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통문」이 만든 양성평등주간에 다시 생각해보는 성평등한 명절
안태윤(젠더와평화연구소 대표, (재)지속가능경영재단 전문위원)
오는 9월 1일부터 7일은 「양성평등기본법」에서 정한 양성평등주간이다. 양성평등주간은 7월 1일부터 일주일이었다가 2020년 9월 22일 동 법을 개정하여 지금과 같은 9월 첫 주로 바뀌었다. 그렇게 바뀌게 된 데에는 1898년 9월 1일에 발표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인권선언문인 「여권통문」의 역사와 의미를 알리고 양성평등을 촉진한다는 취지가 담겨있다. 2020년부터 9월 1일은 ‘여권통문의 날’로 법정기념일이 되었고, 양성평등주간 중 목요일은 ‘양성평등 임금의 날’로 정하여 성별 임금 통계 등을 공표하고 있다.
<여권통문 전문을 실은 「황성신문」> / 박정숙 서예가의 「여권통문」 / 출처 : 여성가족부 보도자료(2018.8.23.)
그 내용을 필자 나름대로 현재의 언어로 바꾸어 보면 이렇다. ‘이천만 동포가 구습을 버리고 개명한 신식을 따라 새롭게 바뀌고 있는데 왜 여전히 여성들은 남자가 벌어다 주는 것만 먹고 평생을 집안에 머물러 밥만 하면서 남성의 통제를 받아야 하는가? 일찍이 문명개화한 나라들은 남녀가 평등하다. 여성도 어려서부터 남성과 다름없이 교육을 받고 능력을 키우기 때문에 결혼 후에는 오히려 남편의 존경을 받는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남편들은 위력으로 아내를 누르기 위하여 여자는 자고로 집안에 머물면서 밖의 일에는 참여하지 않고 밥하고 집안일만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구습을 주장하고 있다. 우리 여성도 남성과 똑같은 몸을 갖고 태어났지 않은가? 그러니 나라에서는 여학교를 세워 여성들도 배울 수 있도록 하고, 동포들도 뜻을 같이 하여 여학교 설립에 참여해주기를 바란다.’
통문의 내용을 읽어볼수록 19세기 말 개화의 물결을 타고 우리의 선배 여성들이 여성에 대한 불합리한 대우와 제한된 기회를 비판하고 적극적으로 성평등한 권리를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 가슴에 와닿는다. 여성들은 교육의 기회가 제한되었지만 글을 읽고 세계 정세를 파악하였으며, 젠더불평등을 말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남녀 모두가 참여하는 시민운동으로 발전시켜 마침내 순성여학교 설립에까지 이른 것은 개화기 사회개혁운동의 하나로서도 그 역사적 의의가 자리매김되어야 한다.
그러면 「여권통문」이 발표되고 난 지 126년이 지난 지금, 우리나라 여성들의 권리상황은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매년 교육과 정치, 경제, 건강에서의 성별 격차를 조사·발표하는 세계경제포럼의 「Global Gender Gap Report 2024」자료를 통해 먼저 「여권통문」에서 가장 강조되었던 교육권부터 살펴보자.
우리 사회가 교육에 있어서는 여성에게 동등한 기회가 주어지고 있다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우리나라 여성의 교육달성도는 조사대상 146개국 중 100위로 의외로 하위권에 속해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조사방식이 상대평가이고, 교육달성에 있어서 여성과 남성이 완전한 평등을 이룬 나라가 33개국이나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요인은 실질적 사회참여활동과 관련되는 직업교육에서는 여성비율이 낮고, 대학과 대학원 진학률에서 성별 격차가 크다는 점이다. 여성의 대학원 석·박사과정 진학률이 낮은 이유는 박사학위를 받아도 여성의 교수임용률이 남성에 비해 현저하게 낮은 현상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여성의 정치적 권한을 살펴보면, 우리나라는 72위로 중위권에 머물고 있다. 우리나라 여성은 서구와 달리 참정권을 얻기 위한 투쟁의 과정 없이 남성과 동등하게 참정권이 부여되었다. 그러나 국회의원 중 여성비율은 19.2%로 여성 국회의원은 여전히 소수집단이어서 의사관철에 상대적으로 불리하며, 무엇보다 성평등 이슈를 의제화하는 것이 쉽지 않다.
