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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광복 80주년의 의미

    2025년 8월 15일은 대한민국이 일제 식민 지배로부터 벗어난 지 정확히 80주년
    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광복절은 단순한 국가 기념일을 넘어, 억압과 폭력 속에서
    도 자유와 독립을 갈망한 민중의 피와 눈물의 역사를 되새기는 날입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망과 함께 찾아온 해방은 한국인들에게 단순한 정치적 독립
    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되찾는 순간이었습니다. 특히 올해 80주년은 더
    욱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은 전쟁, 분단, 산업화, 민주화라는
    험난한 길을 걸어왔지만, 여전히 역사 왜곡과 분단의 상처는 현재진행형입니다. 그렇기에 80주년은 과거를 단순히 기념하는 차원을 넘어, 앞으로 우리가 어떤 나
    라를 만들어갈 것인가를 성찰하는 계기가 되어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자주 간
    과되었던 주제가 바로 여성 독립운동가입니다. 남성 중심의 역사 서술 속에서 여
    성들의 역할은 종종 뒷전으로 밀려났습니다. 그러나 여성들은 총을 들고 싸우거
    나, 첩보 활동에 나서거나, 해외에서 외교 활동을 이어가는 등 결코 작은 역할을
    하지 않았습니다. 더 나아가 가정과 사회의 억압적 관습을 깨고 독립운동에 헌신
    한 여성들의 행보는 오늘날 성평등과 인권의 시각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광복 80주년을 맞아 우리가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다시금 조명해야 하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그들은 역사의 공백 속에 묻힌 존재가 아니라, 독립의 완성을 위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주체이기 때문입니다. ● 여성 독립운동가의 역사적 역할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은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직접적 무장 투쟁에 참여한 여성들입니다. 대표적으로 남자현 지사는 만주와 중국
    에서 항일 무장투쟁에 참여하며 일본 군인 암살과 폭탄 투척 계획을 주도했습니
    다. 그녀는 "내 몸이 썩어 없어져도 조선 독립의 밑거름이 된다면 영광"이라며 생
    을 바쳤습니다. 둘째, 문화·교육 활동을 통해 민족 의식을 고취한 여성들입니다.

    김마리아, 박인덕 등은 여성 교육 운동을 통해 식민지 상황 속에서도 민족의 미래
    를 이끌 차세대를 키우려 했습니다. 이들의 활동은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니라, 여성에게 새로운 사회적 역할을 부여하는 혁명적 의미를 가졌습니다.셋째, 국제
    무대에서 외교적 활동을 벌인 여성들입니다. 유관순 열사가 3·1운동의 상징적 인
    물로 남았다면, 그 외에도 독립운동을 국제사회에 알린 여성들이 존재했습니다. 김알렉산드라(고려인 독립운동가)는 러시아 혁명과 연계해 활동했고, 정정화 지사
    는 임시정부의 자금을 전달하며 항일 외교의 실질적 지원을 했습니다. 이렇듯 여
    성 독립운동가들은 단순한 보조적 역할을 넘어, 독립운동 전선의 다양한 층위에서
    주체적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들의 헌신은 총칼 앞의 용맹뿐 아니라, 문화·교육·외
    교 전선에서 ‘조국의 독립은 남성과 여성 모두의 몫’이라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 유관순 (1902~1920)

    유관순은 충청남도 천안 병천에서 태어났습니다. 기독교 집안에서 성장하며 어려
    서부터 교육을 중시하는 분위기 속에서 자랐습니다. 당시 조선은 일제 식민 지배
    로 민족의 자존심이 짓밟히던 상황이었고, 유관순 역시 어린 나이부터 나라 잃은
    설움을 체감했습니다. 그는 아버지 유중권, 어머니 이소제와 함께 기독교 신앙을
    지켰으며, 이는 이후 독립운동에 나서는 데 정신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1915년 이화학당 보통과에 입학한 유관순은 신여성으로 성장하며 민족 문제에도
    관심을 키웠습니다. 특히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이화학당 동급생들과
    함께 만세운동에 참여했습니다. 당시 고종 황제의 서거가 전국적 분노를 불러일으
    킨 가운데, 유관순은 “나라를 되찾는 데 여성도 앞장서야 한다”는 신념으로 행동
    에 나섰습니다. 3월 1일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시작된 시위에 참여한 그는 이후
    고향으로 내려가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했습니다. 이 시위에는 수천 명의
    군중이 모였으며, 일본 헌병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해 수십 명이 사망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유관순의 부모 역시 일본군의 총탄에 쓰러졌습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비극 속에서도 그는 굴하지 않고 만세를 외쳤습니다. 체포된 유관순은 서대
    문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감옥에서도 그는 동료 수감자들을 이끌며 독립 의지
    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1920년 3·1운동 1주년을 맞아 옥중 만세운동을 벌였고, 일
    본 간수들에게 심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결국 1920년 9월, 만 18세의 나이로 순
    국했습니다. 유관순 열사의 죽음은 전국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일본

    당국은 장례조차 통제했지만, 민중들은 그녀를 ‘대한의 딸’, ‘조선의 잔다르크’라
    부르며 기렸습니다. 그녀는 비록 짧은 생애를 살았으나, 3·1운동의 상징적 인물로
    자리매김하며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았습니다. ● 남자현 (1872~1933)

    남자현은 경상북도 의성에서 태어났습니다. 19세기 말 조선은 외세의 침략으로
    혼란스러웠으며, 그는 어려서부터 강한 애국심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일찍 결혼했
    으나 남편을 병으로 잃고 홀로 아들을 키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국권 침탈
    이 본격화되자 그는 자신의 인생을 독립운동에 바치기로 결심했습니다. 남자현은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을 지원하는 활동에 나섰습니다. 그는 식량과 자금을 마련해
    전달하는 것은 물론, 직접 무기를 다루며 항일 무장투쟁에도 뛰어들었습니다. 당
    시 여성으로서 무기를 들고 전투에 참여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지만, 그는 “나라 없는 여성에게는 가정도, 삶도 없다”며 투쟁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일
    본군 고관 암살을 계획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1932년에는 하얼빈에서 일본의
    대사와 관리들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되었습니다. 체포 후 일본 경찰의 가혹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동지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감옥에서 단식을 이어간 끝에 1933년 옥중에서 순국했습니다. 남자현
    지사의 투쟁은 두 가지 점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첫째, 여성으로서 ‘직접 무장투
    쟁’에 나섰다는 점입니다. 이는 독립운동이 단지 남성의 몫이 아니었음을 증명했
    습니다. 둘째, 그는 조국 독립을 위해 자신의 삶을 철저히 희생했으며, 심지어 자
    녀에게조차 “나는 조국을 위해 살다 갈 것이다”라는 신념을 남겼습니다. 남자현
    지사는 비록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못했으나, 실제로 현장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인물로 평가됩니다. 그의 생애는 여성 독립운동가의 저항 정신을 대표하는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 정정화 (1900~1991)

    정정화는 충청북도 청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교육을 받으며
    새로운 사상을 접했고,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당
    시 많은 여성들이 거리 시위에 참여했으나, 정정화는 단순한 시위 참여에 머물지
    않고 임시정부와의 연결 고리를 자처했습니다. 1920년대 그는 중국 상하이로 건

