부터 6반까지 있었습니다. 이 교실은 원래 있
던 건물을 허물고 다시 증축한 건물인데요. 본래 단원고 학생들이 머물던 공간이
10개 반 형태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를 그대로 재현하고자 건물을 다시 짓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사물함, 교과서, 급식 표, 출석부 등 학교 생활할 때 사용했
었던 모든 것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교무실도 건물의 벽, 뼈대, 바닥, 소
모품인 형광등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사실 4.16 기억 교
실에 있는 모든 것은 국가기록원에 국가기록물 제14호로 동재 되어 있고 단원고
생존자, 희생자 학생들의 개인 기록물과 세월호 선체 인양 후, 배에서 나온 기록
물 역시 제14-1호로 등재되어 보존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의 물건을 함부로
훼손하거나 위치를 바꾸는 등의 일을 하면 절대 안 됩니다.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머물렀던 공간을 돌아보면서 이 기록물들에 관해서 설명해
주신 분은 4.16 세월호 참사 희생자 학생의 어머님이셨습니다. 당시를 누구보다
처절한 심정으로 겪어온 분의 자세한 설명을 들으며 기억과 기록이라는 것의 의
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아주 고통스러운 기억이지만, 그
기억을 나눔으로써 더 많은 사람이 이 참사에 대해 알고, 기억하고, 기록하게 되
니 말입니다. 이곳에서는 매월 셋째 주 토요일에 생일인 희생자들의 생일 축하 노
래를 부르는 행사가 진행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직 부재를 인정하기 힘들어서
사망 신고를 하지 않은 부모님들도 계십니다. 누군가에게는 과거의 기억이지만 당
사자들에게는 여전히 현재처럼 이어지고 있는 일들도 있다는 걸 깨닫게 해주는
것 역시 기록의 힘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기억 교실을 돌아본 후, 임시 분향소가 있었던 곳과 세월호 참사 이후 단원고에
전해진 많은 이들의 위로와 응원, 애도의 흔적들을 찾아갔습니다.

[4-1. 생명의 길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 있는 모습]
[4-2. 단원고등학교를 방문하고 있는 모습]
단원고등학교를 오가는 길에는 ‘생명의 길’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습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마을의 슬픔을 기억하고 희망을 찾기 위해서 2015년부터 고잔동 마을
주민과 단원고등학교 학생의 이야기를 모아서 겹치는 부분을 벽화에 담은 것입니
다. 소중한 생명을 잃은 고잔동 마을에 작은 희망의 씨앗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만든 이 길을 걸으며 다시 한번 기록의 중요성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
다. 사진

[4-3. 4.16 세월호참사 추모 조형물]
[4-4.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방한 당시 추모와 애도의 마음을 담아 전달한 목련
나무]
단원고등학교에는 4.16 세월호참사 추모 조형물과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방한했을
당시 단원고에 애도의 뜻으로 전달한 목련 나무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
런 기록들은 단원고등학교 학생들뿐만 아니라 기록을 접하는 모든 이들이 안전한
사회를 향한 의지와 희생된 이들에 대한 애도를 잊지 않도록 하고 있습니다. 사진

[5-1. 4.16 기억 전시관]
다음으로는 4.16 기억 전시관으로 향했습니다. 4.16 기억 전시관에는 하늘의 별이
되어버린 희생자들을 추모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사진

[5-2. 4.16 기억 전시관을 둘러보고 있는 수강생들]
[5-3. 4.16 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작품들]
이곳에는 자식들을 향한 부모들의 절절한 마음과, 아이들을 안전하게 지켜주지 못
한 어른들의 아픔 그리고 떠나간 이들을 추억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이 차곡차곡
기록되고 있었습니다. 사진

[5-4.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마음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는 수강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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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를 받았을 시 기준에 따라 수정하여 원고료 지급범위를 정함. ※ 1매에 27행을 기준으로 30%(8행)미만 작성된 매수는 지급매수로 산정하지 않으며 이미지는 홈페이지 업로드 크기와 별도로 센터
양식 기준 최대 10행으로 취급
<기억을 걷다> 프로그램을 수강하는 수강생들도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기록에 동
참하였습니다. <기억을 걷다> 프로그램은 수강생들 모두에게 왜 고통을 감수하더라도 아픈 기억
을 되돌아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었습니다. 그 기록은 계속해서 퍼지고 퍼져서 우
리의 슬펐던 마음을,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발버둥 쳤던 용기를, 그리고 슬
픔에 공감하며 눈물 흘렸던 서러움을 전달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기록을 통해
서 희생자들은 잊히지 않고 우리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슬
픈 역사의 희생자들과 생존자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슬퍼했던 이들을 기억 속에
서 사라지지 않도록 지키는 것이 공익활동 기록의 소명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리고 그 기록은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
록의 소명은 비로소 기록을 열람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 잡았을 때 마무리되
는 것이니까요. 노란 민들레가 흰 홀씨가 되어 퍼져가듯, 여러분의 마음에도 이
기록이, 그리고 4.16 참사 희생자와 생존자들의 이야기가 닿기를 바랍니다.
조회수 60
2025-09-16아키비스트, 이제 우리에게 그리 낯선 단어가 아니죠.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는
6월 한 달간 4회에 걸쳐 경기시민사회 공익활동 아키비스트 양성과정을 마련했습
니다. ‘공익활동 아키비스트’란 공익활동 자료 수집 및 보존을 통해 가치를 확산하
는 활동가를 말합니다. 경기도 전역의 활동가와 도민 대상이기 때문에 강의는 의정부와 수원을 오가며
진행되었습니다. 센터 북부에서 진행된 1-2차시에는 (협)아카이빙네트워크연구원
손동유 원장을 모시고 공익활동 아카이브의 이해와 방법, 특히 구술 아카이브에
대해 들었습니다. 한국저작권보호원 이선민 변호사를 통해 저작권 관련 내용도 배
웠습니다.

공익활동을 위한 아카이브 활용법
저는 경기도여성비전센터 나혜석홀에서 진행된 3차시에 참여했는데, 잠시 그 현장
으로 가보실까요? 5번째 강의를 맡은 분은 한국외대 정보기록학연구소 겸임교수
이신 김태현 강사님입니다.
‘우리는 기록의 민족’이라는 얘기로 강의가 시작됐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이 1997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하지만 일제의 역사 말살에 많은
기록이 유실되는 아픔도 겪었습니다. 실제로 아카이브라는 말이 우리 사회에 두루
쓰이게 된 것은 2000년대 이후라네요.

