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 사회를 위협하는 것에 대해선 다양한 의견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정치적 갈등라고 할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는 빈부격차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인간이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발전하는 로봇과 컴퓨터 인공 지능, 4차 산업 혁명을 필두로 하는 기술적 발전이 인류의 사회에 위협이 된다고 여기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보다도 가장 긴급하게 다루어야 할, 천천히 사회의 내부를 갉아먹는 치명적이고 심각한 독의 이름은 ‘편견’이다.
편견은 최근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으며 편견의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는 혐오 또한 증가하고 있다. 혐오와 편견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어떠한 집단에 대해 편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증오가 만들어지고 곧 증오는 혐오로 변한다. 대표적인 예시로 북미에서 발생한 아시아인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코로나를 이유로 증가했다는 사실을 보면 왜 편견이 쉽사리 혐오로 이어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캐나다 통계청은 2020년 전국 경찰에 신고 된 증오 범죄 중 아시아인을 노린 범죄가 269건으로 2019년의 67건보다 더 높게 증가하였다고 밝혔으며, 뉴욕의 60대 아시아 여성은 자신의 아파트로 들어가던 중 인종 차별 욕설을 듣고 머리를 가격 당하고 수백 번에 걸친 폭행을 당했다.
▲출처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http://www.catholicnews.co.kr)
코로나 상황 속에서 아시아인에 대한 편견이 그녀에게는 폭행이라는 혐오로 돌아온 것이다. 대한민국 또한 편견과 혐오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최근에 대한민국의 한 청년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폭행을 당했다. 동성애자라는 편견을 가진 사람이 표출한 혐오의 방식이 폭행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처럼 편견이라는 이름의 독이 우리 사회에 점점 퍼지고 있다, 따라서 편견을 해결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할 필요성이 있다.
편견이란 무엇인가. 편견이란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을 뜻한다. 우리 사회는 과연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아니다. 2019년 국가통계포털KOSIS 설문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다문화 가정은 100만으로 사회의 일부분을 구성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들이 편견에서 자유로울까?
조사 결과는 생각보다 흥미로운 내용을 보여준다. 우리 사회의 일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당시 다문화 가정을 대상으로 주위에서 차별 받은 경험이 있는지 설문을 했을 때 일 년에 1~2회 정도 당했다고 응답한 유형(50.8%)이 가장 많았으며 뒤이어 2~3개월에 1~2회(17.6%), 한 달에 1~2회(7%), 일주일에 1~2회 이상(3.9%)이라고 답했다. 과연 같은 민족이 아닌 자들에게만 편견 속에서 차별을 가하는 것일까.
2022월 3월 7일 갱신된 국가통계포털 설문 조사에 따르면 같은 민족인 북한 이탈 주민에 대한 편견도 심각한 수준이다. 2021년 조사에 따르면 북한 이탈 주민이 남한 생활에 불만족하는 주된 이유 중 1순위로 북한 이탈주민에 대한 남한 사회의 차별/편견 때문이라고 답한 비율은 무려 전체 16.5%였으며 1, 2순위로 똑같은 내용을 선택한 비율은 26.1%나 되었다.
서론에서 보았듯, 편견은 쉽게 혐오로 더 나아갈 수 있다. 한 사람의 편견이 만들어낸 수많은 폭행과 같은 난폭한 행위들이 이를 증명한다. 작금의 대한민국은 편견으로 둘러싸여 있다. 분명히 같은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에게 자신들과 다르다고 말하며 그들을 본인들과 구별 짓는다. 아시아인에 대한 편견이 60대 아시아 여성에 대한 폭력을 만들어냈고,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은 동성애자에게 주먹을 휘두르게 하였다. 게다가 다문화 가정에 대한 편견이, 북한 이탈 주민에 대한 편견이 그들에 대한 차별을 만들어내었듯, 편견은 차별과 혐오를 만들어낸다.