    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긴밀히 협력했습니다. 임시정부가 운영되는 데 가장 큰
    문제는 자금난이었는데, 정정화는 국내에서 모은 독립운동 자금을 중국으로 전달
    하는 위험한 임무를 맡았습니다. 일본 경찰의 감시가 삼엄했지만, 그는 어린 딸을
    데리고 위장해 국경을 넘나들며 자금을 전달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심부름’이 아
    니라 임시정부 존립의 핵심을 떠받치는 일이었습니다. 또한 정정화는 임시정부 요
    인들의 가족을 돌보는 역할도 했습니다. 그녀는 독립운동가의 아내라는 위치에 머
    물지 않고, 스스로 ‘운동가’로서의 자각을 갖고 행동했습니다. 실제로 훗날 회고록
    『장강일기』에서 “나는 독립운동가의 아내가 아니라, 나 자신이 독립운동가였다”고
    밝힌 것은 여성 독립운동의 주체성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광복 이후에도 정정화
    는 독립운동가 가족들을 지원하는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그는 광복 후 혼란스러운
    시국 속에서 독립운동가들이 잊히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느끼며, 이들의 공적을 알
    리기 위해 기록을 남겼습니다. 1991년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우리의 독립운동은 끝나지 않았다”는 정신을 간직했습니다. 정정화 지사의 삶은
    여성의 역할이 단순히 보조적이라는 편견을 넘어섰습니다. 그녀는 독립운동의 현
    장에서 자금·외교·생활 전반을 지탱한 보이지 않는 중심축이었으며, 여성 독립운
    동가의 대표적 상징으로 평가됩니다. ● 김마리아 (1892~1944)

    김마리아는 황해도 장연에서 태어났습니다. 기독교 집안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서
    양식 교육을 받으며 민족 의식을 키웠습니다. 1910년 국권 피탈 이후, 그는 여성
    으로서 할 수 있는 길을 찾다가 교육과 계몽을 통한 독립운동을 결심했습니다. 일
    본 유학 시절, 그는 기독교계와 학생운동을 통해 민족 문제를 접했고, 점차 정치
    적 투쟁으로 방향을 확장했습니다. 1919년 3·1운동 당시 그는 도쿄 유학생 시위
    에 적극 가담했습니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중에서 가혹한 고문을 당했으나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 귀국한 김마리아는 국내 여성들을 규합해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를 조직했습니다. 이 단체는 여성들의 조직적 항일운동을 주도하며, 독
    립군 자금 모금과 애국계몽 활동을 펼쳤습니다. 여성들이 단순한 가정의 역할을
    넘어 독립운동의 주체로 나선 상징적 사례였습니다. 1920년대 이후 김마리아는
    상하이 임시정부와도 연계했습니다. 해외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며 여성 교육과
    독립운동을 병행했으며, 미국에서도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그는 미주 지역 교포
    사회와 기독교계 네트워크를 활용해 국제적으로 조선의 독립을 알렸습니다. 그러

    나 그의 삶은 끊임없는 탄압 속에서 이어졌습니다. 일본 경찰은 그를 “위험 인물” 로 분류했고, 체포와 감시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건강이 악화되어 광복을 보
    지 못한 채 1944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김마리아는 독립운동사에서 여성 지도자
    로 평가됩니다. 그는 무장투쟁 대신 교육과 조직, 국제 외교 활동을 통해 독립운
    동의 기반을 확장했습니다. 특히 여성들의 정치 참여를 독려하고, 사회적 역할을
    확대했다는 점에서 해방 이후 여성운동의 초석을 놓은 인물로 평가됩니다. ● 윤희순 (1860~1935)

    윤희순은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나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를 온몸으로 겪은 여
    성 독립운동가였습니다. 그는 일찍이 유학자 집안의 며느리로 들어가 전통적인 여
    성의 삶을 살았지만,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나섰습니다. 특히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을미사변 이후, 그는 의병운동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습니다. 윤희순은 단순히 의병을 지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의병가와 격문
    을 지어 민중의 저항 의지를 고취했습니다. 그는 당시 여성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문학적 수단을 항일운동의 무기로 삼았으며, 이는 일종의 ‘문화적 무장투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시와 노래는 남성 의병들에게 전해지며 투쟁 의지를 불태우
    는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윤희순은 직접 의병을 모집하고, 군수품과 자금을 조달
    했습니다.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부상자들을 간호하며 후방 지원에도 헌신했습니
    다. 그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의 자리가 부엌과 가정에 한정되었던 시대를 넘
    어, ‘의병장과 같은 여성’으로 활동했습니다. 1907년 정미의병 이후 일제가 무력
    진압을 강화하자 윤희순은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이어갔습니다. 그는 만주 지
    역에서도 의병 잔여 세력을 규합하며 항일 투쟁을 지속했지만, 일제의 끊임없는
    탄압 속에서 고난의 삶을 살았습니다. 1935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는 “내가
    죽어도 조선은 반드시 독립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집니다. 윤희순은
    여성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최초의 의병 여성 지도자로 평가되며, 후대에 ‘의병장
    할머니’라는 별칭으로 불립니다. ● 오늘날 여성 독립운동가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

    여성 독립운동가를 조명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공로를 기리는 차원이 아닙니
    다. 이는 현재와 미래를 위한 역사 정의의 문제입니다. 첫째, 역사적 균형의 회복

    입니다. 그동안 독립운동 서술은 남성 중심적이었고, 여성의 활동은 부차적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는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여성 독립운동
    가를 다시 조명하는 것은 역사의 공백을 메우는 작업입니다. 둘째, 성평등의 관점
    에서 본 재조명입니다. 여성들은 식민지 상황뿐 아니라 가부장적 사회 구조라는
    이중 억압 속에서도 싸워야 했습니다. 이들의 투쟁은 단순한 독립운동이 아니라, 여성 해방의 기초를 닦은 운동이기도 했습니다. 셋째, 청년 세대에게 주는 교훈입
    니다. 오늘날 자유와 민주주의는 저절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여성 독립운동가
    들의 희생을 기억하는 일은 현재 세대가 누리는 권리와 자유의 뿌리를 확인하는
    과정입니다. 광복 80주년을 맞이한 오늘, 우리는 단순히 기념식에 머무르지 말고, 기억의 확장을 해야 합니다.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을 불러내고, 그들의 이야
    기를 교육과 문화 속에서 계승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광복의 완성이라 할 수 있
    습니다.