기록과 콘텐츠와 아카이브의 관계
사람들이 직접 만든 역사의 경험을 기억이라 부릅니다. 우리는 기억을 기록함으로
써 과거를 수집하고 현재를 생산하여 미래를 준비합니다. 즉, 기록은 역사적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이 만들어낸 액션입니다. 이 기록에 서사를 입혀 사회적
메시지를 담으면 콘텐츠가 됩니다. 기록을 인과관계로 배열한 것이 콘텐츠라면 상
관관계로 배열한 것은 아카이브입니다. 아카이브는 논리적인 시스템으로 기록을
데이터베이스화합니다. 이 세 가지는 구분되면서도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기억을 기반으로 세 가지 개념이 상호연결 될 수 있는 게 바로 시민사회의 일상
사 영역이라고 교수님은 설명합니다. 기록의 수집과 생산
기록의 수집은 ‘사라지는 것에 대한 멈춤기능’이 있습니다. 멈춤 그 자체도 의미가
있지만, 어떤 내용을 수집할 것인가? 어떻게 수집할 것인가? 기록을 모으는 방식
도 중요한데 저인망식 무작위 수집보다는 주제를 가지고 수집해야 훨씬 효과적이
라고 합니다. 창고에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자주 쓰지 않는 물건을 창고에 넣어
놓기만 해도 일단 없어지는 일은 막게 되죠. 더 나아가 그것들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어떤 물건이 창고 몇 번째 선반에 있는지 정리해 놓는 게 아카이브이고, 그 노동을 하는 사람이 바로 아키비스트입니다. 콘텐츠와 아카이브로 활용된 사례들
강의 후반부에는 기록이 하나의 주제에 따라 콘텐츠로 재탄생한 사례들을
소개했습니다. 모두 교수님이 직접 진행한 프로젝트인데요, 그중 몇 가지만
추려봅니다.

6.10민주항쟁 30주년 기념전 <1987, 우리들의 이야기> 포스터와 디지털 콘텐츠
(출처: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6.10민주항쟁 30주년 기념전시회 <1987, 우리들의 이야기>는 박종철 열사 하숙집
아주머니, 시내버스 운전기사 등 역사적 기록을 바탕으로 캐릭터 작업을 거친 보
통시민 30명의 이야기를 스토리텔링한 것입니다. 수채화로 그려낸 서울시청 일대
가 인상적이죠? 전국순회 전시회와 함께 오마이뉴스를 통한 웹 전시회도 병행했
습니다. (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com/NWS_Web/Event/story1987.aspx)

증평기록관 개관 전시 <증평, 첫 번째 기억> 전시실과 주제 아카이브
(출처: 증평기록관)
증평은 기록 분야를 줄곧 앞서가는 지자체인데요. 2020년 증평기록관 개관 전시
<증평, 첫 번째 기억> 이래로 훌륭한 기획의 전시가 계속됩니다. ‘주간 증평’이라
는 디지털 주제 아카이브도 흥미롭습니다. 기록관의 보수적 풍토를 뒤엎고 힙한
형광색을 메인 컬러로 고집하여 결국 온 마을을 핫핑크로 물들였다는 일화가 재
미있네요. 증평기록관 콘텐츠는 유튜브에 다양한 쇼츠로도 업로드되어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JPArchives)

세월호참사 1주기 기억전시 <아이들의 방> 포스터와 디지털 콘텐츠
(출처: 4.16기억저장소)
세월호참사 1주기 기억전시 <아이들의 방>은 죽은 이의 물건을 공개하지 않는다
는 전통을 깨고 주인 잃은 방을 사진과 글로 남겼습니다. 전시회는 엄청난 반응을
불러일으켰고 오스트리아 시골 라디오에서까지 인터뷰 요청을 해왔습니다. 규모가
어떻든 메시지가 강하면 사람들은 스스로 찾아온다는 걸 확인했지요. 처음에 공개
를 거부했던 유족들도 마음을 돌려서 2015년 61개였던 방이 지금은 200개 가까
이 열렸습니다. 오마이뉴스 디지털 콘텐츠에서 그 아이들의 방을 들여다볼 수 있
습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Event/416memory/index.aspx)
아카이브도 브랜드가 되는 시대
한때 외래어 대신 기록은행이라는 말을 사용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는 아카이
브라는 용어가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래도 교수님이 어디 가든 첫 번째
받는 질문은 ‘기록관이 뭐냐’는 질문이랍니다. 누구나 아는 도서관처럼 더
이상 이 질문이 안 나오는 날이 곧 오겠지요. 그러려면 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아카이브의 주인이 누구인가? 지금껏
역사 콘텐츠에서 스스로 주인이 된 적이 없었던 시민들이 목적의식을 갖고
풀뿌리 방식으로 아카이브의 주권자가 될 때 아카이브는 브랜드가 됩니다. 12.3 비상계엄 아카이브도 그렇게 차곡차곡 쌓여갈 것입니다.