그들이 왜 폭행을 당해야 했는가, 그들이 왜 차별을 당해야 했는가? 그들이 주먹을 맞을 이유는 없었다. 다른 민족이라고, 타 문화권에서 온 자들이라고 차별을 당할 이유가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독약처럼 천천히 스며들어오는 편견을, 다른 이들에 대한 폭행과 차별을 정당화시키는 이 편견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이러한 사태들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우리 사회를 갈라놓는 편견을 지우기 위해 우리는 사람을 집단으로 바라보지 말고 개인으로 그들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 우리가 편견에 휩싸이는가? 그것은 사람들을 우리가 상상해낸 집단의 이미지와 동일화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다문화 가정이기 때문에 이럴 것이며, 그들이 탈북민이기 때문에 이럴 것이며, 그들의 출신지가 어디이기 때문에 이럴 것이다. 아니면 그들의 성별이, 그들의 직업이, 그들의 지위가, 그들의 학벌이 이러므로 그럴 것이라는 생각에 빠지며 무의식중에 편견이라는 이름의 색안경을 끼기 시작하는 것이다.
부끄럽지만 글을 쓰는 본인도 편견에 사로잡혀 다른 이들을 증오했던 적이 있었다. 그것은 대학생이었을 때의 일인데, 대학교 신입생에게 있는 조별 과제가 나에게 여간 큰 곤혹이 아닐 수가 없었다. 당시 교수님께서는 매주 있었던 조별 과제를 조원들과 함께 해결하라고 주셨는데, 같은 학번이지만 나이가 많았던 다른 조원들은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참여조차 하지 않으며 내가 하는 조별과제를 고맙다는 말없이 가져가서 제출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조별 과제를 혼자서 진행하던 나에게는 편견이 하나 생기기 시작하였다. 바로 같은 학번이지만 동갑이 아닌, 그러니까 20세의 나이로 대학 생활을 시작하지 않은 사람들은 게으르고 할 일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편견이었다. 또한 조별 과제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마음마저 자리 잡히고 있었다.
그렇게 조별 과제를 진행하던 중에 대학 글쓰기 과목까지 조별 과제가 만들어졌고 조원 중에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같이하게 되었다. 내가 지니고 있던 편견 때문에 나는 처음 만난 그를 그리 좋게 바라보지 않았다. 그 역시도 과제를 대충 진행하지는 않을까, 혹은 또 나 혼자만 조별 과제를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면서 그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 생각들을 무의식중에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조별 과제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면서 뛰어난 성과를 보여주었고 가히 낭중지추라고 할 만큼 그 능력을 있는 힘껏 조별 과제에서 보여주었으며 부족함이 많고 과문하였던 나에게까지 큰 영향을 주었다. 나는 그를 그로서 본 것이 아니라 그가 속해 있는 집단으로만 바라보았던 것이다. 그것이 틀렸음을 그는 증명했고 편견을 어떻게 해결하여야 하는지를 그가 나에게 보여주었다.
위에서 나타나듯, 필자의 개인적인 경험이 편견을 없앨 수 있는 작은 방향을 알려주었다. 우리는 다른 이들을 집단으로 바라보지 않고 개인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만나게 되는 다양한 사람들을 그들이 속한 집단의 모습으로 판단하지 않을 때, 다문화 가 정의 A가 아닌 그저 A라는 사람, 북한 이탈 주민 B씨가 아닌 그저 B씨로 바라볼 때 우리 사회가 편견이라는 독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 있는 편견이라는 독약은 결국 혐오가 될 것이며 다른 이들에게 상처 입히기만을 반복할 것이다. 사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집단의 모습으로만 보면서 그들에 대한 편견으로 증오와 혐오를 반복한다면 이 수레바퀴에서 피해자와 가해자는 절대로 나누어지지 않고 우리 모두는 편견이 만들어내는 피해자가 될 것이고 가해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 기회가 있다. 점점 사회 안으로 스며드는 독약을 없애기 위해서, 편견을 깨뜨리기 위해서 우리는 다른 이들을 그들이 속한 집단으로 보기 이전에 개인으로 봐야 할 것이다. 결국 개인과 개인으로 서로 바라볼 때, 우리는 편견을 깨뜨릴 수 있으며 편견이 가져올 폭력과 차별에서 벗어날 수 있다.
* 본 원고는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 에디터가 작성한 원고로, 센터의 공식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