    여자라서 더 잔혹하게 죽었다, 그러나 끝까지 싸웠다
    주야

    조회수 89

    2025-08-20
  • 과거가 현재를 구할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에서 한 말이다. 5.18민주화운동 이야기인
    《소년이 온다》를 쓸 때 그와 함께 한 질문이라 했다. 그 책을 쓰는 동안만의
    질문이었을까. 지난 5월 17일(토) 광주의 5.18전야제를 다녀오는 동안 내게도
    살아 있는 질문이었다. 과거가 현재를,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하는 현장을 보
    았기 때문이다. 45년 전의 광주가 오늘 대한민국을 구하고 있었다. 총칼이 아
    니라 노래와 시로, 춤과 연극으로 연대하는 민주주의 대축제였다. 부끄러운 고백으로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1980년 5월에 나는 대구에 사는
    여고 2학년이었다. 당시 TV 화면에 나오는 광주는 ‘폭도’와 ‘빨갱이’의 도시
    였다. 대학생이 된 후에도 광주는 두려운 ‘벽’이었다. 독재와 냉전 시대 교육
    에 길든 아이가 광주의 진실을 마주하기까지는 20년이 더 걸려야 했다. 제45주년 5·18민중항쟁기념행사로 올해도 광주를 다녀오는 복을 누렸다. 개
    인으로서가 아니라 4.16합창단으로서 ‘민주주의 대합창’ 공연에 서는 덕분이
    었다. 구묘역 신묘역을 방문하고 5.18민중항쟁기념행사의 꽃이라 일컬어지는
    전야제도 즐길 수 있었다. 올해는 18일 밤까지 1박 2일로 확대 진행된 전야
    제를 하루만 보고 돌아온 게 아쉽다. 5.18 민주 광장, 동구 금남로 1~3가 차
    없는 거리, 동구 중앙로 일대는 시민 참여 부스 물결이었다. ‘임을 위한 행진
    곡’이 울려 퍼질 때마다 누구라도 목청껏 함께 부르는 축제였다. 다시 만난 소년, 아! 오월이여
    17일(토) 오전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거행된 추모식부터 소개하고 싶다. 안
    산에서 아침 7시에 출발해 구묘역을 들르고 신묘역에 도착했을 땐 5·18민주
    유공자유족회가 주최 주관하는 추모식은 끝나고 있었다. 식전 공연으로 놀이
    패와 장애인예술단의 공연이 있었고 5.18민주화운동 희생자에 대한 전통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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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례 의식을 마친 전통 한복을 입은 분들을 볼 수 있었다. 2부 순서인 국민의
    례로 시작하는 추모식(10시 30분)은 내빈 소개, 추모사, 유가족 대표의 인사
    가 있었고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과 헌화와 분향이 있었다. 추모식에서 가장 소개하고 싶은 순서는 ‘다시 만난 소년, 아 오월이여!’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5·18민주화운동 추모시 낭송 퍼포먼스’였다. 광주시낭송협
    회 사람들이 5·18 광주 추모시를 모아서 한 편 한 편 낭송하는 공연이었다. 오월 광주를 추모하되 시와 음악으로, 피로 쓴 민중항쟁의 역사가 노래와 시
    로 살아나는 시간이었다. 이창병의 ‘망월동에서’ 첫 자락을 보자. “광주 금남로에서/ 이 나라 최후의
    거리마다 쓰러진 넋들의 통곡은/ 우리들의 침묵 속에 깊이 가라앉아 있습니
    다.” 고정희는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라고 읊었다. 김준태의 ‘오 광주
    여! 우리나라 십자가여!’는 광주일보(구 전남일보) 1980년 6월 2일 자 조간 1
    면에 실렸던 시다. 계엄 당국의 검열에 기자들이 사표로 저항한 그 시였다. 다시 만난 소년, 아! 오월이여/ 광주시낭송협회/ 추모식에서 낭송된 시 맛보기
    길을 가다 불현듯
    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사람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달빛 아래서나 가로수 밑에서
    불쑥불쑥 다가왔다가
    이내 허공중에 흩어지는 너
    네가 그리우면 나는 또 울 것이다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고정희
    꽃 떼들도 나비들도 흩어져버린 광주여. 호남이여. 쓰러지고 엎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우리들의 피투성이 도시여. 죽음으로써 삶을 찾으려 했던
    아아, 너 통곡뿐인 남도의 불사조여. 우리들의 도시
    우리들의 도시
    아아, 광주여 광주여 광주여 광주여.
    ‘민족의 십자가여’ /김준태

    동호야!
    죽은 친구의 등허리를 껴안고 우정을 포개고 죽은 소년
    억울한 주검을 나르던 열여섯에게 민주란 무엇이었을까
    어젯밤 나누어 삼킨 주먹밥 한 덩어리
    마지막 눈물처럼 가슴에 퍼부었겠지
    주먹밥처럼 꼭 끌어안고
    죽음도 떼어놓지 못한 밀도로
    어린 친구들은 하늘에서도 주먹밥이 되었을까
    -‘주먹밥의 밀도’ /전숙
    네가 오리고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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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사람이 개처럼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하지
    만 신문에는 한 줄도 실리지 않았다.” 45년 전 전남일보 기자들의 그 절규가
    시로 다시 살아나는 시간이었다. “끝나지 않는 오월 다시 찾은 민주주의 당신
    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80년 오월을 기억하겠습니다. 그날을 잊지 않겠습
    니다.” 시와 노래로 하는 기억의 다짐이었다. 민주주의 대축제 대합창
    3부로 구성된 민주주의 대축제 5·18전야제는 지정남 배우가 진행했다. 1부 ‘오월광주 환영대회’는 오월길맞이굿을 시작으로 금남로에 집결하는 수만 명
    의 민주 평화 대행진 대열을 노래와 춤으로 환영하는 행사였다. 2부는 ‘민주
    주의 축제’로 뮤지컬과 노래로 꾸며지고 3부는 ‘빛의 콘서트’로 노래를 찾는
    사람들을 비롯한 노래밴드들의 무대였다. 전야제 중앙무대는 금남로 4가역
    교차로에 설치되고 양방향으로 여러 개의 대형 스크린이 있었다. 내가 416합창단으로 참여하는 ‘민주주의 대합창’ 공연은 17일(토) 오후 3시반
    에 시작했다. 5.18민주광장에 마련된 특설무대에서였다. 서울 부산 안산 광주
    등에서 온 7개 시민합창단이 개별 공연으로 두 곡씩 부른 후 대합창단으로
    함께 두 곡을 불렀다. 광주는 광주였다. 7개 합창단 중 푸른솔합창단, 1987합
    창단, 광주흥사단합창단 3개가 광주 소재 합창단이었다. 푸른솔합창단(광주): 2015년 6월 ‘합창’을 통해 민주 인권 평화로 상징되는 ‘광주정신’을 전달하
    고, ‘광주공동체’의 희망을 노래하고자 창단했다. 2017년, 2018년 창작 뮤지컬 ‘빛의 결혼식-임
    을 위한 행진곡’ 공연을 성황리에 마쳤다. 615시민합창단(서울): 2009년 8.15행사 공연을 시작으로, 민족의 역사와 겨레의 삶에 수많은 아
    픔을 안긴 분단장벽을 허물고 남북 화해와 평화통일의 새 세상을 열어가기 위해 창단했다. 1987합창단(광주): 광주 전남의 1980년 5.18민중항쟁의 불꽃을 1987년 6월 항쟁의 횃불로 군부
    독재를 종식시키고 민주헌법을 쟁취한 그 뜻을 노래와 합창으로 계승하고자 2018년 창단했다. 광주흥사단합창단(광주): 1913년 도산 안창호 선생이 창립한 민족운동단체 흥사단. 독립운동, 대
    한민국의 민주화, 청소년 계몽, 육성운동으로 2017년 3월 창단, 형화와 자유를 노래한다. 박종철합창단)부산):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열사와 6월 항쟁의 정신을 기리고, 시민문화운동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고자 2016년 8월 16일 창단했다. 416합창단(경기안산):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단원고 희생자 유가족과 생존자 가족, 일반 시민으로 2014년 창단됐다. 소외와 불의, 불평등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곳에 함께 한다. 이소선합창단(서울):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의 영결식을 계기로 2011년 결성된 노동자 합
    창단이다. 서울시로부터 2020년 전문예술단체로 지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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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주의 대합창에서 불려진 노래 제목을 소개해 본다. 아, 민주정부/ 무궁화
    / 다시 만난 세계/ 타는 목마름으로/ 죽창가/ 깍지손 평화/ 그날이 오면/
    죽순밭에서/ 바람에 지는 풀잎으로 오월을 노래하지 말아라/ 개벽/ 껍데기는
    가라/ 인간의 노래/ 돌덩이/ 오월의 노래2/ 단결한 민중은 패배하지 않는다. 전체 합창단이 함께 ‘임을 위한 행진곡’과 ‘광주출전가’를 불렀다. 전야제 2부 순서를 연 뮤지컬 <봄의 겨울, 겨울의 봄>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겠다. 80년 봄과 2025년의 겨울이 중첩되는 판타지 스토리의 뮤지컬. 공연은 “계엄이 계엄이 계엄이 계엄이 계엄이 선포됐다.”를 반복해 부르면서
    시작했다. 이어서 “2024년 12월 3일 도시를 통제하고 국회를 해산하고 수많
    은 사람들을 붙잡아 가두겠다고 계엄령이 선포됐다.”라는 가사는 45년 광주
    와 현재의 서울을 관통하는 ‘계엄’을 보여 주었다.

    “응 엄마, 나? 여의도 가는 길.”
    “응 여보. 걱정말게. 서울 다 와 부렀어. 아 어치게 가만히 있나. 국회 앞에
    탱크가 처들어와부렀다는디!”
    이어서 노래한다. “하늘에는 헬리콥터가 거리에는 탱크부대가. 상상해 본 적
    없어. 이런 세상이 다시 올 거란 걸.”