강의를 마치고 수강자 두 분의 소감을 살짝 들어보았는데요.
“저는 다산인권센터 자원활동가이고 지금은 개인 자격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아
카이빙 활동을 해보려고 신청했는데, 앞선 강의들에 비해 이번 강의는 조금 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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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를 받았을 시 기준에 따라 수정하여 원고료 지급범위를 정함. ※ 1매에 27행을 기준으로 30%(8행)미만 작성된 매수는 지급매수로 산정하지 않으며 이미지는 홈페이지 업로드 크기와 별도로 센터
양식 기준 최대 10행으로 취급
웠던 것 같기도 해요. 우리가 알고 있는 아카이빙과 실제 아키비스트로서의 아카
이빙이 조금 다르다는 걸 알게 됐고, 그래서 전문적으로 배워보고 싶다는 욕심도
더 들었어요.” (다산인권센터 듬솔)
“저희 단체가 2027년이면 30주년이에요. 선배님들이 그동안 쭉 해오셨던 것들을
정리해보고 싶어서 온라인 아카이빙을 고민하는데, 오늘 구체적인 예시로 실무 얘
기를 해주셔서 가닥이 좀 잡히고 주의할 점들도 도움이 됐습니다. 저희가 몇 년
전 ‘숲과 나눔’ 재단 통해서 기록물을 1천 건 이상 온라인에 올려놓긴 했는데, 단
순히 창고여서는 안 되고 콘텐츠를 만들어야 하잖아요. 이걸 가공해서 뭔가 다른
가치를 창출해 볼까? 그런 아이디어를 오늘 많이 얻게 돼서 30주년 때는 뭔가 좀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안양군포의왕환경운동연합 사무차장 이동현)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이 생각나네요. 구슬 한알 한알이
기록이라면 그 구슬들을 꿰어 만든 목걸이나 팔찌는 콘텐츠, 구슬의 아름답
고 일정한 패턴은 아카이브쯤 될까요? 그중 독창적이고 고유한 스타일의
목걸이는 뜨거운 반응을 얻고 하나의 브랜드로 거듭나겠죠. 양성과정을 수
강하는 분들 모두 자기 브랜드를 가진 보배같은 공익활동 아키비스트가 되
시기를 응원합니다. 얼마 전 개관한 민주화운동기념관으로 떠나게 될 마지
막 4차시 현장탐방도 많이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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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24지난 4월 21일 안산에는 아주 특별한 생일잔치가 있었다. 풀뿌리 여성단체이
자 전국에 하나뿐인 ‘함께크는여성울림’의 창립 10주년을 축하하는 좌담회였
다. 안산 고잔동의 울림 교육장이 “세상을 향한 큰 울림 함께 걸어온 10년
이야기” 꽃으로 가득했다. 김혜정(우공) 전 대표와 조창아(짱아) 신임 대표의
육성으로 여성단체 ‘울림’을 들어보자
자기소개부터 부탁한다. 우공: 10년간 울림 활동가이자 2년의 전임 대표 자리를 벗어나서 회원으로
살기 시작한 지 2개월째인 우공이라고 한다. 아직 정리해야 할 일이 남아 있
어서 완전히 활동가의 탈을 벗지 못했지만 어쨌든 마음은 자유로운 개인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짱아: 나는 지난 2년간 울림의 이사였다가 올해 대표이사까지 맡게 돼 막중
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내가 대표를 맡기 전후로 내란 불법 계엄 사태가
일어났기 때문에 덕분에 활동가로 갑자기 성장한 대표라고 소개하겠다. 울림이 뭐지? ‘함께크는여성울림’을 소개해 달라. 우공: 안산에만 있지만 회원이 다른 지역과 해외에도 있는 전국구 여성단체
다. 일상의 차별과 성 역할에 갇혀 살던 여성들이 모여 떠들고 설치고 자유롭
게 말하는 안전한 공간이자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실천하는 지역의 작은 배움
터다. 이름 그대로 나만 잘 나가는 게 아니라 함께 배우고 함께 성장하는 곳
이고 더 큰 세상과 연결되는 통로다. 짱아: 온오프라인으로 모이는 13개의 회원 소모임이 활발하다. 성평등 가치를
담은 다양한 교육프로그램 운영, 지역사회의 인권 관련 현안, 세월호 참사 등
안산의 민주시민 단체와 연대 활동한다. 12.3 계엄의 밤 이후 123일 동안 ‘비상행동’과 함께 윤석열 파면을 끌어냈다. 올해 4월 울림 10주년 기념 자료
집을 펴내고 좌담회를 비롯한 기념 사업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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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함께크는여성울림’의 창립 과정이 궁금하다. 우공: 여성단체 활동 경험이 있는 세 사람이 주축이 되어 만들었다. 2014년
부터 사회적 기업 등 여성 공동체 설립을 위한 공부를 했다. 지인들과 발기인
을 모으고 돈을 모아 2015년 2월에 안산에서 74명으로 창립총회를 하고 4월
에 법인설립을 완료했다. 돈이 없어서 페인트칠 벽지 등 실내장식을 회원들이
손으로 다 했다. 목재로 된 글자 하나까지 발로 뛰어 찾아서 ‘함께크는여성울
림’ 현판을 달았다. 당시 안산에 여성노동자회와 YWCA 두 여성단체가 있었다. 차별점이 뭔가?
우공: 여성노동자회는 일하는 여성들이 중심에 있고 YWCA는 기독교적 이념
에 기초해 평화운동, 청년운동을 함께하는 좀 더 포괄적인 여성공익 운동단체
다. 각각 엄청난 활동을 하고 있었지만 우리는 “생활 중심형 여성단체”를 만
들고자 했다. 여성취업률이 꾸준히 늘어나고는 있지만 단시간 시간제 노동과
가사와 육아를 전담하는 전업주부도 많은 것이 현실이었다. 지역을 기반으로
사적 공간에 있는 여성들이 사회에 목소리를 내고 공적 활동과 연결되는 통
로가 필요했다. 한마디로 울림은 일상에 밀착된 여성운동 단체다. 지금은 회원이 얼마나 되나? 많이 들고났을 거 같다. 우공: 현재 200명쯤 된다. 한 해 보통 30명씩은 들어왔지만 나가는 사람도
많아 생각보다 증가 속도가 느렸다. 그리고 초창기에 “도와주세요”, 읍소해서
100명 채워준 이들이 시간이 가면서 떠나갔다. 사돈의 팔촌 회원들 빼면 한
50명으로 시작해 10주년에 200명까지 왔다. 상당수 회원들이 기존 회원의 소
개로 오니, 울림은 회원들이 함께 키운 단체가 맞다. 두 분 삶에 울림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또는 울림의 장점을 자랑해 달라. 짱아: 가장 든든하고 신뢰하는 여성들의 집합체다. 울림을 빼면 나를 설명할
수 없을 거 같다. 울림 활동 7년을 통해 인간에 대한 신뢰가 커졌다. ‘성평등
한 민주사회 실현을 위해 함께 배우고 성장하는 생활 중심형 여성운동’이라는
모토 그대로였다. “울림이 뭐 하는 곳인 줄도 모르고 좋은 사람 따라왔다가
배우게 되고 실천으로 연결됐다.” 이런 고백 많이 들었다. 나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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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개 회원 소모임을 자랑하고 싶다. 페미니즘모임, 4.16세월호참사기억모임, 걷기인증모임, 산행모임, 글쓰기및합평모임, 영어모임, 그림모임, 우쿨렐레모
임, 환경모임 등 여성의 관심사만큼이다 다양하다. 홈페이지제작모임, 코딩모
임 등 IT관련 관심도 늘고 있다. 정치 성향 상관없이 관심 분야로 모여 놀며
배우며 활동한다. 소모임에서 어울려 회의나 여성대회 등 큰 행사에 참여하기
도 하고 연대 집회로도 연결된다. 나도 처음 울림에 발을 들인 건 활동가들의
인성이 좋아 보여서였다. 글쓰기 모임을 만들어 활동하다가 ‘별을 품은 사람
들’에서 세월호 기억확동을 하며 내적 외적으로 성장을 경험했다. 우공: 개성 넘치고 재능 있고 멋진 여성들이 울림의 자랑이다. 울림은 여성들
이 서로 연결되는 만남의 장이자 사랑방이다. 사람이 연결되면 거기에 재미난
이야기와 다양한 정보가 오가고 활동을 만들어내고 참여와 연대도 이루어진
다. 아쉬움은 내가 이슈 파이팅 활동에 많이 참여하지 못한 점이다. 연대체들
과 좀 더 적극적으로 했으면 울림도 나도 더 확장될 수 있었을 텐데, 조금
아쉽다. 이제 새 대표가 잘해줄 거라 믿는다. 각자 여성운동에 몸을 담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우공: 나는 좀 늦게 발을 들인 편이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의
