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픽사베이
* 이 동화는 '별주부전'을 오마주 한 글입니다.
어느 날 서쪽 바다 용왕이 큰 병에 걸렸어요. 신하들은 왕의 병을 고치려 온갖 좋다는 약을 구해왔지만 어떤 약을 써도 왕은 낫지 않았어요.
하루는 용하다는 도미 의원을 불렀어요. 도미 의원은 용왕의 맥을 짚더니 말했어요.
“병을 고칠 수 있는 약이 있습니다. 땅에 살고 있는 토끼의 간이지요.”
그 말을 들은 용왕은 눈이 번쩍 뜨였어요.
용왕은 곧장 토끼를 잡아 올 신하들을 찾기 시작했지만 쉽지 않았어요.
꽃게 대감은 옆으로 걸어서 안되고 고래장군은 덩치가 커서 안된다고 발뺌했어요. 문어대감도 새우장군도 모두 거절했지요.
그때 조용히 지켜보던 자라가 나섰어요. “제가 토끼를 잡아오겠습니다.”
용왕은 자라의 용기에 크게 기뻐했고 그렇게 자라는 땅으로 올라가게 되었어요.
한참을 헤엄쳐 땅에 도착한 자라는 나무 그늘 아래에서 자고 있는 토끼를 발견했어요.
“나는 용궁에서 온 자라라고 하오. 용왕님께서 예쁘고 총명하기로 소문난 토끼를 보고 싶어 하셔서 직접 모시러 왔소.”
본인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토끼는 자라의 말에 관심을 보였어요.
“용왕님께서 큰 벼슬을 내린다고 하니 나와 같이 가는 게 어떻겠소?”
달콤한 유혹에 흔들린 토끼는 결국 자라의 등에 타고 용궁으로 향했어요.
그러나 용궁에 도착한 토끼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병사들이었고 이들은 토끼를 꽁꽁 묶어 용왕님 앞으로 끌고 갔어요.
용왕은 토끼에게 미안해하며 말했어요.
“내가 살려면 너의 간이 필요하구나. 여봐라. 어서 토끼 배를 가르고 간을 꺼내 오거라.”
무시무시한 말을 들은 토끼는 살아야겠다는 마음으로 재빨리 꾀를 내었어요.
“용왕님의 말대로 제 간은 좋은 약이 맞습니다. 그렇게 워낙 귀한지라 평소엔 산속 동굴에 꽁꽁 숨겨두는데 이를 가져오지 않았으니 어쩌면 좋사옵니까?”
당황해하는 용왕을 보며 토끼는 능청스럽게 말을 이어갔어요.
“만약 제 배를 갈라 간이 나오지 않으면 용왕님 병은 영영 고칠 수 없습니다. 지금 빨리 땅으로 올라가 간을 가져오겠습니다.”
용왕은 고민 끝에 토끼의 말을 믿기로 했어요.
“자라는 땅으로 올라가 토끼의 간을 가지고 오시오.”
그렇게 토끼와 자라는 다시 육지로 향했어요. 언덕에 다다른 순간 토끼는 잽싸게 도망치며 소리쳤어요.
“다들 속았지? 어찌 간을 넣고 꺼낼 수 있겠소? 다신 날 찾지 마시오.”
자리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꺼이꺼이 울었어요.
“토끼도 놓치고 용왕님의 병도 고칠 수 없게 되었으니 나는 어찌할꼬..”
해가 지도록 바다로 돌아가지 못하고 한참을 울고 있던 자라 앞에 토끼가 다시 나타났어요.
“비록 나를 용왕님께 바치려했지만 결국 이리 살려주었으니 당신을 도와주겠소.
우리 마을에 유명한 의원님을 찾아가봅시다.”
토끼는 자라와 함께 마을에서 명의로 소문난 부엉이 의원을 찾아갔어요.
“의원님, 서쪽바다의 용왕님을 살릴 방법이 없을까요?”
부엉이 의원은 나무 뒤에서 천리 밖도 내다 볼 수 있는 커다란 망원경을 꺼냈어요.
그리곤 망원경을 바다 속으로 쑥 집어넣었죠. 한쪽 눈을 잔뜩 찡그린 채 망원경을 들여다보자 침대에 누워 시름시름 앓고 있는 용왕님이 보였어요.
“용왕님의 병명을 알 것 같소. 백혈병이라 불리는 병이오. 백혈병에 걸리면 백혈구가 혈액을 제대로 생성해 내지 못하게 되오. 그러다 결국 면역이 떨어지고 빈혈, 호흡곤란, 출혈 등으로 생명이 위험해진답니다.”
의원의 말을 들은 자라는 얼굴이 어둡게 굳었고 이내 화가 나서 씩씩댔어요.
“의원님, 그래서 제가 토끼의 간을 바치려고 했는데 결국 못하게 되었지 뭡니까. 지금이라도 다시 토끼를 용궁으로 데려 가야겠습니다”
그러자 부엉이 의원이 자라를 보며 말했어요.
“토끼의 간이 백혈병을 고칠 순 없소. 용왕님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은 따로 있소.”
자라는 눈이 동그래졌어요. “그게 뭡니까?”
“우리 몸엔 조혈모세포라는 것이 있소. 조혈모세포는 몸에서 혈액 세포를 만들어내는 어머니 세포인데 용왕님처럼 백혈병에 걸린 환자들은 조혈모세포가 건강한 혈액세포를 만들어 내지 못해 생명이 위험한 것이오. 이럴 경우엔 다른 이의 건강한 조혈모세포를 이식받아야 하오.”