    그랬다. 45년 전의 그 계엄령 세상이 21세기에 다시 올 줄은 나도 상상하지
    못했다. “추운 겨울이 더욱 추워질지도 모른다,”라고 노래하면 “안 돼! 우리
    가 만든 나라”라고 화답했다. “어떻게 가만히 있어. 학교에서 배웠는데. 나도
    다 알아. 이거 5·18 때랑 똑같은 거잖아. 우리도 광주 사람들처럼 나서야 되
    는 거잖아.”라고 젊은 여성이 외치면 “어쩌면 다시 봄이 오지 않을지 모른다” 라고 노래했다. 현재와 과거를 노래와 춤으로 연결해 주었다. 1980년 오월이
    2024년 12월이고, 광주의 영령이 오늘의 우리를 구했음을. 가수 이은미가 작곡가 김형석이 해석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광주에
    서 사람들과 같이 부르고 싶었단다. ‘서른 즈음에’, ‘가슴이 뛴다’ 그리고 ‘애
    인 있어요’를 열창했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라서일까, 시종 가슴 뭉클하고 눈
    물을 멈출 수 없었다. 작곡가 김종률은 임을 위한 행진곡은 “희생하신 분들에
    대한 존경, 죽음을 뛰어넘는 사랑의 찬사 그리고 물러서지 않겠다는 각오를

    - 5 -

    담아” 작곡했다고 했다. 5·18전야제 브로셔의 글을 옮겨 본다. 민주항쟁의 연원 오월광주로 연어처럼 몰려오는 민주시민들. 고향 집 부모의 마음으로 뜨겁게 환
    영하는 오월 광주 공동체.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금남로에서 새로운 세계를 전망하다. 항쟁의 연원 5·18: 계엄의 밤, 장갑차 앞을 맨 몸으로 가로막은 시민들의 용기는 광주 시민군의 헌
    신이었습니다. 남태령의 새벽, 고립된 농민들을 끝내 지켜낸 연대의 마음은 오월 어머니들의 사랑이
    었습니다. 한남동의 눈보라를 맞으며 새로운 세계를 꿈꾸던 낭만은 민주대성회의 횃불이었습니다. 승리의 약속 5·18: 오월의 기억으로 내란과 맞서 싸우고 있는 국민들이 민주주의 승리의 염원을
    안고 광주로 달려올 것이며, 광주 공동체가 고향 집 부모의 마음으로 뜨겁게 환영할 것입니다. 서로에게 감사를 표하고, 서로를 응원하며, 내란청산과 민주승리를 약속하는 축제를 펼칩니다. 미래의 표상 5·18: 5·18은 미래의 표상으로 승화할 것입니다. 국민주권이 실현되는 민주국가, 국가
    주권이 실현되는 자주국가는 오월 광주가 꿈꾸었던 대한민국입니다. 계급과 계층, 성별과 세대를
    넘어 누구나 서로를 귀하게 여기며 존중하는 대동세상을 오월 광주가 먼저 체험했던 미래입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 그리고 ‘5.18헌법’ 5·18전야제 시민참여 부스의 인상을 정리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올해도 45년
    전 오월의 ‘주먹밥’이 있었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연대와 사랑의 밥을 3개나
    받아먹었다. 영화 <택시운전사>의 모델이 된 독일 기자 한스 패터를 기리는
    초록 택시와 운전자가 있었다. 그 앞에서 인증 사진을 찍어 제시하면 광주의
    소주 ‘잎새주’ 샘플 한 병 받을 수 있었다. “1980년 5월, 광주로 간 택시운전
    사”라는 문구와 초록 택시가 라벨로 붙어 있는.

    ‘아시아의 노벨평화상’이라 불리는 광주인권상을 아는가? 5·18기념재단이
    2000년부터 인권과 평화를 위해 기여한 민주화 운동가들에게 수여하는 상이
    다. 올해 수상자는 동남아시아에서 군사폭력과 인권침해에 맞서 생존자 보호, 진실 규명, 평화 구축 활동을 펼쳐온 인권 단체 ‘아시아 정의와 권리(Asia
    Justice and Rights, AJAR)’다. 특별상은 필리핀 코르딜레라 지역에서 34년
    간 예술을 통해 인권과 공동체 권리를 옹호해 온 ‘DKK문화동맹’이 받았다.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의 실제 주인공인 고 문재학 열사를 비롯한 민주
    유공자들의 묘비를 찾아보자. 구묘역에도 신묘역에도 너무나 어리고 젊은 얼
    굴들을 보라. “5·18정신 계승 민주유공자법 제정하라”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 유족·가족에 대한 교육지원, 취업지원, 의료지원, 대부, 양로지원, 양육지
    원 및 그 밖의 지원”이나 “국가와 지자체는 각종 기념·추모 사업을 실시하고
    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시설물이나 교양시설을 설치할 수 있도록” 하라.

    - 6 -

    “5·18 정신 헌법전문 수록”이라 적힌 부채를 보았다. 홍보 부스에서 “청원 참
    여” 유인물이 배포되고 있었다. 5·18정신을 국가가 책임지고 헌법에 새겨야
    한다는 요지였다. 우원식 국회의장도 “광주의 희생과 단호한 투쟁이 있었기에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지켜졌다. 12·3 불법 계엄의 국민 승리가 바로 오월광주
    의 승리”라며 “5·18정신 헌법 전문 수록을 통해 대한민국을 지켜온 힘이 국
    민에게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새기겠다"라고 말했다. 5·18 정신을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현재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
    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 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
    하여....

    수록 후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
    과 불의에 항거한 4.19와 5.18의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
    명에 입각하여....

    민주주의 대축제 5.18 전야제를 다녀와서
    꿀벌

    조회수 83

    2025-05-20
  • 우리가 모두 알고 있듯 3·1만세운동은 일제강점기였던 1919년 3월 1일을 기
    해 일어난 조선의 독립운동입니다. 전국에서 각계각층이 함께 "조선독립만세" 를 외친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총칼로 무장한 일본의 경찰과 군대 앞에
    맨몸으로 항거한 비폭력 운동이기도 했습니다. 2005년은 3·1만세운동 106주년입니다. 그날을 기억하기 위해 경기도 안산 지
    역에서 시민들이 모여 만세를 외쳤습니다. ‘3·1만세운동 106주년 기념! 한반
    도의 자주와 평화를 위한 안산 만세길 걷기’가 3월 1일 오전 10시 30분부터
    수암동에 위치한 3·1운동기념탑 앞에서 진행된 것입니다. 6.15안산본부, 안산

    지역사연구소, 지역사교육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 안산시흥지부가 함께 준비
    한 안산 만세길 걷기 행사에 참여한 시민들은 1919년 당시 안산에서 3·1만세
    운동이 진행된 실제 역사 현장을 따라 함께 걸었습니다. 안산 지역에서 3·1만세운동이 가장 활발히 이뤄졌던 수암동에 지난 2022년
    3·1운동기념탑이 준공했고, 선조들의 항거를 잊지 않기 위해 시민들이 3월 1
    일이면 매번 이곳을 찾고 있습니다. 이날 안산 만세길 걷기는 기념탑을 시작
    으로 안산초등학교, 비석거리, 향교터, 객사터로 이어졌습니다.