세 딸 중 둘째로 남자가 없는 집에서 자라 그런지 여자라고 차별받은 경험은
많지 않았다. 대학에서 학생운동에 몸담았지만, 당시 여성운동에는 별 매력을
못 느껴 안타깝게도 페미니즘 세계를 모르고 20대를 지나쳤다. 그런데 결혼
한 지 일주일도 안 돼 가부장의 세계에 들어왔다는 걸 바로 느끼게 되면서
성차별에 대한 감각이 살아났다. 아이 낳고 바로 일을 시작했는데 재미가 없
고 무의미해 “이렇게는 못 살겠다” 싶더라. 직업상담사 자격을 따고 1년간 봉사했다. 경력 중단 여성들을 위해 뭔가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과 현실의 괴리가 컸고, 여성들과 상담하다 보니 직
장 내 성희롱과 가정폭력 얘기를 많이 듣게 되더라. 야, 여성에게는 취업보다
폭력 문제가 더 심각하구나, 깨닫고 관련 공부를 하게 됐다. 30대 후반 본격
적으로 여성운동 판에 들어간 게 안양여성의전화였다. 젠더폭력에 대응하는
상담도 중요하지만, 성차별 세상을 바꾸는데 좀 더 적극적으로 활동을 하고
싶어 사무국 일을 주로 했다. 그때 처음으로 안산에도 이런 단체가 있으면 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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겠다 생각했고 결국 뜻 맞는 활동가들과 울림을 만들 수 있었다. 짱아: 2018년에 김혜정 사무국장을 만나게 되면서 울림에 가입했지만 별 활
동은 없었다. 순천에서 대학원 생활을 마치고 안산으로 돌아오면서 글쓰기 소
모임을 만들어서 울림 활동가들과 더 가까워졌다. 울림 3년 차에 이혼했다. 나 혼자 사는 집에 울림 사람들이 수시로 찾아와 차 마시고 밥 먹고 술도 마
시며 외로움을 덜어 주었다. 그러다 소모임 ‘별을 품은 사람들’에 들어가면서
이전에 피하던 세월호 참사에 대해 마주하게 됐다. 그때까진 내 슬픔이 가장
컸는데 생각의 전환이 오더라. 외로워서 슬프고 남편이 떠나서 슬프고, 그런
슬픔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지더라. 그러니까 내 슬픔에 매몰됐을 땐 해결
되지 않더니 다른 아픔에 동참하니까 내 슬픔이 작아지고 연대가 주는 위로
가 아주 크게 다가왔다. 도망치지 않고 슬픔의 한가운데에 서는 법을 배운 거
같다. 그러다 울림 이사 제안도 수락했고 대표이사 제의도 수락하지 않았나, 지금 생각하니 그렇다. 계엄 사태 한 달쯤 지났을 때 대표이사 투표가 있었다. 시국이 내가 빨리 대
답하게 했다. 우리 사회 어떡하지, 울림 어떡하지, 모두 내 문제로 다가왔다. 새로 시작한 생업을 하며 대표이사를 맡고 매주 광화문 집회에도 나갔다. 그
때 절박하게 느꼈다. 정치와 내 삶이 따로 있지 않구나. 내 삶을 뒤흔드는 게
정치구나, 내란 시기에 날마다 그런 각성을 했다. 내가 실천을 조금이라도 하
지 않으면 정말 우리나라 전체 이 선박이 좌초되는 건데, 내가 지금까지 사회
가 어떻게 돌아가든 내가 할 게 없다 생각하고 내버려뒀구나, 부끄러웠다. 개
인적인 상황 국가적인 상황 울림의 상황이 다 하나로 연결됐다. 울림의 신임 대표로서 취임 2개월의 소회가 궁금하다. 짱아: 2월 6일에 취임했지만, 작년 12월에 이미 대표이사 투표가 있었고 내
마음의 결정은 아마 우리 아버지 돌아가신 다음에 한 것 같다. 돌봄으로부터
자유로워서 가능했다. 그때 활동가들이 10주년 기념 자료집을 준비하고 쓰고
있었다. 그 작업을 도우면서 이 힘든 일을 왜 하느냐고 조심스레 문제를 제기
했다. 울림 10년 역사를 네 명의 활동가가 책으로 엮기엔 역부족이라 생각했
다. 그만큼 부담이 컸다. 그러나 자료집 초고를 읽다 보니 지난 10년의 사람
들과 역사를 다시 보게 됐다. 그 수고 덕에 내가 안정적으로 5대 대표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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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받을 수 있었다. 책임을 맡고 보니 전에 안 보이던 게 많이 보여서 정말 정신없이 바쁘게 보
냈다. 일단 대외적으로는 연대 활동에 대표가 나가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활
동가 풀이 크지 않아서 지속적으로 나갈 사람이 적은 게 문제라고 생각한다. 항상 시의적절하게 매듭할 거 매듭짓고 자료 정리 잘해준 활동가들이 새삼
고맙더라. 며칠 전 꿈을 꿀 정도였다. 내가 앞으로 2년간 일을 하고도 흩어놓
고 쓸려가게 만들지 않을지 걱정돼서였다. 생업과 울림 활동을 병행하며 일상
을 살아내려니 마음 관리도 잘하려 하고 있다. 파면 전전주에 한 회원이 처음으로 집회 참여를 한 후 들려준 소감이 생각난
다. 원래 “저는 광장 그런 데는 안 나가요.”라던 분인데 내가 지나는 말로 같
이 가자 그랬다. 울림은 누구도 강요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분이 탄핵 광
장에 다녀온 후엔 “민주주의를 바라는 이들이 그렇게 많다는 것, 함께한 시민
들의 모습에 감동했다. 역사의 현장에 있게 해 줘서 감사하다”라고 고백했다. 이게 함께하는 재미다. 창립 맴버로서 전임 대표직을 마치는 소감은 어떤가?
우공: 우리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성평등 수준이 높다고 할 수 없다. 울림도
마찬가지다. 갈 길이 멀고 할 일이 많다. 그래서 책임을 내려놓는 게 마냥 편
하지만은 않다. 그러나 나는 믿음이 있었다. 내가 물러나도 계속 함께 하는
활동가들이 있고 임원을 비롯해 적극적인 회원들이 있다. 또 새 대표가 엄청
적극적으로 해 나갈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언젠가 넘어야 하고 이제는 넘어
가는 걸 시도해 봐도 좋겠다 생각했는데 적기였다. 내 선택이 옳았고 울림도
잘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창립 위원들이 돌아가며 대표를 해 왔는데 이제 다음 세대로 대표 이
전이 되고 임원진들이 바뀌고 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10년을 탈
없이 잘 왔다. “울림이 있어 좋다”라고 말하는 사람들 보면 보람을 느낀다. 10주년 앞두고 몇 차례 비전 워크숍을 하며 우리 단체의 미래를 걱정하는 임
원들이 많아진 걸 보았다. 이사진 중심으로 역할 배분도 되고 공동 운영 마인
드도 생겼다. 조창아 대표가 사람을 포용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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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마음을 모아주고 있는 게 느껴진다. 성공적으로 잘 가고 있는 것 같
다. 향후 10년 울림의 비전과 과제가 있다면?
짱아: 탄핵 광장에 나온 2030 여성들에게서 감동과 자극을 많이 받았다. 그
분들과 연대하는 페미니스트 단체 울림으로 계속 성장하고 싶다. 근데 내가
어떤 목표를 가지고 한다고 가다 보면 사람들을 놓칠 수 있더라. 오히려 사람
들과 하루하루 함께 걷다 보면 길이 만들어진다고 본다. 지금까지 그랬듯 함
께 이야기 나누고 함께 공부하고 글 쓰고 하는 그 자체가 울림의 존재 이유
가 되지 않을까. 앞으로의 도전과 과제는 교육과 홍보, 재정 확충, 세대 간
연대 등이 있다. 운영진과 회원들의 페미니스트 역량 강화도 과제겠다. 현재
로선 울림 자체가 내 꿈이다. 울림이 있다는 자체가 내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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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07“세월호참사를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날의 아픔만을 떠올리는 것이 아닙
니다. 어떤 사회를 만들어가야 하는지,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묻고 행동으로 옮기는 일입니다. 절대 잊지 않을 것입니다. 안전이 기본이 되는 사회, 믿고 살아갈 수 있는 나
라가 되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 기억 편지 낭독 중(세월호참사 생존 학생 장애진 씨)