자라는 이제야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그럼 당장 조혈모세포를 저에게 주십시오. 바로 용궁으로 가져가겠습니다.”
부엉이 의원은 고개를 저었어요.
“그게 그렇게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오. 조혈모세포를 기증하겠다고 약속한 사람들 중 용왕님과 조직적합성 항원형(HLA type)1)이 일치하는 자를 찾아야 하는데 일치할 확률이 부모 자식간 5%, 형제 자매간 25%, 타인 간은 수천에서 수만명 중 1명이오. 가령 일치하는 사람을 겨우 찾는다 해도 갑자기 기증을 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경우도 있어 정말 쉽지가 않은 일이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절망하는 자라를 본 부엉이 의원은 칠판을 가져와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기로 했어요.
<조혈모세포 기증절차>2)
“조혈모세포 기증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시간, 기다림과 간절함이 필요한 일이라오. 현재 용왕님과 HLA가 일치하는 사람은 없으니 조금 더 기다려봐야겠소.”
좌절하는 자라 옆에 있던 토끼가 이윽고 입을 열었어요.
“일치할 확률을 높이고 이식을 많이 하려면 최대한 많은 이들이 조혈모세포 기증희망을 등록해야 하는 것이군요. 의원님 혹시 저도 지금 등록할 수 있나요?”
부엉이 의원은 토끼를 기특하게 바라보았어요.
“물론이오. 가까운 기증희망등록기관3)을 찾으면 되니 내가 도와주겠소.”
토끼는 부엉이 의원의 도움을 받아 근처에 있는 헌혈의 집에 방문해서 조혈모세포 기증신청을 마쳤어요.
그리고 얼마 뒤, 토끼는 전화 한통을 받게 되었어요.
“안녕하세요. 한국조혈모세포은행협회입니다. 현재 유전자형이 일치하는 혈액암으로 투병중인 환자가 나타나 도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증 의사를 밝혀주시면 연락드리겠습니다.”
토끼는 잠시 망설이다 이윽고 대답했어요. “네! 기증하고 싶습니다.”
며칠 뒤 토끼는 병원으로 향했어요. 병원에서 3일간 지내며 건강검진도 받고 기증에 필요한 주사도 맞고, 조혈모 기증을 마쳤어요.
태어나 처음 해본 경험에 낯설고 두렵기도 했지만 가슴 한켠이 뿌듯해지는 마음을 안고 병원 문을 나선 토끼의 눈에 당근 꽃다발을 들고 있는 자라와 부엉이 의원이 보였어요.
“정말 기특하고 대견하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텐데 다른 이의 소중한 생명을 위해 선뜻 나서주다니, 이건 정말 벼슬을 받아야 할 일인 것 같소.”
토끼는 멋쩍게 웃었어요. “덕분에 의미 있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더 감사합니다.”
자라도 토끼 앞으로 한 발 가까이 갔어요. “방금 용궁에서 소식이 들어왔는데 누군가 용왕님께 조혈모세포 기증을 해주었다고 하오. 덕분에 용왕님이 쾌차할 것 같으니 저는 이제 바다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처음 만날 땐 썩 유쾌하지 않은 인연이었지만 다음에 만나게 된다면 웃으며 인사합시다.”
마지막 악수를 끝으로 자라와 토끼는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어요.
그리고 다음 해, 언덕이 노란 데이지 꽃으로 물들 무렵, 좋아하는 나무그늘 아래에서 낮잠을 즐기고 있는 토끼의 귀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어요.
“이보시오. 일어나보시오. 내가 왔소이다.”
토끼는 번쩍 눈을 떴어요. 눈 앞에 서 있는 자라의 모습이 신기해서 몇 번이고 눈을 비볐어요. “이게 얼마만이오. 그간 잘 지냈소? 육지엔 또 무슨 일로 오셨소?”
자라는 미소를 띠며 말했어요. “이번엔 진짜 사실만 전하겠소. 용왕님께서 정말로 토끼를 초대하고 싶어 하시오. 지난번 일에 대한 사과와 조혈모세포 기증에 참여한 것에 대해 큰 상을 내리신다고 합니다.”
토끼는 다시 한 번 자라의 등에 타서 용궁으로 향했어요. 용궁에 도착하니 오징어 대감의 피아노 연주소리와 소라 오케스트라의 즐거운 합창이 들려왔어요.
그리고 부쩍 건강해진 모습을 한 용왕이 얼굴을 드러냈어요.
“지난번 일 이후로 우리 용궁의 모든 신하들도 조혈모세포 기증신청을 하였소. 나도 누군가에게 희망과 꿈을 선물할 수 있는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잊지 않으려 하오. 덕분에 마음이 매우 따뜻해졌소. 앞으로 언제든 원할 때 마다 용궁을 오가며 많은 것을 알려주시기 바라오. 자라와 토끼가 청하는 일이라면 뭐든 들어주겠소.”
어쩐지 든든한 지원군이 생긴 것만 같아 토끼와 자라는 어깨를 으쓱였어요.
그리곤 약속했어요.
“아직도 기증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 많다고 하니 앞으로도 조혈모 세포기증에 대해 더 많이 알려야겠소. 나는 육지에서 자라는 바다에서 열심히 노력해봅시다.
우리의 소중한 생명을 위해 모두가 나설 때라는 걸 잊지 말기로 하오”
출처 : 보건복지부 국립장기조직혈액관리원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