    신길중학교 교사이면서 안산지역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는 신대광 선생님의
    생생한 해설이 있어 만세길을 걷는 시민들은 더욱 역사 속으로 몰입할 수 있
    었습니다. 신대광 선생님의 설명에 따르면 1919년 3월 1일 일제의 무단 통치에 고통받

    던 우리 국민들이 외친 독립 만세는 2달 가까이 이어졌고, 안산 사람들도 손
    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특히 만세운동이 활발
    히 일어난 수암동은 조선시대 수리산 수암봉의 능선을 따라 세워진 읍성을
    중심으로 안산 군수가 머물던 안산 관아를 비롯해 향교, 사직단(제를 올리는
    곳) 등이 있었던 안산의 중심지였다고 합니다. 일제가 국권을 찬탈한 20세기
    초에도 수암동(당시 수암면)은 면사무소와 경찰 주재소, 보통학교, 향교 등이
    모여 있어 중심지 역할을 했고, 총 1,592가구 8,120명이 살고 있었다고 합니
    다. 수암면의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30일 오전 10시경에 비석거리에서 시작되
    었다고 하는데요. 비석거리는 현재 수암농협 근처로 조선시대 당시 안산군에
    부임했던 지방관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송덕비가 모여 있어 그렇게
    불렸다고 합니다. 이 날 수암면에서 대략 2,000여 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였
    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당시 수암면 인구가 8,000명 정도였습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태극기를 흔들면서 경찰관 주
    재소, 수암면사무소, 안산공립보통학교(지금의 안산초등학교), 안산 향교 앞으
    로 몰려가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벌였다고 합니다. 신대광 선생님이 들려준 이야기 속 인상 깊었던 부분이 있었습니다. 일제강점
    기 시기 수암면에서 만세운동을 벌인 안산 사람들이 그린 독립 국가의 모습
    은 어떤 것이었을까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그 답을 와리에 살았던 홍순칠이라
    는 사람의 이야기에서 엿볼 수 있었습니다. 홍순칠은 마을 사람들과 만세운동
    을 준비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조선이 일제로부터 독립하면 일제가
    가졌던 땅은 모두 땅 없는 소작인이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독립을 위
    해 만세 시위에 나서는 것이 우리에게 이득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들이 꿈꾸
    던 해방된 조국은 땀 흘려 일하는 농민들이 자기 땅을 갖는 ‘평등한 나라’였
    을 것이라고 짐작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안산 만세길 걷기에 참가한 시민들은 안산 객사 앞에서 소감을 나누며 행사
    를 마무리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소개한 한 시
    민은 “안산 지역에서도 이렇게 많은 분들이 3·1운동에 참여했고, 현재를 살아
    가고 있는 우리가 역사를 기억하고 보존해야 하는데, 잘 되고 있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수암동 일대의 역사를 제대로 보존하기 위해 당시 만세운동
    을 주도했던 분들을 기억하는 추모비 건립 등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래야
    후대들도 기억할 수 있죠.”라고 호소해 참가자들의 마음을 두드렸습니다. 소감 나눔에 안산초등학교 교장을 지낸 정성조 선생님도 함께 해주셨습니다. 역사의 한가운데 있던 안산초등학교의 역사를 바로 세운 이야기였습니다. 안
    산초등학교는 일제강점기 일본인 교장이 부임해 '안산 공립보통학교'로 재개
    교한 1912년 4월 1일로 개교일을 정해 오랜 시간 유지해 왔고, 지난 2012년
    동문회에서 학교에 개교 100주년 기념탑을 세우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개교 기준으로 삼은 것에 대해 비판 여론이 있었고, 정성조 교
    장선생님은 교직원·동문회와 함께 10년여의 노력으로 결국 1899년 9월 15일
    로 개교일을 바꾼 후 본관 현관에 '안산초교 역사판'을 새롭게 게시했다고 합
    니다. 이는 1899년 9월에 설립된 '안산군 공립소학교'를 안산초교의 역사적
    뿌리이자 공식 개교일로 변경한 것이며, 기존의 100주년 기념탑도 113주년
    기념탑으로 다시 만들었다고 전했습니다. 이번 행사를 주최한 6.15안산본부 김현주 사무국장은 “1919년 당시 우리 지
    역에서 독립운동 역사의 현장에 서 있던 한 당시 시민들의 위대한 모습을 알
    아가는 계기를 만들어보고자 했습니다. 안산 만세길 걷기는 그 모습을 통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진정한 독립과 민주주의, 자주와 평화의 의미는 무
    엇인지 돌아보는 자리로 기획되었습니다."라고 취지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 파일명 : (제출월일)제목_이름(활동명) / 사진파일 별도첨부
    ※ 경기천년바탕 Regular, 글자크기 13p(본문), 줄 간격 160%, 상하여백 15, 좌우여백 25, 머리말·꼬리말 15, 300단어 기준 양식에 벗어난
    자료를 받았을 시 기준에 따라 수정하여 원고료 지급범위를 정함. ※ 1매에 27행을 기준으로 30%(8행)미만 작성된 매수는 지급매수로 산정하지 않으며 이미지는 홈페이지 업로드 크기와 별도로 센터
    양식 기준 최대 10행으로 취급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이 되새겨지는 시간이었습니다. 3·1만세운동은 식민 통치라는 거대하고 두려운 벽 앞에 평범했던 민초가 저
    항했던 불과 100여 년 전 역사입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무엇을 기억하고
    얻을 것인가 고민해 볼 수 있는 소중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더불어 지역 역사
    를 알고, 또 알리는 것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안산 수암동에서 106년 전 "조선독립만세"를 되새기다!
    레지스

    조회수 71

    2025-03-19
  • [기획] 우당 이회영으로 인해 우리는 대한민국이 되었습니다 - 모든 것을 던져 빈손으로 찬란한 독립의 봄을 빚어낸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거대한 발자취

    출처: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 공익웹진

    집안의 모든 재산과 안락을 태워, 어둠 속에 독립의 횃불을 밝히다

    일제강점기의 어두운 새벽, 나라가 국권을 빼앗기고 모든 이가 숨을 죽이던 그 시기. 조선 최고의 명문가로 손꼽히던 이석영, 이회영 6형제는 당대 최고의 부와 권력을 누릴 수 있었던 탄탄한 기득권을 스스로 내려놓았습니다.

    "우리가 누리던 모든 안락은 나라를 잃은 백성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리의 재산과 목숨은 오직 조국의 독립과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데 쓰여야 한다." 모든 재산을 정리해 만주로 향하고, 헐벗고 굶주린 환경 속에서도 전 재산과 온 가족의 목숨을 기꺼이 바쳐 청년들을 길러냈던 우당 이회영과 그 형제들의 숭고한 결단.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 웹진에서는 사욕을 버리고 공익과 나라의 생명을 위해 온몸을 던졌던 뼈아픈 희생과,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의 진정한 의미를 깊이 조명한다.

    우당 이회영이 오늘날 우리에게 건네는 3가지 역사적 거울과 과제

    1. 기득권의 안락을 거부하고 온 재산을 바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

      •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사사로운 이익이나 부귀영화를 뒤로하고, 가진 모든 것을 기꺼이 내어놓아 공익을 위해 헌신했던 참된 지도자와 지식인의 도덕적 최고봉.

      • "나눔과 희생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놓는 실천에서 시작된다"는 묵직한 가르침.

    2. 신흥무관학교 설립을 통한 꺾이지 않는 무장 독립투쟁과 인재 양성

      • 단순히 궐기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만주 벌판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수많은 독립군을 길러내며 꺼지지 않는 독립의 씨앗을 품어낸 미래 지향적 실천.

      • "교육과 자립이야말로 나라를 되찾고 새로운 민주공화국의 뼈대를 세우는 유일한 길"이라는 철학의 완성.

    3. 일제에 맞선 옥고와 순국, 그 고결한 희생 위에 피어난 대한민국의 뿌리

      • 갖은 모진 고문과 차가운 감옥 속에서도 끝까지 지조와 절개를 지키며 순국하기까지, 자유와 평등을 향한 투쟁이 곧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대한민국의 튼실한 뿌리가 되었음을 기억하기.

      • "우리가 지금 딛고 서 있는 자유로운 일상은 수많은 우당들의 피와 눈물 위에 세워진 빚"이라는 역사적 성찰.