매년 4월이 되면 전국 곳곳에서 시민들이 세월호참사를 기억하고 추모하기
위해 다양한 자리를 만듭니다. 2025년 4월 16일은 세월호참사 이후 열한 번
째 맞는 4월 16일이었습니다. 16일 오후 3시부터 안산 화랑유원지에서 ‘세월
호참사 11주기 기억식’이 열렸습니다. 노란 옷을 입은 세월호참사 피해 가족들, 노란 팔찌를 끼고 노란 리본 배지를
가슴에 단 많은 시민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또 참사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이야기하고자 해양수산부 장관, 국회의장, 안산시장, 각 정당의 대통령 선거
후보 및 국회의원 등 정치인들의 참여도 눈길을 끌었습니다. 기억식 행사는 304명 희생자에 대한 묵념, 각 분야를 대표하는 분들의 추도
사, 영상 상영과 뮤지컬 공연, 생존 학생의 편지 낭독, 4.16합창단의 합창 공
연으로 이어졌는데요. 현장에 참석한 3,000여 명의 시민들을 비롯해 언론사
의 생중계로 수많은 시민이 기억식을 지켜봤습니다. 사


기억식을 함께 준비한 4·16재단의 박승렬 이사장은 무대에 올라 “세월호참사
가 일어난 지 11년이 지나고 있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사회적 참사와 자연 재
난으로 사랑하는 이들을 잃는 슬픔을 겪고 있습니다.”라며 “생명의 소중함과
일상의 안전이 최우선시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 모두 세월호참사를
평생 잊지 않고 꼭 기억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특히 생명존중과 안
전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새로운 출발점이 될 ‘4.16생명안전공원‘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달라고 당부하기도 했습니다. 세월호참사 피해 가족들을 대표해 무대에 오른 단원고 2학년 1반 故 김수진
학생의 아버지 김종기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은 “참사 이후
11년이 지나도록 아직 세월호가 왜 침몰했는지, 왜 국가는 국민의 생명을 지
켜주지 못했는지 우리 가족들은 알고 있지 못합니다.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
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합니다.”라고 호소했습니다. 이어 “사고는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소중한 생명이 희생되
는 참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국민이 의무를 성실히 지키면서 국가를 믿고
의지하듯 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책무임을
명심하고 최선의 노력을 다해주시길 바랍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추도사에 이어 상영된 <10년의 세월, 그리고 다시 첫 시작>이라는 제목의 영
상은 참가자들의 마음에 큰 울림을 주었는데요. 절대 변할 수 없는, 그래서 결국 그 무엇도 이겨내는
엄마의 약속
(중략)
10년 하고도 다시 1년 이제 아이들을 맞을 준비를 시작했다. 이제서야 아이들이 돌아올 보금자리의 첫 삽을 떴다. 아이들이 우리 품으로 온전히 돌아오면 그때는 진짜 봄이 올까?
진짜 진실이, 진짜 사죄가, 진짜 새 세상이 올까?
10년 하고도 다시 1년 오늘도 다시 약속한다. 꼭 밝히겠다고, 꼭 밝혀내고 말겠다고
- 영상 <10년의 세월, 그리고 다시 첫 시작> 중
참사 이후 10년이 넘도록 아이들이 왜 희생되어야만 했는지 그 진실을 밝히
고자, 나아가 안전사회를 만들고 재난 참사 피해자의 권리를 지켜내고자 걸어
온 세월호 부모님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상이었습니다. 반드시 약속을 지켜내
겠다는 엄마들의 굳건한 의지가 숭고하게 느껴졌습니다.

