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픽사베이
* 위 동화는 안데르센 '벌거벗은 임금님'을 오마주 한 글입니다.
옛날에 새 옷을 무척 좋아하는 임금님이 있었어요. “난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임금이 될 거야! 여봐라, 더 멋진 새 옷을 가져와라.”
매일 사 온 옷들로 임금님의 옷장이 터질 것 같던 어느 날, 신하 한 명이 말했어요.
“임금님, 성 안에 있는 모든 옷장이 가득 찼습니다. 더 이상 옷을 넣을 곳이 없으니 새 옷을 그만 사시는 게 어떨까요?”
신하의 말을 들은 임금님은 크게 화를 냈어요.
“옷장이 가득 찼으면 어제 입었던 옷을 버리거라. 어제는 그 옷이 마음에 들었지만 오늘 다시 보니 별로구나! 내 기분은 매일 달라지니 매일 새로운 옷을 입어야겠다!”
결국 신하들은 임금님의 옷장에서 아직 한 번밖에 입지 않은 옷들을 꺼내 성 밖으로 가지고 나가기 시작했어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깊은 숲속으로 간 신하들이 몰래 옷을 버리려는 순간 나무 사이에서 울고 있는 어린 꼬마가 보였어요.
“꼬마야, 너는 왜 여기서 울고 있니?”
“어머님이 아프셔서 약을 드셔야 하는데 물이 없어 샘을 찾으러 나왔습니다. 그런데 마을의 샘들이 다 말라버렸고 그나마 남아있는 샘들은 까맣게 변했습니다.”
신하들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꼬마를 쳐다봤어요.
“마을의 샘이 다 말랐다고? 어른에게 거짓말을 하면 나쁜 아이란다!”
그렇지만 꼬마는 다시 한번 또박또박 말했어요.
“임금님이 매일 새 옷을 찾으신다 들었습니다. 새 옷을 만드는데 마을의 물을 얼마나 많이 쓰고 계신지 아십니까? 청바지 1벌에만 7,000 리터의 물이 필요합니다. 이는 제가 9 년간 먹을 수 있는 물의 양입니다.1)
그 말을 들은 신하 한명은 갑자기 기침을 하기 시작했어요. 신하의 손에 들린 자루 안에는 임금님이 버린 70개의 옷과 신발들이 담겨있었기 때문이에요.2)
“뿐만 아닙니다. 알록달록한 색을 옷에 염색하는 동안 폐수가 끝도 없이 흘러나와 마을 인근의 샘들은 그 해 임금님이 자주 입는 옷의 색으로 물들곤 합니다.”
그 말에 이윽고 신하 한 명이 털썩 주저앉았어요.
“사실 고백할게 있어” 고개를 푹 숙인 신하는 조용히 말을 이어 나갔어요.
“지난번 마을의 샘을 검사했을 때 수많은 미세 플라스틱이 나왔는데 이 중 절반 이상이 옷에서 나온 걸 확인 했었어.”3)
신하들은 부끄러운 마음에 더 이상 꼬마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지만 한 번 더 용기를 내어 물었어요.
“그런데 어머님은 왜 아프신 것이냐?”
“어머님은 옷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을 하십니다. 임금님께 매일 새로운 옷을 바치려고 식사도 거른 채 밤낮없이 일을 하시던 중 지붕이 무너지는 바람에 크게 다치셨습니다. 알고 보니 옷을 만드는 경비를 줄이려고 안전장치를 제대로 설치하지 않은 건물이었다고 합니다.”4)
이 이야기를 들은 신하들은 더 이상 지켜볼 수만 없다고 생각했어요.
“우리는 정말 부끄러운 어른이었구나. 자라나는 아이들과 우리 마을을 위해 임금님을 혼내줘야겠어”
며칠 후 임금님에게 처음 보는 손님들이 찾아왔어요.
“저희는 바다 건너에서 온 옷을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저희를 디자이너라고 부르지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옷감으로 멋있는 옷을 만들어 임금님께 바치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임금님은 귀를 쫑긋 세웠어요. 신비한 옷감으로 만든 옷을 얼른 입어보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이 옷감은 게으르고 멍청한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아요. 새 옷을 만들려면 비단실이 필요해요. 가장 비싼 것으로 아주 많이요!”
임금님은 비싼 옷감을 듬뿍 가져다주었어요. 새 옷을 입을 생각에 마음이 설레어 잠도 잘 자지 못했죠. 며칠 뒤 옷이 다 만들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임금님은 헐레벌떡 옷 방으로 뛰어갔어요. 그런데 방에 들어간 임금님은 깜짝 놀랐어요. 옷이 보이지 않았거든요.
“이럴 수가! 내가 게으르고 멍청하다는 말인가? 옷이 보이는 척을 해야겠어."