    현장의 온기로 채워졌던 뜨거웠던 기억과 다짐의 시간들

    우당 이회영 선생의 발자취를 돌아보고 그 정신을 오늘날 경기도의 공익 현장에 되새기는 도민들과 활동가들의 모임은, 깊은 울림과 뜨거운 눈물로 가득했다.

    • 우당의 삶을 되짚는 역사 토크 및 증언 세션: "모든 것을 가졌던 이들이 어째서 모든 것을 버리고 아스팔트와 만주 벌판으로 나섰을까"를 곱씹으며, 참된 공익과 연대의 가치를 눈물로 공감하던 도민들의 뭉클한 순간들.

    • 오늘날의 공익활동과 오버랩하는 브레인스토밍: "우당이 온 재산을 던져 나라를 구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 사회의 불평등과 차별을 허물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기꺼이 내어놓아야 할까"라며 진지하게 고민을 나누던 청년 활동가들의 반짝이는 눈빛.

    • 응원과 다짐의 피날레: "우당 이회영의 희생과 헌신으로 지켜낸 이 나라에서, 모든 도민이 차별 없이 존중받고 함께 웃을 수 있는 공정하고 평화로운 경기도를 만들기 위해 끝까지 함께 걸어 나가겠다"며 환한 미소와 박수로 마무리된 연대.

    정직한 희생과 다정한 손길로 그려가는 경기도의 찬란한 내일

    세상을 바꾸고 진정한 공화국의 가치를 완성하는 위대한 힘은 권력과 부를 움켜쥔 채 침묵하는 방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라가 아프고 이웃이 눈물 흘릴 때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내어놓는 평범하면서도 위대한 영웅들의 정직한 희생 위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우당 이회영 선생이 품었던 꺾이지 않는 독립의 정신과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불꽃을 가슴에 품고, 오늘날 경기도의 공익 생태계를 묵묵히 다져나가는 활동가들과 도민들. 경기도 구석구석에서 피어나는 이 기억과 연대의 온기들이, 모든 도민이 소외되지 않고 오래도록 함께 웃을 수 있는 공정하고 지속 가능한 경기도의 내일을 활짝 열어주기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우당 이회영으로 인해 우리는 대한민국이 되었습니다.
    목소리해결사

    조회수 16581

    2023-05-22
  • 과거의 발자취 속에서 오늘날 우리의 평화를 길어 올리다

    우리가 무심코 거니는 일상의 동네 골목이나 평화로운 공원 뒤편에는, 치열했던 독립의 함성과 민주주의를 향한 뜨거웠던 열망, 그리고 아픈 분단의 역사가 겹겹이 쌓여 있다. 교과서 속 활자로만 머물던 역사는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 구석구석의 생생한 현장 속에 깊숙이 숨 쉬고 있다.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 웹진에서는 경기도 의왕시를 중심으로, 선조들이 남긴 숭고한 발자취를 따라 걸으며 독립과 민주, 그리고 평화의 가치를 온몸으로 되새기는 ‘의왕 역사탐방’의 의미 깊은 여정을 조명한다.

    의왕 역사탐방이 품고 있는 3가지 역사적 결기

    1. 일제강점기 뼈아픈 시련을 이겨낸 독립의 함성

      • 주권을 빼앗긴 암흑의 세월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의왕 지역 의병들과 독립운동가들의 숨결이 서린 유적지 탐방.

      •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는 진실 앞에서, 빼앗긴 들에도 봄을 찾아오게 만들었던 선조들의 불굴의 투지를 가슴 깊이 새긴다.

    2. 독재와 부당함에 맞서 민주주의를 쟁취한 뜨거웠던 저항

      • 억압의 시대를 지나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평화가 결코 거저 주어지지 않았음을 깨닫고, 민주주의의 소중한 가치를 온몸으로 체득하는 민주화 운동의 발자취 추적.

      • 평범한 이웃들이 손을 맞잡고 거리에 나서 역사의 흐름을 바꾸었던 풀뿌리 민주주의의 저력을 확인한다.

    3. 분단의 아픔을 넘어 평화와 공존을 꿈꾸는 생태·역사적 공간

      • 상처 입은 과거를 넘어, 세대를 뛰어넘어 모두가 함께 어우러지는 평화로운 미래를 상상하게 만드는 의왕의 숨은 명소들과 생태·역사 탐방 코스 결합.

    발길마다 피어나는 경기도의 역사적 자부심

    역사탐방은 단순히 오래된 과거의 흔적을 구경하는 관광이 아니다. 그것은 어제의 아픔과 투쟁을 디딤돌 삼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어떤 가치를 붙들고 내일로 나아가야 할지 방향을 비추어주는 나침반이다.

    • 지역 주민과 청소년이 함께 걷는 풀뿌리 역사 교육: 책을 덮고 현장으로 나와 의왕의 구석구석을 탐방하며, 자라나는 세대들이 우리 지역에 대한 깊은 자부심과 역사 의식을 키워나가는 과정.

    • 기억을 연대로 잇는 공익적 실천: 독립과 민주, 평화라는 보편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묵묵히 길을 내어온 지역 시민사회와 단체들의 따뜻한 동행.

    역사와 평화가 손잡고 걸어가는 의왕의 내일

    우리가 밟고 서 있는 땅 아래에는 수많은 이들의 눈물과 헌신, 그리고 평화를 향한 간절한 염원이 켜켜이 묻혀 있다.

    의왕의 푸른 자연과 깊은 역사 속에서 선조들의 숨결을 느끼고, 그들이 피워낸 독립과 민주, 평화의 불꽃을 오늘 우리의 가슴속에 다시 환하게 밝히는 시간. 경기도 구석구석에서 역사적 진실을 기억하고 연대의 손을 맞잡는 다정한 발걸음들이, 모든 도민이 공정하고 평화로운 내일을 꿈꿀 수 있는 찬란한 희망의 등대가 되기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의왕 역사탐방으로 함께하는 독립과 민주, 평화의 역사 현장
    유유당

    조회수 5511

    2022-10-04
  •  

    [기사] 청년창업의 꿈을 실현해주는 무한도전의 장, 남양주 ‘이석영 신흥상회’

     

    청년의 꿈이 자라는 터전, ‘이석영 신흥상회’

    아이디어와 열정은 넘치지만 자본과 경험의 부족으로 창업의 문턱에서 좌절하는 청년들이 많다. 창업은 개인의 도전을 넘어 지역 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중요한 공익적 과제이기도 하다.

    경기도 남양주에는 청년들이 꿈을 포기하지 않고 실질적인 창업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든든한 발판이 되어주는 공간이 있다. 바로 독립운동가 이석영 선생의 정신을 기리며 청년들의 자립을 지원하는 복합문화공간 ‘이석영 신흥상회’다. 이곳은 청년 창업가들에게 저렴한 임대료와 실전 창업 기회를 제공하며, 지역 공익활동과 상권 활성화의 모범 사례로 자리 잡고 있다.

    ‘이석영 신흥상회’가 품은 특별한 가치와 지원

    단순한 상업 공간을 넘어 청년들의 꿈을 인큐베이팅하는 이석영 신흥상회는 다음과 같은 가치와 지원을 제공한다.

    1. 실전 창업 인큐베이팅과 경제적 부담 완화

      • 창업 초기 가장 큰 부담인 임대료와 공간 마련의 벽을 낮추어, 청년들이 온전히 제품과 서비스 경쟁력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다.

      • 입점 청년들은 실제 매장을 운영하며 마케팅, 고객 응대, 재고 관리 등 현장에서 꼭 필요한 실무 역량을 자연스럽게 체득하게 된다.

    2. 독립운동의 정신을 잇는 청년들의 자립 공간

      •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해 전 재산을 내어놓았던 이석영 선생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이어받아, 오늘날 청년들이 스스로 자립하고 미래를 개척할 수 있는 도전의 장을 제공한다.