영상을 다 같이 본 후 희생된 단원고 학생과 아버지의 이야기를 담은 뮤지컬
공연 ‘나, 여기 있어요’가 펼쳐졌습니다. 지난해 10주기 기억식 무대에서 시
낭송을 했던, 그리고 세월호참사 10주기 프로젝트로 제작된 영화 <목화솜 피
※ 파일명 : (제출월일)제목_이름(활동명) / 사진파일 별도첨부
※ 경기천년바탕 Regular, 글자크기 13p(본문), 줄 간격 160%, 상하여백 15, 좌우여백 25, 머리말·꼬리말 15, 300단어 기준 양식에 벗어난
자료를 받았을 시 기준에 따라 수정하여 원고료 지급범위를 정함. ※ 1매에 27행을 기준으로 30%(8행)미만 작성된 매수는 지급매수로 산정하지 않으며 이미지는 홈페이지 업로드 크기와 별도로 센터
양식 기준 최대 10행으로 취급
는 날>의 주연으로 출연하기도 했던 박원상 배우가 열연을 펼쳐, 참가한 시
민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다음 순서로 세월호참사 생존 학생인 장애진 씨가 무대에 올라 기억의 편지
글을 낭독했는데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세월호참사 피해자 가족들과 시민들
은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믿고 언젠가는 괜찮아지리라 생각했지만, 봄이 올 때
마다 아직 마음 한편은 차가워지고 봄은 여전히 멀기만 합니다.”, “두 번 다
시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고, 그대들과 같은 희생자가 생기지 않
게 하겠다고 약속하고 다짐했지만, 또 다른 비극들이 반복되는 것을 보며 우
리가 아직 멈춰서 있는 것은 아닌가 자책도 하게 됩니다. 그날의 봄은 멈춰있
지만 언젠가는 영원히 따뜻한 봄이 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라며 진심을 눌
러쓴 편지글을 전했습니다. 기억식의 마지막 순서는 세월호참사 피해 가족들과 시민들이 함께 만든 4.16
합창단의 공연이었습니다. 4.16합창단의 노래는 기억하고 행동하는 모든 시민
들의 마음을 울리는 빛나는 무대였습니다. 그리고 기억식이 진행되는 도중 오
후 4시 16분, 1분간 세월호참사로 희생된 304명의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한
추모 사이렌이 안산시 전역에 울려 모두가 함께 마음을 모으기도 했습니다. 세월호참사 11주기를 맞은 4월 16일에는 오후 3시 안산에서 열린 기억식 뿐
만 아니라 오전 10시 30분에는 참사가 벌어진 해역에서 ’선상 추모식‘이, 오
전 11시에는 인천에 위치한 세월호일반인희생자 추모관 광장에서 ’일반인 희
생자 추모식‘이, 오후 4시 16분에는 서울에 위치한 세월호 기억공간에서 ’시
민 기억식‘을 진행해 참사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물결이 이어졌습니다.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 아카이브 자료
에디터 활동명 또봉 이 름 강진원
해시태그 #어린이 #놀이권 #보호권 제 출 일 2025년 4월 24일
제 목 놀이터엔 왜 아이가 없을까?
첨부파일명 (없을 경우 생략)
아직도 가끔 힘이 드는 날이면 정글짐 꼭대기에 올라 모래바람을 휘몰아치던, 구
름사다리 너머로 세상을 내려다보던 어린 시절이 떠오르곤 합니다. 하지만 요즘
우리 동네 놀이터에는 아이들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네모난 철봉과 미끄럼틀, 모
래 대신 깔린 고무매트, CCTV 아래 놓인 그네... 어쩌면 이건 ‘아이들을 위한 공
간’이 아니라 ‘어른들이 걱정하지 않도록 만든 공간’이지 않을까 생각이 들곤 했습
니다. 사라진 놀이권, 아이들은 도시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사진 1 (출처 : 에디터 직접촬영)
“뛰면 혼나는 세상, 누구를 위한 놀이터인가요?”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2025년 4월 기준 우리나라의 관리대상 놀이터는 총 83,810
개입니다. 이 중 절반이 넘는 53.7%가 주택단지 내에 있으며, 이는 많은 놀이터
가 해당 단지 주민만 이용 가능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도시공원 내 놀이터는
전체의 14.5%로, 아파트 외 거주 어린이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놀이터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입니다. (출처 : 행정안전부. (2025). 『전국 어린이놀이시설 안
전관리시스템(2024년 4월 기준)』. https://www.cpf.go.kr/cpf/ko/nori/0001/index.jsp)
공원은 또 다른 인간의 동반자인 반려견 산책로로 바뀌고, 방과 후 시간은 학원으
로 향하는 아이들의 스케줄에 밀려 놀이 시간이 자취를 감췄습니다. 저출생으로
아이 수가 줄어들었다는 말은 자주 들리지만, 그렇다고 놀이공간까지 줄어드는 것
이 당연한 일일까요?
사진 2 (출처 : 에디터 제작 / 챗GPT 활용 ai 생성 이미지)
놀이가 사라진 아이들, 성장에도 틈이 생긴다
놀이는 단순한 시간이 아닌 감정 조절, 사회성, 창의성을 키우는 아이들의 필수
활동입니다. WHO와 유니세프는 놀이를 아동의 기본권으로 명시하고 있으며, 유
엔아동권리협약 제31조에서도 “모든 아동은 적절하고 균등하게 여가와 놀이를 누
릴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합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여전히 놀이를 ‘사치’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초등 입학
전부터 시작되는 사교육, 방과 후 시간을 채우는 학원 스케줄, 그리고 놀이를 위
한 공간은 점점 유료화되고 있습니다. 더하여, 관리 주체가 불분명한 놀이터는 민원이나 안전의 이유로 통제되는 놀이시
설도 많습니다. 미끄럼틀에서 넘어졌다고 민원이 들어오면 그 시설을 없애는 경우
나 공원에서 ‘아이들 소리가 시끄럽다’는 이유로 놀이터를 폐쇄한 사례도 흔치 않
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안전’을 이유로 아이들의 모험과 자율은 통제되고, 놀이
터는 규칙 속의 공간으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심리학자 김태형은 “아이들은 자유의사에 따라 놀이를 선택하고, 그 과정에서 기
쁨과 행복 같은 감정을 체험합니다. 이 자유가 절대적으로 중요한 만큼, 이를 박
탈당하면 무력감에 빠지고 맙니다.” 라고 말합니다. (출처: 연합뉴스, https://www.yna.co.kr/view/AKR20161006051800805)
놀이에 대한 어른들의 인식 전환이 필요합니다. 놀이가 단지 여유가 아닌 권리로
받아들여질 때, 우리는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 수 있습니
다. 지금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바로 이 ‘놀이의 자유’입니다. 사라진 놀이권을 되찾기 위한 노력들 – 국내외 사례로 본 실천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실제 지역사회에서는 어떤 실천이 이루어
지고 있을까요? 제도적 한계를 넘어 아이들의 놀이권을 회복하고자 했던 국내외
의 시도들을 통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함께 살펴봅시다.
[경기도] 놀이활동가 파견사업
경기도여성가족재단은 2022년부터 경기도 내 아동 돌봄시설과 놀이공간에 놀이활
동가를 파견하는 시범사업을 추진하였습니다. 이 사업은 전문 놀이활동가가 각 기
관에 상주하거나 정기적으로 방문해 아동의 발달 단계에 맞는 놀이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정서적 안정감을 회복하고
놀이를 통해 또래와의 상호작용을 자연스럽게 경험할 수 있었으며, 기관 내 돌봄
교사의 부담을 줄이고 놀이의 질을 향상시키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특히 코로나19
이후 위축된 아동의 놀이 경험을 회복하는 데 기여한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
았습니다. (출처: 경기도여성가족재단, 2022)
사진 3 (출처 : 경기도여성가족재단 홈페이지)
[전북 완주군] 이동형 플레이버스
완주군은 교통이 불편하거나 놀이터가 없는 농촌 마을을 중심으로 ‘이동형 플레이
버스’를 운영하였습니다. 전문 놀이강사가 장착된 차량을 타고 마을을 순회하며
놀이 프로그램을 제공해 아이들이 매주 규칙적인 놀이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했
습니다. 이 사업은 놀이권 사각지대 해소와 더불어 지역 공동체 회복에도 기여했
습니다. (출처: 완주군청 아동청소년과, 2022)
[독일 프라이부르크] 자연 그대로의 놀이터 조성
독일 프라이부르크시는 기존의 인공적인 시설물 대신 자연지형을 그대로 활용한
‘자연 놀이터’를 조성했습니다. 이곳에서는 흙, 나무, 돌 등을 활용해 아이들이 자
유롭게 탐색하고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합니다. 위험 요소도 최소
화하지 않고 아이 스스로 통제 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설계되었으며, 부모들의 높
은 만족도와 지역 아동의 정서 안정에 긍정적 효과가 있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
니다. (출처: Freiburg City Council, 2021)
사진 4 (출처 : 에디터 제작 / 챗GPT 활용 ai 생성 이미지)
놀이터는 단지 미끄럼틀이 아닙니다. 그곳은 아이들이 사회를 배우고 자신을 시험
해보는 실험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공간을 줄이고, 통제하고 있습니다. 아이
들이 다시 놀이터로 돌아오게 하려면, 단지 공간만이 아닌 ‘놀이할 권리’ 자체를
돌려주어야 합니다. 놀이권은 단순한 문화가 아닌, 아이들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최소한의 조건이자 사회가 지켜야 할 약속입니다. 어른들의 작은 변화가 아이들의 큰 세상을 만들어 갑니다. 놀이터 옆 벤치에 앉기
보다, 아이 옆에서 한 번쯤 그네를 밀어주는 사회, 그게 우리가 시작할 수 있는
첫걸음 아닐까요?
[참고자료]
경기도여성가족재단. (2024). 『아동 놀 권리 보장을 위한 연구』. https://www.gwff.kr/storage/board/privacy/2024/11/11/PRIVACY_ATTACH_17313
04910929.pdf
경기데이터드림. (2024). 『어린이 놀이시설 현황』. https://data.gg.go.kr/portal/data/service/selectServicePage.do?infId=I6Y5W00421
151P0RPW7Y12521845&infSeq=1
행정안전부. (2025). 『전국 어린이놀이시설 안전관리시스템(2024년 4월 기준)』. https://www.cpf.go.kr/cpf/ko/nori/0001/index.jsp
연합뉴스. (2016). 『놀이의 박탈이 만드는 감정의 상처』.
https://www.yna.co.kr/view/AKR2016100605180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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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18도종환 시인은 시 ‘화인’에서 4월을 이렇게 말한다. “이제 4월은 내게 옛날의
4월이 아니다.” 이제 바다도 지난날의 바다가 아니란다. 2014년 4월 16일 그
날 때문이다. 그게 어디 시인 한 사람만의 고백일까. 11년 전 4월 그날 이후
삶이 바뀌었노라, 고백하는 한 사람을 소개한다. 4.16 합창단원이자 세월호
시민 활동가 파주 시민 김서원(도로시) 님과의 일문일답이다.