임금님은 디자이너들에게 금은보따리를 주며 말했어요. “훌륭해! 정말 마음에 쏙 드는군! 내일 행진 때 이 옷을 입겠어.”
다음날 임금님은 신비한 옷감으로 만든 새 옷을 입고 성 밖으로 나갔어요. 한껏 뽐내며 행진을 하고 있는데 꼬마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어요.
“임금님이 벌거벗었다! 임금님이 아무것도 입지 않았어!”
그 말을 들은 임금님은 부끄러워서 얼른 성으로 돌아갔답니다. 성에 돌아온 임금님은 디자이너들을 찾았지만 그들은 이미 도망간 뒤였어요. 사실 이 디자이너들은 신하들이 임금님을 혼내주기 위해 데려온 사람들이었어요.
울상이 된 임금님에게 한 신하가 다가왔어요.
“임금님이 새 옷에 빠져있는 동안 성 밖의 많은 사람들이 괴로워했습니다. 부디 지금이라도 사람들을 돌보는 어질고 착한 임금님이 되어주세요.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임금님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어요.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신하는 제일 먼저 성 안의 가장 끝에 있는 방으로 임금님을 데려갔어요. 그곳은 돌아가신 임금님들이 입던 옷들이 보관되어 있는 방이었어요.
“다들 몇 번 입지 않았던 옷들입니다. 모두 꼼꼼하고 철저하게 관리된 옷 들이니 새 옷이 사고 싶어질 땐 이곳에 먼저 들러보세요. 옛날 옷을 멋스럽게 소화하는 우아한 왕이 되실 거예요.”
진열되어 있는 옷들이 꽤나 마음에 들었던 왕은 속마음을 숨긴 채 다시 말했어요.
“저걸로는 옷을 좋아하는 내 마음을 모두 채울 수 없어.”
신하는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어요.
“한 달에 한 번씩 사람들이 안 입는 옷을 들고 나와 서로 바꿔가는 날을 정해주세요. 나한텐 더 이상 필요 없는 옷도 누군가에겐 꼭 필요한 옷일 수 있어요. 임금님도 그때 함께 하며 사람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새로운 옷도 찾아보세요.”
사실 임금님도 성 안에만 있는 것이 늘 외로웠어요. 거리에 나가 친구를 사귀고 옷을 바꿔 입는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꽤나 즐거웠어요.
다음날 임금님은 끝 방에서 골라온 고풍스러운 옷을 입고 사람들 앞에 섰어요.
“나는 오늘부터 옷을 사지 않을 것이다! 옷을 고르느라 놓쳤던 내 주변 사람들의 기쁘고 슬픈 일에 함께 하는 임금이 되겠다. 또 앞으로 매월 21일은 입지 않는 옷들을 들고나와 추억을 나누고 서로에게 옷을 선물하는 날로 정하겠다. 나 또한 그날 함께할 것이니 모두 즐겁고 행복한 하루가 되길 바란다!”5)
그 뒤로 마을엔 진짜 행복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어요.
옷을 만드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배출과 쓰레기들이 줄며 파란하늘과 맑게 흐르는 물을 볼 수 있었고, 무리하게 옷을 만들지 않아도 된다는 소식에 공장들은 튼튼한 지붕을 짓고 옷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휴식시간도 충분히 주었지요.
어느 가을날, 거리에서 사람들과 옷을 나누던 임금님에게 꼬마가 다가와 손을 꼭 잡고 말했어요.
“진짜 멋있는 임금님은 화려한 옷을 입는 임금님이 아니에요. 정말 소중한건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요. 옷을 사지 않고도 자기만의 멋을 찾은 임금님이 저는 세상에서 제일 멋있어요!”
'다시입다연구소'는 패션 산업이 환경에 끼치는 악영향을 알리고 의류 폐기물을 줄이기 위해 2020년에 시작된 비영리스타트업입니다. 대표적으로는 ‘21%파티’, ‘21%파티 툴킷’사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입지 않는 옷을 1:1 물물교환을 진행하는 파티를 하거나, 해당 행사를 지인들과 함께 열어볼 수 있도록 돕는 도구세트를 툴킷으로 제공하고 있습니다.
[출처- 다시입다 연구소 https://wearagain.org/index]
[참고- 옷을 사지 않기로 했습니다/이소연, 벌거벗은 임금님/딥스터디]
1)소준섭「청바지 한 벌 만드는데 물 7000리터, 과잉 풍요의 시대를 사는 우리들「<프레시안>
4)주선영「하루 1100개의 셔츠 만들다 다친 소녀, 가족을 위해선 다시 공장에 가야합니다」<더나은 미래>
5)<한국일보> 여성 독립잡지 만들던 직장인들은 왜 헌옷 교환 파티를 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