    3. 지역 사회와 상생하는 문화·공익 플랫폼

      • 청년 창업가들의 독창적인 아이디어 상품과 공방, 디저트 등이 모이면서 지역 주민들에게는 새로운 문화·소비 경험을 선사하고, 골목상권에는 신선한 활력을 불어넣는 상생의 거점 역할을 한다.

    청년의 내일이 곧 경기도의 내일

    이석영 신흥상회는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공간이 아니라, 청년들의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와 도전 정신이 고스란히 담긴 공익의 현장이다.

    오늘도 이 작은 상회 안에서는 수많은 청년 창업가들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세상과 마주할 준비를 하고 있다. 청년의 꿈이 실현되고 지역 사회가 함께 성장하는 따뜻한 연대. 경기도 구석구석에서 피어나는 이러한 청년들의 빛나는 도전에 따뜻한 박수와 응원을 보낸다.

    청년창업의 꿈을 실현해주는 [이석영 신흥상회]
    이오

    조회수 5552

    2022-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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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 안점순!’  인권운동가 안점순!’을 아시나요?

     

     

     

    수원시 팔달구 올림픽 공원을 산책하다 보면 수원지역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필동 임면수선생의 동상이 서 있다. 그는 수원지역에서 교육을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삼일학교를 공동으로 설립하고 교장을 맡으며 후학을 길러냈다. 하지만 일제의 감시와 억압으로 재산을 정리하여 만주로 이주하여 독립군을 길러내는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그리고 걸음을 돌려 오른쪽을 바라보면 또 하나의 동상을 발견할 수 있다. 거칠게 잘린 단발머리와 두 주먹을 꼭 쥔 채 맨발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동상. 우리는 그 동상을 평화의 소녀상이라고 부른다.

    독립운동가와 일본군성노예제 피해자의 동상이 같은 공간에 다른 느낌으로 공존하고 있으며 이질적으로 보이는 이 두 개의 동상에는 식민지 시대를 살아내야 했던 당시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빼앗긴 나라를 찾겠다며 독립 만세를 외치고 재산과 목숨을 담보로 독립운동가로 불리며 이 땅을 떠났고, 누구는 어린 나이에 일본군위안부라는 이름으로 머나먼 땅에 버려졌다.

    해방 후 징병. 징용으로 일제의 전쟁터로 끌려갔던 남자들과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환대를 받으며 해방된 조국에 희망을 품고 들어왔지만 소위 일본군위안부라 불리던 소녀들은 유령처럼 기척 없이 이 땅에 발을 들였다. 그리고 30년이 지나도록 깊게 베인 마음과 몸의 상처를 꼭꼭 숨기며 살아왔다.

    1991814일 일본 정부와 우리 사회에서도 그 실체를 부인하던 일본군위안부피해자인 김학순이 내가 일본군위안부피해자의 산증인이라며 최초로 나서자 용기를 얻은 생존자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남한 사회에서만 약 240명의 피해자들이 30년간 홀로 삭히고 있던 끔찍한 기억들을 소환하여 일제의 만행과 거짓말, 한국 정부의 무관심에 대해 시민들과 함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일본군성노예제피해자 중 한 명이 안점순이다.

    안점순은 1928년 서울 마포에서 출생했으며 14살이란 어린 나이에 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갔다. 평양, 텐진, 내몽고 등 알 수 없는 곳을 3년이나 전전하다 해방이 된 후 가까스로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피폐해진 정신과 만신창이가 된 몸은 그녀를 석 달 동안이나 고열에 시달리게 했다.

    그 후 트라우마와 싸우며 대인기피증까지 생겼던 그녀는 2003년 피해자 신고를 하고도 10년이 지난 후에야 순이가 아닌 안점순이라는 본명으로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그 후 수원에 정착하게 되면서 일본군성노예제문제해결을 위한 시민단체인 수원평화나비와 함께 활발히 활동하였다.

    수원평화나비는 일본군성노예제를 세상에 알리고 다시는 이와 같은 인권유린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첫 번째 활동으로 수원시에 평화의 소녀상건립을 위해 관내 시민단체들과 시민들이 결성한 단체이다.

    이 활동에 공감한 많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모금으로 201453일 수원시 올림픽 공원 내에 평화의 소녀상을 건립하였으며, 수원시민들은 더 나아가 세계에 이 문제를 알리기 위해 모금 활동을 이어갔고 그 결과 201738109회 세계여성의 날에 맞추어 유럽 최초로 독일 레겐스부르크 파비용 네팔공원에 순이라는 이름의 평화의 소녀상을 두 번째로 건립되었다.

    이러한 활동의 중심에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안점순이 아닌 인권운동가 안점순이 중심에 있었다. 당시 89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왕복 약 24시간의 비행과 89일의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며 홀로코스트 못지않게 잔인하게 가해진 일본군위안부의 존재를 알렸다.

    그리고 과거 역사적 피해 사실에 대한 증언뿐 아니라 현재에도 벌어지고 있는 전시 성폭력에 대한 인권유린과 그 심각성을 전세계에 알림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가치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이러한 그녀의 활약으로 독일은 역사 교과서에 일본군성노예제에 대한 내용을 싣게 되었으며, 자료사진으로 순이제막식에 참석한 그녀의 모습을 실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그녀의 모습과 목소리를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다.

    201833090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녀의 삶도 마감되었다.

    다음 생에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의 질문에 부자도 지식인도 유명인도 아닌 다시 여자로 태어나서 살아보고 싶어요.”라는 소박한 소망이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한다.

    전쟁, 여성, 인권, 평화 등 우리에게 진한 울림을 던지고 떠난 안점순을 수원시민들은 계속 기억하고 잊지 않고 있다. 매월 첫 번째 수요일 정오가 되면 사람들은 소녀상에 모여 바위처럼이라는 노래와 율동을 시작으로 일본군성노예제를 알리는 수요문화제를 2017년부터 지속적으로 개최하고 있다.

    또한, 올해는 그녀의 4주기를 맞아 수원평화나비가 주관하고 수원시도시공사가족여성회관’, 소녀상 작가인 김서경. 김운성작가의 협찬으로 특별전시회를 열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피해자로는 최초의 개인기념관인 기억의 방(2021/수원시도시공사가족여성회관 내)’2층 갤러리에서 38일부터 48일까지 전시된다.

    이번 특별전시회에는 안점순뿐 만 아니라 또 다른 일본군 위안부피해자이자 인권운동가였던 그녀들의 기록과 언어가 함께 전시되고 있다.

     

     

     

     

     

     

     

    ‘안점순 여성인권운동가’를 아시나요?
    봉봉맘

    조회수 485

    2022-04-14
  •  (출처: 페이스북 반크 홈페이지)

     

     

    안녕하세요. 경기도 공익활동지원센터 에디터 HHDM Hyun입니다. 오늘은 시민단체 중 공공외교를 고민하고, 다양한 청소년-청년들이 공공외교에 도전할 수 있게 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단체, 반크를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반크는 19991, 인터넷에서 전세계 외국인에게 한국을 알리기 위해 설립된 사이버 외교사절단입니다. 인터넷에서 사이버 외교관을 양성하여 전 세계 네티즌에게 한국을 바르게 알리는 활동을 준비했었으며 현재까지도 국제 문제에 능동적인 대응에 임하는 단체입니다. 지구촌 빈곤, 환경, 인권, 물 부족, 질병 오염 등 다양한 문제를 알리는가 하면, 대한민국의 아름다움(전주 한옥마을, 경복궁, 독도 등)도 홍보하고, 일본의 역사 왜곡에도 맞서 싸우고 있습니다.