자기소개와 근황 인사 부탁한다
파주에 있는 여성 위기 청소년 쉼터에서 밥하는 일을 한다. 24시간 생활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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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데 활동가 선생님들과 아이들에게 울타리가 되도록 맛있는 밥을 해 주는
게 내 일이다. 청소년 아이들이 맛있게 먹는 게 내 즐거움이다. 예산에 맞게
좋은 재료 공급 시스템을 만들었다. 매주 월요일 퇴근 후 안산으로 4.16 합
창단 연습하러 가고, 다양한 공연 활동도 한다. 윤석열 파면 결정 나오는 순간 제일 먼저 4.16가족들이 떠올랐다. 4.16 합창
단에서 노래한 건 3년이지만 세월호 가족들 곁에 있는 건 11년째다. 세월호
참사로 나는 정치가 개인의 삶에 얼마나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알게 됐
다. 정치에 무관심한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투표하는 게 전부가 아니라
고, 유언으로 남기고 싶을 정도다. 사람들이 세월호 ‘이전과 이후’로 자기 인생을 나누는 경우를 종종 본다. 내
삶도 그렇다. 그날이 나를 깨웠다. 내가 선택하고 책임지며, 다른 삶을 살게
해줬다. 남태령에 트랙터 몰고 온 농민들 얘기 중에 그곳에 세월호 아이들이
와 있는 거란 말이 있었다. 맞다. 나도 합창단에서 노래할 때 항상 아이들이
함께 있음을 느낀다. 20140416 참사 당일의 기억은?
애들 키우고 닥치는 대로 일하고 아파트 평수랑 좋은 대학 보낼 생각하고 살
았다. ‘애들은 왜 나를 따라주지 않나, 남편은 왜 이렇게 무식할까, 나는 왜
이렇게 고생할까’라며 늘 화가 차 있었다. 노는 날도 놀 줄 모르고 신나는 생
각은 죽어도 못 하는 일 중독자였다. 그런데 수학여행 간 아이들이 돌아오지
못했다고? 갑자기 내 삶이 다 부질없어 보였다. 당일 제일 먼저 찾은 게 우리 애들이었다. 애들이 어디 있지? 아들하고 연락
이 돼서, 배고프지, 라며 짜장면을 사줬다. 짜장면을 먹이는데 더 할 말이 없
었다. 우리 애들은 교복 입고 이러고 다니는데 그 애들은 못 돌아왔잖아. 더
얘기할 수가 없고 마음이 안 잡혔다.