경제참여와 기회에 있어서는 112위로 조사대상인 네 분야에서 가장 낮다. 여성의 평균임금은 남성의 31.24%, 여성임원 비율은 12.8%에 불과하다. 「여권통문」이 공표되고 126년이 지난 현재 우리나라의 경제와 산업은 세계가 주목할 만큼 급속도로 성장하였지만, 여성들은 경제성장의 단열매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126년전 여성들이 신랄하게 비판했던 ‘밥하고 집안일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구습’에서는 얼마나 탈피해있을까? 같은 세계경제포럼의 보고서는 무급의 가사와 돌봄노동에 보내는 시간의 비율이 남성은 4.38%이나 여성은 14.1%로 남성의 세 배에 달한다는 통계를 제시하고 있어, 126년의 시간이 무색하게 집안일은 여전히 여성의 일임을 나타내고 있다.
마침 올해는 양성평등주간 일주일 후에는 추석명절연휴가 시작된다. 명절이면 항상 명절 스트레스가 화제가 되곤 한다. 2020년 사람인의 성인남녀 3,507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58.3%가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답했다. 그런데 이 조사결과를 성별과 결혼 여부에 따라 구분하여 보면, 기혼여성의 응답은 70.9%로, 기혼남성(53.6%)이나 미혼여성(59%)에 비해 크게 높았다. 스트레스를 주는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한 응답으로 기혼여성은 ‘시부모 등 시댁 식구’가 68.4%로 압도적으로 많은 반면, ‘처부모 등 처가 식구’라고 한 기혼 남성은 15.8%에 불과하여 성별간 격차가 매우 컸다(복수응답). 이러한 명절 스트레스는 이혼으로 이어지기까지 한다. 법원통계월보에 따르면, 2021년부터 2023년까지 설과 추석 명절 이후인 2~3월, 9~10월의 협의이혼 건수가 명절이 아닌 시기보다 높게 나타났다.
지난해 재혼 전문 결혼정보업체(온리유와 비에나래)의 재혼 희망 남녀를 대상으로 한 조사결과에서도 전 배우자와의 결혼생활에서 부부갈등이 가장 빈번하게 발생했을 때를 명절이라고 답했다(남성 35.8%, 여성 36.2%). 갈등의 요소로 남성은 양가 체류시간(32.1%), 여성은 차례준비 역할분담(34.3%)이 가장 높게 나타났다.
이 조사결과를 보면, 명절스트레스와 부부갈등의 원인은 여성에게 치중되는 가사노동뿐만 아니라 가부장적 전통에서 비롯된 여러 가지 가족제도의 ‘구습’이 명절에 증폭되어 나타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예를 들면, 남편의 본가는 ‘시댁’이라고 높여 부르지만 아내의 본가에 대하여 동등하게 부르는 ‘처댁’이라는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남편의 형제자매에 대한 호칭은 도련님, 아가씨로 존칭하지만, 남편이 아내의 형제자매를 도련님, 아가씨로 부르는 관습은 없다. 또한 아버지의 원가족은 가깝다는 친가, 어머니의 원가족은 바깥이라는 외가로 부른다.
이와 같이 가족제도와 관련된 우리의 가부장적 관습과 문화는 현재까지 우리의 일상에 지속되고 있어 이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도 다양하게 시도되고 있다. 주로 여성단체를 중심으로 성평등한 명절만들기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고, 여성가족부도 성평등한 명절만들기 캠페인을 실시하고 있다.
여성가족부 보도자료(2020.1.21.) 출처: 여성가족부 홈페이지 https://www.mogef.go.kr
그렇다면 우리의 명절은 얼마나 성평등해졌을까? 2019년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의 조사 결과 서울시민들의 43.2%는 명절이 ‘전보다 성평등해졌다고 느낀다’고 답했다. 그러나 ‘똑같다’는 응답도 39.3%를 차지하여 성평등 변화의 속도가 기대만큼 진전되고 있지 않다는 시민들의 체감도를 읽을 수 있다.
올해 추석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궁금하다. 명절이 성평등해지기 위해서는 캠페인이나 일회성 행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정부 차원에서 간소한 차례상의 예시를 제시해 확산을 도모하는 방안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평소 우리 사회가 꾸준하게 성평등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성평등 의식과 문화 확산을 위한 노력을 기울일 때 성평등한 명절도 따라오는 것이 아닐까? 추석을 앞두고 126년전 우리 선배 여성들의 외침을 되새기며 드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