     

    반크의 영향력은 현시대에서 엄청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독도, 위안부를 대상으로 한 일본의 역사 왜곡, 한복, 김치 등을 대상으로 한 중국의 동북공정 등 최근 논란이 되는 여러 이슈에서 앞장서서 목소리를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넷플릭스를 대상으로 일본의 역사 왜곡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네즈코라는 이름과 코스프레로 한때, 한국에서 유명했던 일본 애니메이션 <귀멸의 칼날>에서 주인공 탄지로가 욱일기를 연상하게 하는 귀걸이를 착용하고 있었는데, 이 부분을 반크가 비판한 것입니다. 한국판에서는 사라졌지만, 호주 등 해외 방송에서는 여전히 욱일기가 남아있어 시정을 요구하였죠.

    https://blog.naver.com/vank1999/222266254018

     

     

    그리고 연합뉴스와 함께 하버드대 로스쿨 마크 램지어 교수의 논문을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의 위안부를 매춘부로 비하하였고, 이 부분에 관해 하버드대에 항의 서한을 보냈으나, 바카우 총장은 학문의 자유라며 따로 이를 철회할 의무가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에 반크의 청년리더 옥다혜는 학문의 자유는 윤리와 의무를 다한 학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부산외국어고등학교 시절부터 반크 활동을 시작한 그녀는 현재 연세대학교 로스쿨 졸업을 앞두고 있는데요, 바카우 총장에게 항의 서한을 보낸 사람이 이 사람입니다.

    https://blog.naver.com/vank1999/222247167051

     

    그리고 이를 더욱더 보도하였는데, 추후에 JTBC에 등장하며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https://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1992857

     

    이렇게, 반크는 전반적으로 대한민국의 역사를 수호하고, 대한민국에 관한 인식을 심을 수 있게 하는 단체입니다. ‘사이버외교관을 양성하겠다는 꿈은 반크에서 시작되었고, 이곳에서 활동한 전국구의 청소년이 청년이 되면서 공공외교의 주체가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공공외교를 실천한 가장 우수한 사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반크가 진행하는 프로그램}

     

     (독도사관학교 활동 키트)

     

    반크는 대한민국의 역사를 알리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데요, <독도사관학교>, <한국문화관광홍보대사>처럼 주로 대한민국의 문화, 독도를 중심으로 콘텐츠를 제작하고, 외국인에게 새로운 사례를 알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720만 재외동포를 대상으로 <글로벌 재외동포 한국 홍보대사>도 준비하고 있는데요, 작년 11월에는 천진한국국제학교를 대상으로 <글로벌 한국 홍보대사>를 위촉해 온라인 발대식과 교육특강을 실시했습니다.

     

    https://blog.naver.com/vank1999/222141051825

     

     

     

    {여러 프로그램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

     

     

     

     

    그중에서 인상에 깊은 건, 역시 국가브랜드업 전시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 활동으로 바빠진 가운데, 이 활동만큼은 꾸준히 참여하려고 했었을 정도로 애정을 둔 활동인데요, 매년 다른 주제를 선정해 대한민국을 알리는 활동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활동의 시작도 순탄치 않았는데요, 처음에는 국립중앙박물관 내부에서 대한민국의 역사를 알리는 활동으로 시작했지만, 내부에서 진행하기에는 건물 내부가 좁아 4호선-경의중앙선 이촌역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가는 길에서 활동을 진행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길거리에서 진행하는 활동이었고, 국립중앙박물관에 방문하는 다양한 사람을 맞이해야 했으므로 활동 자체가 쉽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가족 단위의 사람부터 노인, 어린이 등 다양한 사람과 만나면서 교과서에서는 만나볼 수 없는 역사를 알려주고, 대한민국의 역사를 알리고자 하는 그 행동이 매력적이라서, 계속 활동에 임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참여를 희망하는 사람이라면, 반크 홈페이지에서 참가 신청을 하고, 도슨트로서 전시 기간(대체로 6일 동안 진행됩니다.) 동안 설명을 진행할 수 있습니다. 중학생부터 고등학생, 대학생, 청년까지 다양한 사람이 모여요!

     

    연합뉴스와 공동으로 주최하는 이 국가브랜드업 전시회는 지금까지 독도, 일본의 제국주의, 3-1운동을 알려지게 해준 선교사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몽골 어의로 활동하며 질병퇴치에 힘쓰고,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태준 등 교과서에서는 만나볼 수 없는 역사를 알리고, 그리고 김구, 윤봉길 등 대한민국 독립에 큰 영향을 준 인물에 관해 다시 배울 수 있었던 활동으로, 코로나19가 활성화된 이후로는 온라인으로 활동이 전면 전환되었습니다.

    https://blog.naver.com/vank1999/222254523063

     

     

    대신에 한국어 사이트와 영문 사이트를 따로 구축하였고, VR 갤러리도 구축하였습니다. 이번 전시회는 한국의 친구 아세안으로 라오스, 캄보디아, 말레이시아, 라오스, 한국 등 10개 국가의 청소년이 모여 대한민국과 다양한 국가의 메시지를 들어볼 수가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반크 유튜브를 참고해주세요!

    https://www.youtube.com/user/prkorea/videos

     

     

     

    {경기도에서는 어떠한 영향을 끼쳤을까?}

     

    앞에서 언급한 활동이 반크의 대표적인 활동이지만, 경기도에서는 다양한 청소년이 여러모로 많은 활동에 임한 모습이었습니다.

     

    먼저, 2011년에는 한국홍보아이디어대회가 진행되었습니다. 개인-학교 차원에서 반크 회원의 독도 및 대한민국 알리기 활동사례를 공유할 수 있었던 자리였죠. 여기에 단체부문으로 성남외고의 반크 동아리 SNFL VANK가 참여했었습니다.

    https://blog.naver.com/vank1999/10122208794

     

    2015, 국립중앙박물관 내에서 광복 70이라는 주제로 국가브랜드업 전시회가 진행되었습니다. 이때, 수원외고 2학년이 되는 학생, 당시에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고양국제고 학생, 3학년으로 진학하는 청심국제중고 학생 이 행사에 참여했던 적이 있습니다.

    https://blog.naver.com/vank1999/220288765511

    https://blog.naver.com/vank1999/220288767586

     

    2017년에는 용인에 거주하는 한 중학생이 국가브랜드업 전시회에 참여합니다. 사람들에게 동해에 관해 알린다는 점에 의의를 두고 있었고, 당시에 용인외대부고(HAFS)로 진학하는 걸 꿈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추후, 그녀의 꿈은 이루어집니다.

    https://blog.naver.com/vank1999/220954776736

     

    고양국제고등학교에서도 참여했었습니다.

    https://blog.naver.com/vank1999/220944286367

     

    번외로, 오타가 있긴 했지만, 용인외고 재학생이 2019년에도 참여했던 기록이 있습니다. https://blog.naver.com/vank1999/221475161007

     

    특히 고양국제고의 활약이 눈에 띄는데요, 2019년에 우수 반크 동아리로도 선정된 바가 있습니다. https://blog.naver.com/vank1999/221781706578

     

    현재는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계정을 활용해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이를 종합해보면, 경기도 각지의 청소년에게 외교관의 꿈을 심어주었고, 참여의 기회를 다수 제공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공공외교를 누구나 실천할 수 있다는 걸 알려주었고, 이제는 반크 동아리 차원에서 활동하게 하였습니다.

     

    현재는 아쉽게도 코로나19 때문에 이전처럼 한복을 입고 광화문에서 캠페인을 진행하는 등의 활동은 더는 불가합니다. 그래서 주로 온라인으로 활동하는 모습인데요, 반크에서도 이에 맞춰서 온라인 전시회 개최, 발대식 진행 등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온라인 네트워크 확대와 다양한 반크의 사례를 공유하여 경기도의 청소년이 대한민국 역사에 관심을 두게 하는 것, 이것이 지금 반크가 맞닥뜨린 과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반크가 계속 활동을 이어가는 것처럼, 앞으로도 경기도, 이를 넘어 전국구로 선한 영향력을 끼쳤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국민이라면 모두, 대한민국을 알릴 수 있습니다! 반크와 함께라면!
    HHDM Hyun

    조회수 620

    2021-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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