4.16 활동으로 연결되는 계기가 있었나?
갈피를 못 잡다가 지역에서 진실 규명을 위해 서명받는 사람들이 있길래 참
여하고 그 곁에 있게 됐다. 2015년 들어서 별이 된 아이들의 생일 모임을 한
다는 말이 들렸다. ‘아, 그럼 내가 음식을 할 수 있겠다’ 싶어 김경환 목사님
과 네댓이 안산으로 갔다. 가 보니 안산의 ‘치유 공간 이웃’이었다. 우리는 각각 작은 개다리소반에 밥
상을 받았다. 정말 정성스럽게 차려진, 울컥 뜨거운 눈물이 나는 밥상이었다. 가족들에게 차려지는 밥상이라는 생각에 나는 계속 울면서 밥을 먹었다. 이영
하 선생님이 그러더라. “이곳은 야전병원”이라고. 투쟁하고 다치고 지치면 잠
깐 쉬어 가는 곳이라고. 그게 4.16 활동과의 연결이었다. 봉사자 엄마들이 《금요일엔 돌아오렴》(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창비, 2015) 책을 소리 내어 읽는 모임을 만들었다길래 함께 했다. 혼자서는 엄두
를 못 내던 책을 같이 낭독하며 실컷 울었다. 점차 노란 리본을 만든다든가
동네에서 세월호 특별법 서명대에도 섰다. 치유공간 이웃(이웃): 2014년 9월~2021년 2월까지 안산에 있었던 치유 공간. 정신과 의사 정혜신·심
리기획자 이명수 부부가 제안하고 시민단체 활동가 이영하 전 대표(50)가 실무를 맡았다. 수많은 활
동가와 봉사자들이 4.16 가족들이 안심하고 울고, 편하게 밥 먹고 쉴 수 있게 함께 했다. 별이 된 아
이들의 생일 모임으로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책 《밥은 먹었어요?》(이영하, 걷는사람, 2022)와 영화
<생일>(2019, 이종언 감독)에 이웃 이야기가 더 있다. 별이 된 아이들의 생일 모임과 밥 이야기
첫 생일 상차림을 위해 연 계좌에 80만 원이 모였다. 양을 대중 못해 장 보
고 나니 딱 만원 남더라. 이 정도로 돈이 든다면 내 카드 긁을 각오까지 했
다. 그렇게 준비된 영만이 생일 모임에 단원고 아이들과 사람들이 엄청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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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인분이란 음식이 100명 먹고도 남아, 화수분이라며 싸 주었다. -다음 모임은 다음팀이 단톡방을 열어 준비했다. 별이 된 아이 이야기를 공유
하고 좋아하는 메뉴로 준비했다. 나는 그런 팀을 조직하고 식재료를 연결하고
음식도 만들었다. 수많은 봉사자들이 ‘함께하는 이웃’ 밴드에 모여들었다. 저
명한 여성들인 ‘십자매회’를 비롯해 신부님, 선교사님 그리고 시민들의 후원
과 봉사로, 매달 40만 원 정도로 생일 모임을 할 수 있었다. 2015년 겨울에는 가족들을 위해 김장을 했다. 고양파주 생협과 유기농 식당
네트워크에서 재료를 댔다. 괴산 농부님들이 연결됐다. 몇백 포기 배추가 트
럭으로 오고, 성당에서 기도하던 할머니들이 나와서 배추를 절이고 소금, 고
춧가루, 깨 등을 아낌없이 가져오고, 뒷정리를 도왔다. 가족들께 보내고 쌍용
차나 투쟁하는 분들에게도 보내고, 이웃에서 먹을 수 있었다. 단원고 2학년 6반 고(故) 이영만(1998.2.19.~2014.4,16.) 군은 형제 중 막내로 약하게 태어났지만 건
강하게 자라 축구를 좋아하고 5km 마라톤에서 상을 받았다. ‘미소천사’로 밝고 순한 성격에 엄마와 학
교와 친구들을 좋아하고 공부도 잘해 우주학자를 꿈꾸었다. 2023년 ‘이영만 연극상’이 제정됐다. 사진5, 6
4.16 활동 이전에도 음식하기 좋아했나?
나는 4녀 1남 중 막내딸인데, 아버지가 내 밑에 남동생이 난 후로 “서원이가
제일 예쁘다”라는 얘기를 자주 하셔서 그렇게 알고 컸다. 어깨동무 잡지에서
나는 요리 칼럼을 제일 먼저 읽는 아이였다. 신문도 잡지도 요리 쪽을 1번으
로 봤다. 중학교 때 레시피를 보고 낯선 피자를 직접 만들어 봤다. 할라피뇨, 피망 등 없는 건 집에 있는 재료로 대체했다. 엄마가 정육점에서 살이 치렁치렁하게 큰 돼지고기 덩이를 사 온 적이 있는
데 내가 신문에 나온 레시피를 보고 돈까스를 만들었다. 소금 후추만 쓰란 법
있냐, 간마늘로도 재고, 양파로, 우리 아버지 좋아하시는 청양고추 양념으로
도 재어 튀겼다. 온 식구가 얼마나 맛있게 먹겠어. 입 짧은 남동생과 아버지
가 너무 좋아하니, 우리 엄마는 늘 내게 고마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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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들은 나를 “요리 천재”라고 불렀다. 장사하고 늦게 돌아오는 엄마에게 내
가 만든 음식으로 밥상을 차려 드리면 “서원이 때문에 내가 한숨 돌린다”라
며 좋아하셨다. 엄마가 아침에 도시락을 10개 싸던 시절, 내가 만든 반찬 덕
에 엄마 수고가 줄어드는 게 좋았다. 참사 이후의 달라진 삶 이야기
돈도 안 벌고 안산과 파주를 오가며 생일상 차리는 일을 한 2년 했다. 아이
디어로 생각하던 음식을 다 만들어 봤다. 그러나 절대 나 혼자 한 게 아니란
걸 말하고 싶다. 연대의 힘을 배웠다. 같이 메뉴 짜며 마음을 나눈 유가족들
과 십시일반 힘 보태 함께 한 활동가들이 있었다. 그런 중에 나는 이혼했다. 2015년 봄, 불교팀 주방에서는 고기 요리를 할 수
없어서 우리 집으로 장을 봐서 모였다. 남편이 폭발해 소리쳤다. “세월호 참
사 안 났으면 어찌 살았겠냐, 죽은 아이들 생일상 차리느라 가족들 밥은 안
차려주냐?” 그는 상을 뒤엎고, 빌려온 큰 팬을 내 쪽으로 던졌다. 남편이 일
베처럼 보였다. 그날 나는 온 가족을 모아 놓고 이혼을 선언했다. 살아온 날들을 부정해야 했고 다른 일은 눈에 들어오지 않던 때였다. 내 마음
은 그를 용납할 수 없었다. 이혼이 정리되는 몇 달간 남편이 현관문 열고 들
어오면 내 몸이 아프고 소화가 안 됐다. 딸이 나서서 이혼 서류를 갖다 줄
정도였다. 그는 안 하겠다고 버텼지만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18년의 결혼 생
활, 연애까지 25년의 관계가 그해 말 허무하게 끝났다. 사진7,7-1, 8,
이혼 후에도 계속 활동가로
내가 저질렀으니 더 절실하게 활동했다. 2016년 박근혜 탄핵 시국에 민중총
궐기 촛불집회가 매주 있었다. 생일 모임 후에 벙커 원 교회 친구들과 토요일
에 청계천으로 갔다. 매주 집회 광장에서 뭘 해볼까 궁리하다 주먹밥을 만들
어 팔기로 했다. 잘 안 팔리더라. 그래서 그냥 나눠줬더니 사람들이 돈을 던
지고 가더라. 그 후 뭐든 나눔으로 했다. 소녀상을 지키는 학생들, 청와대 앞
법외 노조, 비정규직 집회, 블랙리스트 예술인들. 노숙 농성하는 사람들이 많
았다. 토요일 새벽에 밥을 해서 싸우는 분들에게 가서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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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것 까먹으며 살았다. 고기 안 사 먹고 애들 학원 안 보내고 보험 깨고
적금 해지하고 연금 없어지고 전세가 월세로 줄었다. 불만 많던 아들이 생일
모임에 참여해 보고 반항을 끝내더라. 세월호 당시 중2였던 딸도 생일 모임
에 다녀간 후 엄마를 이해하더라. 박근혜 탄핵 후 지역에서 소수당 진보당에 입당했다. 4.16 활동할 때 제일
묵묵히 함께한 그분들과 파주에서 4.16과 함께 노래하는 일을 시작했다. 음식
만들던 사람들과 함께 공모사업으로 파주 4.16 합창단을 3년 하고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그리고 안산 4.16 합창단까지 하게 됐다. 4년 정도 한 ‘동네
부엌 천천히’에서 청소년 시설로 올해 직장을 옮겼다. 그동안 소진되는 느낌은 없었나?
성과 위주의 인간이었는데 왜 없겠나. 파주 시민 합창단 3년 차 공연을 지역
에 있는 5개 팀 연합으로 잘 올린 후였다. 장애인 가족팀이 40여 명이 참여
해서 한 100명이 했다. 행복하게 끝나고 손뼉 치고 각계 인사들이 인사하고
있는데, 김서원 때문에 불편한 일이 많다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 날 페이스북
에 관련 내용이 올라왔다. 한 번도 생각 못한 일이었다. 내 욕심대로 활동한
적 없다고 자신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 맡은
일을 많이 정리하고 직장 일과 4.16 합창단만 하게 됐다. 자연스럽게 여기저
기 삐끗대는 몸도 돌보며 자신에게 조금 더 집중할 수 있었다. 사진9,9-1, 10
4.16 참사 11주기를 맞는 소회는?
11년간 할 만큼 활동하고 나니 속에 화가 많이 풀리고 너그러워졌다. 대규모
음식을 몇 년 하다 보니 나는 음식 전문가가 돼 있었다. 이제 나는 몸도 마
음도 이전의 내가 아니었다. 성과 위주의 인간이 즐길 줄 아는 사람으로 변했
다. 밥하는 일과 파주랑 안산 4.16 합창단 활동이 날로 재미있다. 그런 중에 작년에 엑스 남편하고 재결합하고 혼인신고도 했다. “당신은 활동
자유롭게 하고 내가 이제 당신한테 은혜 갚게 해 줘”라는 그의 말에 내 마음
이 열린 거다. 밥이나 사나 했더니 그는 점점 밥을 해 주고 싶다더라.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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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던 삶을 되찾은 셈이다. 가족밖에 모르는 성실한 남자였으니까. 바꿔 말
하면 나에게도 완벽주의를 요구하고 자식과 남편만 바라보길 원했더랬다. 그
집착과 강요와 구속이 내겐 화로 쌓였던 거다. 4.16 참사와 함께 깨졌던 관계가 4.16 활동 덕분에 다시 이어진 거다. 남편
은 노년에 내 수발을 잘 들려고 자기 몸 관리 열심히 했다는 사람이다. 우리
관계도 이전의 관계가 아니다.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나이 든 연인이
되었다. 내가 4.16 합창단 공연하고 늦게 오는 날 그는 세탁기 돌리고, 냉장
고 채우고, 맥주 두 캔 먹을 안주 준비해 놓고, 나 데리러 나온다. 돌아보면
이혼은 ‘신의 한 수’였다. 아니면 우리가 서로의 가치를 몰랐을 거다. 이후의 계획이나 꿈은?
이 일을 오래 하고 싶다. 이젠 장사하는 곳에서 밥을 상품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 그런 소질이 없다. 내 엄마, 아버지에게 밥해줬던 재미, 우리 엄마가 늦
게 들어왔을 때 내가 밥 퍼서 김치하고 줘도 “세상에, 서원이 덕분에 엄마가
이렇게 밥을 맛있게 먹는구나.”라며 내 자존감을 키워준 밥이다. 밥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따뜻한 밥을 해 주는 일이 나는 즐겁다. 매일 출근할 때 일하
러 가는 마음보다는 아이들을 키우러 가는 마음이다. 먹이고, 입히고, 안전하
게 재우고, 내 밥을 먹고 애들이 잘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더불어 4.16 가족
곁에서 4.16 합창단을 오래 하는 게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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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